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의 가정폭력은 심각한 수준이다. 다행히 여성단체들의 활발한 문제제기로 인해 이제는 부부간에 행해지는 폭력도 ‘범죄’라는 인식이 점차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성역은 여전히 존재한다. 부모 자식 간 ‘폭력’은 천륜이라는 이름으로 감당해야 하는 짐인 것이다.
지난 4월 5일, 아버지의 폭력을 못 견뎌 경찰에 신고한 홍모씨(27). 그는 사건 처리 과정에서 아버지에게 겪은 폭력보다 견디기 힘든 충격과 모욕을 감당해야 했다. 천하의 ‘패륜아’ 취급을 당한 것이다. 어이구, 우리나라 참 잘도 되겠다 사건을 맡은 최모 형사는 조사 과정에서 홍씨에게 “나도 자다가 아버지에게 발길질을 당한 적이 있지만 미워하지 않는다. 가족이기 때문에 참아야 한다. 지나가는 사람이 때리면 구속이지만 부모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훈계했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홍씨를 죄인 취급하던 최형사는 조사 도중 “그래서 아빠를 신고 했잖아!”라며 반말을 했다. 이에 대해 홍씨가 항의하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물을 들이키며 “어이구, 우리나라 참 잘도 되겠다!”라고 소리쳤다. 홍씨는 “반말 때문에 일어난 마찰이었지만 내가 아버지를 신고한 것에 대한 비난을 담은 이중적 의미였다고 생각한다”면서 “정작 피해자를 앞에 두고 ‘이 나라의 윤리와 기강이 무너진다’는 식으로 훈계하는 형사의 태도에 기가 막혔다”고 말한다. 부모에 대한 무조건적인 순종을 강요하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아버지를 신고하고 공권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홍씨가 이번 사건을 접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아버지를 신고한 ‘패륜아’ 취급을 받은 것이다. 경찰의 태도뿐이 아니다. 게시판을 통해 <가정폭력범 신고하고 패륜아 취급 당한 날>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리자 몇몇 네티즌은 “정말 패륜아 맞네” 식의 글을 올린 것. 홍씨는 “통념으로 인해 왜곡된 사회 전반의 정서를 알게 됐다”고 말한다. 죽을 만큼 맞았나? 최모 형사가 이번 사건으로 징계를 받고 사회적으로 문제가 공론화되면서 홍씨는 모 방송국 아침 프로 출연 제의에 응했다. 그는 이번 사건이 얼마나 큰 사회적 문제인지에 대해 말하고자 했지만 담당 PD가 주요하게 물은 것은 “어떻게, 얼마나 맞았냐”는 것. 홍씨는 “얼만큼 맞았는지가 중요한 것인가”라고 반문했지만 담당 PD는 “시청자들은 폭력의 정도가 약하면 ‘저 정도 가지고 뭘’ 한다. 그렇게 되면 프로그램도 우스워지고 나도 우스워진다”며 설득했다.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안 센 거에요. 부모를 신고할 정도의 폭력이 아니라는 거죠.” 홍씨는 “사회 전반에 깔린 가정폭력에 대한 무지를 실감했다”면서 “어느 정도의 폭력은 신고할 만하고. 어느 것은 하지 않을 만한 것인가”라고 강하게 반문한다. 부모를 신고하는 것에 대한 사회 전반의 결벽증은 문제 해결의 걸림돌이 된다. 사건이 공론화되면서 “나도 아버지에게 당했다”며 같은 경험을 한 많은 여성들이 홍씨에게 조언을 구해 왔지만 그는 섣불리 경찰에 신고하라고 제안하지 못한다. 그만큼 사회의 견고한 벽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5차례나 불려 다니면서 고생하고 아버지는 안가도 그만인 거에요. 처음에 가정법원에서는 기각되고. 경찰은 기껏 아버지 모셔다 놓고 “나도 딸 키우는데” 하면서 한탄이나 하고 나는 몇 차례 훈계조의 조사에 응해야 하고. 솔직히 다른 사람한테는 그렇게 하라고 섣불리 못하겠어요.” 홍씨는 사건 이후 아버지에게 “세상 태어나 처음으로” 사과를 받아냈다. 다시 폭력 사건 재발 시 합의 이혼하고 재산권 포기하겠다는 각서도 받아냈다. “아버지가 처음에는 나만 나쁜 애라서 문제가 이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머니까지 이혼하겠다면서 강하게 나오니까 한풀 꺾이신 것 같아요. 사건이 공개돼 아버지도 충격을 많이 받으셨죠. 하지만 이번 사건이 아버지가 문제의식을 느끼고 해결할 수 있는 돌파구가 되었으면 하고 기대하고 있어요.” 홍씨는 “많은 가정 폭력범들이 ‘자신의 폭력이 지지 받지 못한다’는 현실 인식을 해야 문제해결이 가능하다는데, '그 정도 가지고’ 혹은 ‘부모는 신고하면 안 된다’ 식의 반응이 대세인 이 사회에서 잘못을 고치기 쉽겠냐”며 답답증을 호소한다. 이번 사건을 지켜보면서 많은 공감을 했다는 신씨(28)는 "사실 많은 사람들이 부모의 폭력을 겪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효’를 위해서는 자식을 죽여도 된다고 배우는 한국에서는 엄청난 폭력들이 은폐될 수밖에 없다.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부모의 폭력을 참는 것이 효라면 그것 역시 범죄다”며 울분을 표출했다.
이 기사 좋아요
<저작권자 ⓒ 일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