서울 동쪽 끝자락에 있는 고등학교 1학년 학생들과 ‘사회적경제’ 교육으로 만난 지 6년째다. 학생들이 익숙한 제도와 체제를 낯설게 보고 질문해 보길 바라며 학교에서 마련해준 자리다. 본격적인 수업에 앞서, 학생들은 ‘사회에서 성공하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요건’을 골라보고, 나름의 기준대로 우선순위를 매긴다. 이를 다시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 것’과 ‘개인이 선택할 수 없는 것’으로 구분해 본 뒤, 서로 생각을 나눈다.
EBS에서 작년 방송한 〈다큐멘터리 K〉 교육격차 5부 ‘스포일러’에서는 한 초등학교에서 ‘선행학습’을 해야만 풀 수 있는 문제가 포함된 시험을 보고, 평균 점수가 가장 높은 반이 상금을 받는 실험이 나온다. 축하 상금을 받은 반 평균 점수가 높았다는 건 선행학습한 학생들이 많았다는 얘기고, 선행학습은 학교에서 공통으로 배우는 교과 과정 외에 별도로 공부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 실험에서 1, 2, 3등을 제외한 학생들은 모두 5천 원짜리 문화상품권을, 3등은 5만 5천 원, 2등은 12만 원, 1등은 무려 20만 원에 달하는 ‘보상’을 받는다. 상대평가로 점수에 따라 차등 대우를 받는 ‘성과주의’를 아직 경험해 본 적이 없는 학생들에게는 매우 낯선 상황이다.
“20만 원이랑 5천 원이랑 차이가 엄청난데, 나도 열심히 했는데 쟤네들이 왜 나의 40배를 가져가지? 점수 몇 점 차이로 저렇게 많은 것을 가져가도 되나? 뭔가 슬프거든요.”라고 아쉬움을 표하는 학생도 있었다. 반면, “제가 열심히 안 해서 그런 거고, (많이 받은) 애들은 옛날부터 (공부를) 열심히 했으니까” 더 많은 보상을 받는 게 맞다고 수긍하는 학생도 있었다. “저는 살면서 이런 경험을 다시는 안 했으면 좋겠어요. 제가 너무 금방 포기할 것 같아요.”라는 학생까지도. 오전 8시에 등교해 7교시인 오후 4시가 될 때까지 엎드려 있는 학생들을 대변해 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볼 때마다 마음이 쓰리다.
입시경쟁 없는 대신 ‘일’을 통해 책임감 독립성을 기르는 교육 다양한 사람 포용하며 ‘모두에게 득이 되는’ 방향으로 다듬어온 제도
지난 학기 말, 한 학생이 우리 수업이 그동안 보지 못하고 살던 것들을 들여다보도록 했다며, ‘타인의 앞모습을 볼 수 있게 도와주는 과목’이라 비유했던 것이 생각난다. 나보다 멋지고 뛰어난 사람들의 앞서가는 뒷모습만 좇다 보니 다른 사람들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는데, 뒤돌아 다른 누군가의 앞모습을 바라보며 타인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는 고마운 소감이었다.
아이슬란드 사회에 대해 알아가며 내가 느꼈던 감상도 이와 비슷했다. 타인의 뒷모습이 아닌, 얼굴과 눈을 바라보는 것, 함께 연결되어 꿈꾸고, 살고 싶은 세상을 실현해 가는 것. 한 사회를 구성하는 각각의 존재들이 서로를 긍정하고 신뢰하며 책임을 다할 때, 우리는 서로를 의지하며 함께 살아갈 수 있다. 이번 화에서는 아이슬란드의 현재와 그들이 만들어가는 미래를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사회학자 에릭 클라이넨버그는 『도시는 어떻게 삶을 바꾸는가』(서종민 역, 웅진지식하우스, 2018)에서 ‘불평등과 고립, 분열과 양극화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계획의 문제’라고 했다. 한 사회가 중시하는 가치와 문화를 구현해 갈 수 있도록 돕는 ‘제도’를 제대로 갖추어갈 때, 민주주의가 건강하게 작동하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포용하며 모두에게 득이 되는 방향으로 다듬어 온 아이슬란드의 제도를 몇 가지 소개하고 싶다. 어떤 부분이 우리와 다른지, 낯설거나 새롭게 느껴지는지 질문하며 읽어보면 좋겠다.
입시 경쟁이 없는 학교에 다니며 성장하는 아이슬란드 어린이들은 서로를 비교하거나 경쟁하지 않고, 자기 내면을 탐색할 시간을 충분히 갖는다. 자기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스스로를 존중하는 경험은 타인을 향한 존중으로도 이어지기 마련이다. 이들은 16세까지의 의무교육 이후, 일반 고등학교나 직업교육학교에 진학하거나, 일찍부터 노동시장에 진입하기도 한다.
노동조합 가입률이 가장 높은 나라, 임금 협상으로 최저임금 정해 부의 재분배 위한 ‘소득세’ 제도…모두에게 공공서비스 보장
아이슬란드에서는 일을 통해 책임감을 배우고 독립성을 기르는 것이 중요한 가치로 여겨진다. 또한, 인구가 적기 때문에 노동 수요가 상대적으로 높아, 청소년들도 쉽게 일자리를 찾을 수 있다. 청소년들이 학업과 일을 병행하며 학비, 생활비를 스스로 충당하고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일이 자연스럽고 흔하다. 그 밑바탕이 되는 것이 노동의 가치에 대한 존중, 즉 일한 만큼 정당하게 대가를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다.
아이슬란드에는 ‘최저시급’이 없다. 내년도 우리나라 최저시급이 10,030원으로 결정됐다는 뉴스를 본 이들이라면 최저시급이 없다는 말이 의아하리라. 바꿔 이야기하자면, 아이슬란드에는 우리나라처럼 ‘정부가 정한’ 공식적인 최저시급이 없다.
산업별 최저임금은 노동조합과 기업, 정부 소속 중재위원회가 임금 협상을 통해 결정한다. 아이슬란드는 노동자의 90% 정도가 노동조합에 가입해 있을 만큼, 전 세계에서 노동조합 가입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다. 아이슬란드에서 가장 큰 노동조합 연합체인 ASI(Alþýðusamband Íslands)에만 13만 6천 명(전체 인구의 약 36%)에 달하는 조합원이 가입해 있을 정도다. 좋은 노동 환경이 절로 갖춰지는 게 아니라는 걸 실감케 하는 수치다.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재정 곳간을 채우고, 소득 재분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소득세 제도’다. 만 16세 이상의 아이슬란드 노동자들은 소득 구간에 따라, 매달 최고 46.25%에서 최소 37.13%까지 소득세를 낸다. 소득세율이 꽤 높은 편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높은 세율을 보편적으로 적용하되 매달 개인 소득공제도 있어 저소득자는 상대적으로 적은 세금을 내게 된다. 확보된 재정은 다시 의료와 교육, 육아, 주거지원, 노후 보장 등 모두에게 안전망이 되어주는 공공 서비스로 돌아온다.
올해 8월 20일 발간된 소득 특집호에는 CEO부터 소셜미디어 인플루언서에 이르기까지 약 4,000명의 명단이 실렸다. 정부와 이웃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투명하고 적극적인 납세 문화를 정착시키고, 그 혜택을 모두가 함께 누리는 것은, 개인이 모든 걸 혼자 책임져야 하는 경쟁과 불신의 사회와는 분명 다르다.
기업 이사회 40%이상 ‘성별 할당제’, 정당 공천 ‘자발적으로 성별 균형’ 이뤄
아이슬란드 여성들이 정치 영역에서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는 길이 1975년 ‘여성 파업’을 계기로 열렸다면, 2008년 금융위기는 경제 분야에서 평등의 길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2013년 이후, 상장기업과 직원수 50명 이상인 비상장기업이 이사회를 구성할 때, 특정 성별이 과소 대표되지 않도록 하는 ‘성별 할당제’가 법제화됐다. 눈여겨 볼만한 점은 여성과 남성 모두 최소 40% 이상이 되도록 하여, 한 성별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 있게 의사결정 테이블을 구성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이다. 정치 분야에서는 성별 할당제가 의무화된 건 아니지만, 정당들은 선거 후보를 공천할 때 최소 40%를 한 성별로 구성되게 함으로써 자발적으로 성별 균형을 고려하고 있다.
한국도 지난 2022년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개정으로 자산 2조 원 이상 기업에 한해 여성 임원을 한 명 이상 선임해야 하는 조항을 마련했다. 그러나 당초 개정안이 ‘이사회 3분의 1 이상을 여성으로 의무화’하는 것으로 발의됐던 것을 생각하면 많이 후퇴한 결과다.
첫발 내디딘 것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한둘로는 안 된다. 이사회에 여성 한 명은 그냥 전시용이고, 둘은 소수지만, 셋은 있어야 집단 역학에 변화가 온다. 대화 방식도 변하고 토론 내용도 바뀐다’며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이야기했던 전 상공회의소 회장이자 현 아이슬란드 대통령 할라 토마스도티르의 말을 곱씹어야 할 때다.
2017년 세계 최초로 도입된 ‘동일노동 동일임금 인증제’ 타당한 이유 없이 임금격차 시정 않으면, 하루 50만원씩 벌금
더 나아가, 아이슬란드 사람들이 격차를 줄이고, 일과 삶의 균형을 이뤄가도록 하는 제도를 몇 가지 더 살펴보자.
‘동일노동 동일임금 인증제’(Equal Pay Certification)는 임금 격차를 줄이기 위한 구조적 개혁으로, 2017년 세계 최초로 도입되었다. 동일한 가치의 업무에 대해 성별과 관계없이 동일한 임금을 지급하고 있음을 ‘기업들이 입증’하도록 하는 정책이다. 이는 나아가, 인종, 종교, 장애, 성적 지향 등 모든 종류의 차별에 따른 임금 차별을 예방하고 근절하는 발판이 될 수 있다.
동일임금 라벨(Equal Pay Label)을 제공해 ‘성차별 없는 회사’임을 인증한다.
증명서는 3년마다 갱신해야 하며, 이유 없이 임금 격차가 시정되지 않으면, 벌금이 한화로 하루 약 50만 원씩 시정될 때까지 누적된다. 2020년부터는 직원수가 25~49명 사이인 중소기업은 동일임금 인증을 받거나, 그보다 절차가 간소화된 동일임금 확인(Equal Pay Confirmation)을 받는 것 중 선택할 수 있도록 개정되었고, 성평등국(The Directorate of Equality; Jafnréttisstofa)이 감독을 강화해 동일임금의 중요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임금 불평등을 근절하기 위한 해결 방법으로 근로자 개인의 선택이나 행동 변화에만 초점을 둔다면 해결은 요원해진다. 성차별적 사회에서는 개인에게 자연스럽게 책임이 전가되기 때문이다. 임금 차별을 받고 있다는 것을 개인이 증명해야 하고, 설사 증명에 성공하더라도 그 한 명에 대한 차별만 시정되는 셈이다.
결국 불평등을 개선하는 책임을 지고, 바뀌어야 할 것은 사회다. 동일노동 동일임금 인증제가 성공적으로 구현될 수 있었던 것도, 공정한 급여를 지급하고 있다는 증명 책임을 직원이 아닌 ‘고용주’에게 전가한 데 있다. 성과 보상에 있어 기업의 책임과 명확성을 높임으로써 투명한 급여 시스템이 구축될 수 있었다. 아이슬란드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법 개정 이후, 성별 임금 격차는 90.9%까지 좁혀졌다.
총리실 산하 성별임금격차 TF, ‘여성들 많은 일자리, 저평가 문제 해결해야’
이에 그치지 않고, 아이슬란드가 주목하고 있는 다음 문제는 ‘성별 직종 분리’(occupational segregation)다.
교육과 돌봄, 보건, 서비스업계 등 여성들이 특히 많이 종사하는 직업의 가치가 저평가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21년 9월, 총리실 산하의 성별 임금 격차 TF는 ‘여성 일자리의 가치 재평가’(Verðmætamat kvennastarfa)라는 권고안을 내놓았다. 권고안은 여성의 직업이 과소평가 되는 이유가 역사적, 문화적, 제도적 요인에서 기인하며, 무의식적인 성별 편견과 같은 ‘비과학적’ 요소가 직무 평가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때문에 동일노동 뿐 아니라, ‘동등가치 접근’을 통해 직무 평가 시스템에 정서적 스트레스, 공감, 사람들의 행복에 대한 책임, 의사소통 기술, 동시에 많은 일을 수행하는데 따른 스트레스, 취약한 상황에 있거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섬기는 기술, 사람을 들어 올리는 것과 같은 육체적으로 힘든 작업, 반복적인 움직임으로 인한 신체적 스트레스, 부식성 물질이나 세척제에 노출될 위험 등 직업의 다양한 요소를 포괄적으로 반영하여, 성별 임금 격차를 줄일 수 있도록 개선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아래 그림은 ‘여성 일자리의 가치 재평가’ 권고안에 이해를 돕기 위해 그려져 있던 삽화다. 같은 일(사과와 사과)에 대해 동일한 평가를 나타내는 동일임금 접근뿐 아니라, 서로 다른 일(사과와 오렌지)을 동일한 가치로 평가하는 ‘동등가치 접근’을 표현하고 있다. 가령, 소음 공해 평가는 도로 건설 못지않게 교실과도 관련성이 높고,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일은 다양한 산업 분야의 업무 못지않게 신체적 스트레스를 수반하며, 어린이를 돌보는 일에는 기계를 운전하는 것만큼 감독이 필요하다는 점 등이 ‘동등가치 접근’이 필요한 이유다.
아이슬란드의 법과 제도는 사람들의 고정관념과 편견이 차별을 지속하거나 심화시키지 않도록 바뀌어왔다. 그리고 변화를 위한 계획에는 항상 그 문제를 직접 경험하는 당사자들의 목소리와, 수많은 이해관계자 간 소통과 협의 과정이 전제되었다.
우리는 일상에서 주변의 문제를 인식하고 주도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과정에 얼마나 참여하고 있는가? 잘 모르거나 이해되지 않는 것을 넘어 대화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질문하고, 알아가려고 노력해 왔는가?
서두에 언급한 고등학교에서는 매년 학생들이 직접 자신에 관한 안건들을 상정하고 토론해 결론을 도출하는 정기총회를 연다. 올해 안건 중 하나는 ‘단체 체육복을 도입할 것인가’였고, 학생들은 진지하게 논의를 거듭한 끝에 도입하지 않기로 결정 내렸다. 누군가 정해주고 그대로 따르는 건 빠르다. 쉽고, 익숙하다. 그러나 하루종일 모든 수업을 10분씩 단축해 가며 시간 내서 총회를 하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품이 들더라도 의사결정에 모두가 참여해 자신의 의견을 내고 생각을 나눌 때, 결과를 받아들이고 함께 책임질 수 있다. 시민으로서 사고하고 행동하며 함께 살아가기 위한 역량을 쌓아갈 기회가 우리에게도 절실하게 필요하다.
[필자 소개] 정이예슬. ‘함께 배우는 사람’. 나에게도, 지구에게도 다정한 삶의 방식을 배우고 지속해갈 수 있도록 돕고자 클라이밋(Climeet)을 창업했다. 청소년과 청년들이 지역사회 문제를 발굴하고 해결하는 사회적경제·기후환경·ESG 교육 콘텐츠를 개발하고 교육 워크숍을 진행한다. 2023년에는 울산 남구 장생포에서 지역문화기획단을 조직하고, 마을축제 ‘2023 다이버-시티(Diver-city) 장생포’를 열었다. 기후위기, 젠더, 불평등 문제에 관심을 갖고 연구와 활동을 해오고 있으며, 최근에는 탈성장과 다양성, 시민정치로 관심사를 넓혀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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