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의 걱정이자 악몽은 무엇일까? 아파트에 하자가 발견되는 것? 아니면 아파트 일부가 임대 아파트가 되는 것? ‘혐오시설’인 어린이집, 소방서, 지구대 등이 생기는 것? 놀이터에 아파트 주민이 아닌 아이들이 와서 노는 것? 아파트 내에서 살인 사건이 나거나 누군가 죽은 채 발견되는 것? 이런 반응이 예상되는 이유는 하나다. 아파트 값이 떨어지기 때문에.
우리 사회의 첨예한 문제인 부동산/아파트, 그리고 차별 받는 존재인 성소수자 이야기를 담은 영화 〈럭키, 아파트〉는 다큐멘터리 영화 〈이태원〉, 〈우리는 매일매일〉, 〈애프터 미투〉 등을 만든 강유가람 감독의 첫 장편 극영화다. 10월 30일 개봉을 앞두고 감독과 이야기를 나눴다.
-극영화 장편은 처음인데요. 어떻게 이 작품을 시작하게 되었나요?
제 단편 극영화 〈진주머리방〉(2015)을 인디스토리에서 배급했는데, 장편 극영화를 함께 만들어보지 않겠냐 하더라고요. 극영화를 하려면 새로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못하겠다고 했는데, 인디스토리에서 계속 ‘할 수 있다’고 하시더라고요.(웃음) 그러면 한번 해 볼까? 하고.
-〈럭키, 아파트〉에서 다루는 이야기들이 흥미롭고 시의적절하다 생각되는데요. 어떻게 구상하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친구가 겪은 어떤 경험 이야기에서 아이디어를 얻게 되었죠. 초반엔 드라마 형식으로 썼다가 이야기가 너무 무거운가? 싶어서 블랙코미디, 코지 미스터리(가벼운 범죄, 추리물)로 좀 바꿨었어요. 그렇게 1년을 썼는데, ‘내가 첫 장편 극영화를 만든다고 했을 때 정말 만들고 싶은 게 뭐였더라?’ 생각하니 처음에 썼던 드라마 형식이 맞는 것 같더라고요. 그 즈음, 사실 나랑 연결고리가 있거나 알았던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는 일들이 있었어요. 애도하고 싶더라고요. 한국 사회는 그런 걸 잘 못하잖아요? 누군가를 보내고, 그 사람을 기리고 기억하는 걸 말이에요. 영화에서라도 그런 걸 좀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내 인생의 2/3를 아파트에서 보낸 것 같아요. 저 또한 주거안정에 대한 욕망이 있고, 사회적으로 봤을 때 집을 사야 하는 나이대여서 집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해요. 또래들 중에도 집 산 친구들이 있고요. 아파트 자체에 관심이 있었는데, 퀴어 커플이 아파트에 살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어요. 예전에 ‘성소수자 주거권 네트워크’에서 조사한 결과를 보니 (참고: 성소수자가 집 소유 비율 낮고 ‘주거불안’ 더 겪는다, https://ildaro.com/9087) 성소수자는 아파트에 사는 비율이 낮더라고요. 경제적 이유가 크겠죠. 그런 지점을 표현해 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아파트라는 공간이 가진 상징성이 있잖아요? 안정감 있고 편안하긴 한데 폐쇄적이고… 집단적인 무언가에서 약간 돌출되는 존재가 나왔을 때, 그 공간이 변화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보니, 아무래도 빌라나 다른 주거보다 아파트가 (이야기를 풀어내기)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파트는 한국 사회에서 이상한 공간이 되어 가는 것 같아요. 아파트 1층에 사는 사람이 지하 편의시설에서 생기는 소음 때문에 문제 제기했는데, 다른 층 주민들은 당신만 조용히 있으면 된다는 식으로 반응했나 보더라고요. 아파트에 하자가 있다는 게 알려지면 아파트 값이 떨어지니까요.
제가 들은 이야기는, 어떤 아파트에선 밖에 이불 널지 말라고 했대요. 뭐랄까 고급 아파트 이미지를 갖고 싶은데 이불 널고 그런 건 서민 느낌 나니까, 그런 걸 규제한다고 해서 깜짝 놀랐어요. 얼마 전에도 아파트에서 생긴 사건에 대한 뉴스를 봤는데, 그 일 때문에 아파트가 언론에 노출되고 아파트의 명예가 훼손됐다는 이야기가 나오더라고요.
-극 중에서 희서는 왜 아파트에 살고자 했을까요? 무리해서 산 거잖아요.
오히려 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 빌라나 주택보다 눈에 띄지 않을 수 있다고요. 익명성을 원했을 거에요. 그리고 희서는 욕심이 있는 캐릭터이기 때문에 아파트를 사면 자산 형성에 도움이 되리라는 굳건한 믿음이 있었을 거라 생각해요. 선우는 탐탁지 않아 했죠. 사실 아파트 살 돈이 없는데 무리해서 사면 생활에 무리가 오잖아요? 근데 이 커플 사이에선 희서한테 돈이 있고 선우는 아니니까, 아무래도 이 이슈에 대해선 발언권이 적었을 거에요. 희서가 하겠다는데 말리기가 어려웠던 거죠.
영화 홍보 때문에 성소수자 인권단체들을 만나서 이야기도 듣고 했는데요. 실제로 주거, 집 때문에 문제가 생긴 동성 부부/커플의 상담이 꽤 들어온대요. 한국에선 동성 부부가 법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니까 여러 문제에 봉착하는 거죠. 예를 들어 같이 집을 샀는데 명의는 한 사람으로 되어 있다, 근데 그 명의를 가진 사람이 외도를 했다던가 혹은 헤어지려 한다던가 그런 경우 문제가 많더라고요. 영화에서 희서가 소위 ‘바깥 일’을 하는 만큼 선우가 가사노동을 더 많이 했을텐데, 그런 건 과연 둘의 관계에서 얼마나 인정되고 있을까 싶기도 하고요.
그리고 많은 퀴어가 사회적으로 ‘문란한 존재’라는 편견 때문에 ‘문란하지 않은 존재’임을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 것 같아요. 그래서 마땅히 권리를 주장해야 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괜히 움츠러들기도 하고요. 영화 속 선우의 행동을 보며 한번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요.
-희서와 선우는 여러 부분에서 다른 캐릭터에요. 사회적 위치도, 성격도. 희서는 회사뿐 아니라 가족에게도 커밍아웃하지 않은 ‘벽장퀴어’인 것에 반해, 선우는 가족들에게 알리죠. 그래서 엄마랑 절연 상태이긴 하지만, 조금 더 드러내고자 하는 것 같아요. 희서는 숨어있기를 원하고, 그러면서 혼자 온갖 짐을 짊어지고 힘들어하죠. 선우는 오지랖이 넓고요. 캐릭터 구상은 어떻게 하게 됐나요?
둘의 캐릭터가 좀 대비됐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현실적으로, 성소수자가 파트너와 주거를 마련할 때 원가족의 도움을 받는 일이 많지 않을 것 같았고, 그런 지점이 희서를 통해 드러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희서는 거짓말을 하고 엄마한테 지원을 받잖아요? 그렇게 ‘잠시 거짓말 하고, 눈 감고 모르는 척하면 나랑 선우가 같이 살 공간이 생기니까 좋은 거야’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희서라고 생각했어요. 희서가 여러 의미로 지금 가진 게 좀 더 많기도 하고요. 반면, 선우는 잃을 게 없어서 나를 드러내도 괜찮은 인물로 설정했고, 설사 가족한테 절연 당하더라도 ‘그냥 있는 그대로 나를 드러내고 싶다’고 욕망하는 캐릭터로 생각했어요.
-희서와 선우 말고 신임과 정남이라는 윗세대 성소수자도 등장합니다. 이들이 극 중에서 연결되는 것 또한 중요한 서사인데요.
시나리오 초고 단계에선 명확히 신임과 정남이 성소수자라고 이야기하진 않았어요. 늬앙스만 전달하려 했죠. 어떤 노인이 경제적인 이유로 집을 잃게 되고, 그에 선우가 공감하는 식으로 생각했거든요. 근데 선우가 그 이야기에 집착하려면 조금 더 강력한 연결고리가 필요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신임이 예전의 ‘바지씨’였으면 어땠을까? 생각하게 됐어요. 이렇게 수정하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60대 이상인 윗세대 성소수자의 이야기가 다뤄지는 일은 정말 드물잖아요. 다큐멘터리 영화 〈홈그라운드〉(권아람 감독, 2023)와 〈불온한 당신〉(이영 감독, 2017)에 나왔던 바지씨들의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캐릭터를 구상했던 것 같아요.
사실 은주도 학교에 ‘우정과 사랑 사이’ 같은 묘한 감정을 갖고 있는 동성 친구가 있어요. 엄마인 명희한테 그 친구 집에 가서 놀고 싶다고 대화하는 장면도 찍긴 했는데 편집에서 빼긴 했지만요. 러닝 타임이 길어지니까 뺀 부분인데 좀 아쉽긴 해요. 은주가 미래 세대의 퀴어일 수 있다는 늬앙스를 전하고 싶었거든요. “언니, 레즈에요?”는 혐오 표현이 아니라 친한 척하고 싶어서 말한 거잖아요. 은주 역 배우가 그 장면을 귀엽게 잘 만들어 준 것 같아요.
-기자간담회에서 명희의 전사를 듣고 조금 놀랐는데, 한편으론 ‘아, 그래서 저렇게 행동했구나’ 싶더라고요. 영화에서 명희가 빌런 아닌 빌런으로 나오는데, 알고 보니 젊은 시절엔 학생운동도 하고 그랬다는 거잖아요.
맞아요. 나름 진보적인 사람이었는데, 나이를 먹고 자신의 재산이나 삶 등을 지켜야 하는 과정 속에서 변한 거죠. 명희가 싱글맘이고, 부동산중개업자이고 또 아파트 동대표인데, 이 사람을 어떻게 표현할지 이주영 배우와 이야기를 정말 많이 나눴어요. 뻔한 인물로 보이고 싶진 않았거든요. 영화를 보면 명희가 희서와 선우한테 무턱대고 처음부터 반감을 보이진 않아요. 대놓고 혐오표현을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너네가 뭐든 상관 없는데, 그냥 조용히 살아.’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에요. 사실 ‘진보’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도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꽤 있는 것 같아요. 혐오하진 않는다고 하지만 어떤 순간이 오면 ‘조용히 살라’고 말하는 사람들. 그런 명희가 나중에 딸 은주한테서 “엄마, 쪽팔리니까 그만해”라는 말을 듣고 당황하잖아요. 그 당황스러움이 드러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아마 희서? 근데 또 전 희서처럼 똑부러진 사람은 아니지만, 어떤 일에 대한 입장은 희서랑 비슷할 것 같아요.
-그럼 나는 못할 것 같은 일을 하도록 만든 캐릭터는 누군가요?
선우죠. 내가 못하고 있는 부분을 선우가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겁이 없는 사람이잖아요? 좀 무모하기도 하고. 어쩌면 선우는 둘의 관계 속에서 자기가 하는 일이 너무 없다고 느껴서, 냄새와 관련된 문제라도 해결해서 인정 받고 싶었던 건지도 몰라요. 그런 점에서 선우도 변화하는 캐릭터죠. 처음부터 정의를 생각해서 움직였다기보다 나도 좀 인정 받고 싶어서 뭔가 해 보려고 했다가 변화를 만나게 되는 거죠.
-영화의 중심엔 애도와 추모가 있는 것 같아요. 한국 사회에 지난 몇 간 정말 많은 성소수자의 죽음이 있었는데, 항상 빨리 잊으려고 하잖아요. 이 영화는 그런 죽음을 기리기 위해 천천히 어떤 이들의 삶을 보여준다고 생각했어요. 희서와 선우, 두 사람은 이 일이 끝나고 무엇을 느꼈을까요?
희서는 우리가 성소수자, 동성 커플이라도 둘만의 안정된 공간이 있고 경제적인 조건만 조금 더 충족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현실의 많은 퀴어 커플들이 그렇듯이 연결망이나 지지자가 없으면 너무 쉽게 고립되죠. 그게 그들의 관계를 위태롭게 하고요. 희서도 그런 부분을 깨닫지 않았을까요? 선우도 일종의 자격지심이 있었고, 희서한테 신세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 마음을 좀 내려놨을 것 같아요. 자존심 상하는 일에 대해서도 조금 더 솔직하게 희서한테 이야기하게 됐을 거예요.
-감독님에겐 이 영화가 어떤 의미였는지 궁금해요.
시나리오 쓸 때 저한테도 여러 이별들이 있었고 그에 대한 애도와 추모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그걸 해 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스스로에게도 고생했다고 말해주고. 이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이 이런 삶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런 공간이 더 생겼으면 좋겠고요. 사실 극장 개봉은 처음이 아닌데, 극영화는 또 정말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마음이 들어간 거라, 관객들이 잘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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