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나는 자유〉는 2001년에 국내 개봉한 영화로, 1970년대 미국의 민권운동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17세의 수잔나 케이슨(위노나 라이더)이 자살미수로 인해 인격경계 장애 판정을 받고 정신요양원에 입원하게 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낮 동안 조용했던 병실은 밤이 되자 시끄러워진다. 입원환자들은 모두 여성이다. 그들은 주치의 차트를 훔쳐보며 깔깔거리고 자신들을 규정하는 언어를 조롱한다. 밤의 공간 안을 배회하며 그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한다. 독특한 카리스마로 환자들을 이끄는 리사(안젤리나 졸리)는 모든 권위를 부정하며 이들에게 해방감을 선사한다.
처음 리사들과의 어울림에 소극적이었던 수잔나는, 어느덧 리사를 전적으로 따르며 의사의 진단을 비웃고, 밤마다 열리는 당사자들의 회합 속에서 점차 이들의 공동체에 융화되어 간다.
1년 정도 시간을 보내며 그들만의 공동체를 이루던 시간은 또다른 자유를 찾아 나선 길에서 실종되고 만다. 정신요양원을 탈출한 리사와 수잔나가 퇴원한 데이지(브리트니 머피)를 찾아가면서 비극은 시작된다. 친아버지가 데이지를 성적으로 착취한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밝히며, 리사가 데이지의 집에 머물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데이지는 자신에 대한 비밀 폭로로 인해 깊은 상처를 받고 목을 매어 자살한다.
리사는 데이지의 옷에서 돈을 꺼내어 수잔나의 주머니에 꽂고, 자신은 그 집을 떠난다. 수잔나는 응급입원요원들에게 데이지의 죽음을 알리고, 다시 정신요양원으로 돌아와 깊은 상심에 빠진다. 그러면서 조금씩 자신이 속해 있던 공동체에 대한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 수잔나가 돌아온 뒤 얼마 되지 않아 리사가 경찰차에 실려 호송되어 오고 수잔나는 리사에게 말한다. “너는 너무 차가워.”
퇴원하면서 마지막에 수잔나는 온몸이 강박 당한 채 침대에 묶여 있는 리사를 찾아간다. 수잔나의 등장에 리사는 눈물을 흘린다. 퀭한 리사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보며, 수잔나는 정신요양원을 벗어난다.
수잔나의 시간은 과연 허비한 것인가?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는 주인공 수잔나가 새롭게 얻은 자유의 가치가 유독 인상에 남았었다. 혁명을 염두에 두지 않은 사랑은 개인의 만족에 머물 뿐이고, 사랑을 염두에 두지 않은 혁명은 위험할 뿐이다. 리사에게는 권위에 대한 조롱과 비웃음을 전염시키는 강렬한 힘이 있었지만, 결국 그녀의 내면에는 사랑이 없었다. 당시에 나는, 리사가 자신이 만나는 당사자들에 대한 깊은 존중과 이해 없이 그들을 선동하기만 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정신요양원을 떠나며 수잔나는 “난 일 년을 허비했어.”라고 자조한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 그럴까 하는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흔히들 ‘유토피아’라는 말은 익숙하지만 ‘헤테로토피아’라는 말은 생소할 것이다. 유토피아란 ‘어느 곳에도 없는 이상적인 장소’이지만, 헤테로토피아는 ‘현실 속에 있는 반(反)공간, 현실 전복의 공간’을 뜻한다. 처음 수잔나는 정신의학의 권위에 도전하는 리사들에게서 새로운 가능성을 본다. 치료에 순응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며, 오히려 자신들이 자신들의 진실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배우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처벌의 위험이 있음에도 밤의 회합으로 모여들고 거기서 일종의 ‘파레시아’(parrhesia) 즉 진실 말하기를 행한다.
영화는 이 ‘미친’ ‘소녀들’의 공동체에서 어떤 자유가 구체적으로 생성되는지 따라가지 않는다. 그 대신 몇십 초 정도로 이들이 웃고 있는 모습과 발언하는 모습을 담아낼 뿐이다. 광인들의 목소리는 지워지고, 그 빈 공간을 이유를 알 수 없는 웃음을 짓는 것으로 채울 뿐이다. 아마도 이 공간에서의 해방감을 그리려 했겠지만 그러자면 더 섬세한 접근이 필요했다. 무엇이 어떻게 소통되며 한 장소를 이루는지, 영화는 짚어내지 못했다.
이들이 발화하는 ‘파레시아’(모든 것을 말하기라는 뜻)는 의사 앞에서 하는 고백보다 훨씬 나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불평등한 관계 속에서 강제된 고백을 통해 ‘모욕과 굴종, 자기 분리, 그리고 자기 형태의 파괴로 나아가는 자기에 대한 관계의 구성’ 대신, 소녀들의 파레시아는 개인이 자유의 게임 안에서 말하기, 책 읽기, 글쓰기 등을 통해 ‘자기의 자율적 구성’을 하기 위해 결집한 것이었다. 그것은 약자가 강자에게 도전하는 고백이다.
그러면서 이 미친 소녀들은 스스로 자신들을 돌보기 시작한다. 서로를 돌보기 시작한다. 그 공간의 코드가 웃음으로 상징되었던 것은 그곳에 어떤 해방이 존재했다는 의미이다. 그녀들의 헤테로토피아적 공간에서, 기존의 억압적이고 규율화 된 정신의학 시스템에 있던 이들이 자신의 자유를 찾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 부분을 지워두고 있다.
리사가 정신요양원 안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만큼 밖의 세계가 그녀가 적응하기에 어렵고 힘든 공간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소녀들의 공동체를 이끌고 그 안에 소통의 계기들을 심어가는 리사임에도, 바깥 세상에서는 그저 환자일 뿐이다. ‘정상성’에 맞추어 규율되어야 하며, 그렇게 되지 않으면 영원한 쓰레기로 살아야 하는 현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차디찬 세상의 관점을 미러링한 것이 어쩌면 리사가 보지 못하고 지나간 암점일 것이다.
소녀들이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가장 필요했던 것은 서로를 보살피고 이해하고 포용하는 돌봄이었을 것이다. 상처 입고 세상으로 나갈 용기를 잃은 한 명 한 명의 삶의 비극을 소중한 것으로 대하는 존중과 배려일 것이다.
수잔나는 정상적인 세계 안으로 편입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앞서 말한 것처럼 자신은 일 년을 허비했다고 자조한다.
자유는 어떻게 오는가?
〈처음 만나는 자유〉를 통해, ‘말할 권리를 박탈당한 이’들이 진실을 발화하는 ‘파레시아’의 시간에 여성의 약자성이 자매애라는 공통 감성을 형성하는 모습을 우리는 보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여전히 말할 권력의 위계에 따라 정신의학의 목소리는 지극히 정상적인 것으로 그려진다. 따듯하며 사랑을 알고 세상을 살아가는 바람직한 모델로 규정된다. 영화는 두 모습을 다 그리지만, 결국 심사대에 선 광기는 체제 앞에서 무력했다. 다른 언어와 가치를 만들어내지 못했던 것이다. 혹은 그렇게 그려졌던 것이다.
정신건강의학과를 다니며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정신장애인은 만나면 문제만 일으키니 절대 만나지 말라’는 것이었다. 영화는 정신의학계의 이러한 편견을 그대로 옮겨 적는다. 최근 격리와 강박으로 사망한 정신장애인들의 기사가 매체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리사는 온몸을 강박당한 채 누워 있는 모습으로 남는다. 그녀의 반항에 대한 체제의 처벌인 셈이다.
그리하여 영화는 이 지점에서 우리와 만난다. 정신장애인들이 원치 않는 강박을 당하고 억지로 침대에 묶이는 것은 현 체제에 순응하지 못하는 수많은 몸들의 현실이다. 이제 권력은 ‘살게 하고 죽게 내버려 두는’ 권력으로 형태를 바꾸었다. 살게 하는 쪽에 서야만 우리는 사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생존과 경쟁과 소유의 논리가 가득한 신자유주의 왕국에서 버려지는 목숨들은 그러나 연대하지 않는다. 다른 세계에 대한 상상력을 잃고서 불행을 개인의 책임으로 남기며, 외로운 혼자가 되어 자기계발에 몰두한다.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도록 정향되어 있는 체제 속에서, 이와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공간인 ‘헤테로토피아’와 이질적인 말하기인 ‘파레시아’를 수행하는 일은 공동체를 복원하는 데 영감을 준다. 규율되고 통제되고 관리되는 사회 전반의 흐름 속에서 자유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영혼을 잃게 하는 물질만능의 구조와 논리 속에서도 자신이 자신임을 잊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를 구성하고 타인과 연대하는 일이 시급하다.
리사의 눈물이 그치는 날, 이제는 서로의 손을 잡을 수 있게 된 이들이 타자들의 공동체를 만들며 그 안에 세상에서와 같은 폭력성을 드리우지 않고 성찰적으로 자신들을 돌보아 나가는 모습을 그려본다. 민권운동의 시대에서도 소외되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 그곳이 진정 해방되기를 기대한다. 그 길에서 우리는 서로 마주치면서, 자유와 권리를 인식해 나갈 것이다. “너는 너무 차가워.”라던 수잔나의 파레시아로 리사가 비로소 눈물을 흘리듯이 말이다. 새 삶을 예감할 수 있는 시간을 위해 우리가 만나야 할 때이다.
[필자 소개] 박목우. 정신장애 동료상담가. 다른몸들 산하 질병서클 ‘질병과 함께 춤을’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시민 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에 출연했다. 공저로 『질병과 함께 춤을』, 『아픈 몸, 무대에 서다』, 『네가 좋은 집에 살면 좋겠어』, 『돌봄이 돌보는 세계』가 있다. eBook으로 정신장애인 사이의 연대와 소통의 경험을 소설로 풀어낸 『이토록 찬란한』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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