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청전은 맹목적인 효도
'효’에 대한 어떤 전래동화가 가장 기억에 남느냐고 묻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심청전을 꼽을 것이다. 심청전은 ‘효’를 교육시키는 대표적인 이야기이다. 아버지 심봉사는 동냥젖을 얻어 딸 심청을 곱게 키운다. 귀가 얇은 심봉사는 공양미 삼백 석을 시주하면 눈이 뜰 수 있다는 화주승의 말에 솔깃하여 시주를 약속하나 궁핍한 집안에 쌀 삼백 석이 있을 리 없다. 이를 알게 된 딸 심청은 쌀을 마련하여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아버지 몰래 산 사람을 바다에 제사 지내는 남경 상인들에게 몸을 판다. 심청이 배에 오르는 날, 심봉사는 비로소 이 사실을 알고 대성통곡하지만 이미 배는 떠났다. 심청은 인당수에 몸을 던지고, 심봉사는 실의에 잠긴다. 그러나 심청의 이와 같은 맹목적인 희생은 심봉사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심청의 정성스런 보살핌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던 심봉사는 심청이 사라지자 실의에 빠진 채 끌려 다녔다. 만일 심청이 다시 살아나 왕후가 되지 못했다면 심청의 희생은 결코 효도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서울 서대문구에 사는 김모씨(학생, 22세)는 심청전에 대해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심청의 행위가 과연 효도하는 것인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그래서 문학비평가들은 심청전을 현대적 시각에서 재해석한다. 물에 빠진 심청이 다시 살아나 왕후가 된다는 것과 여성들이 심청전의 주 애독자였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심청전이 여성들의 신분상승욕구를 반영하고 있다고 바라보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심청의 희생은 효 윤리의 절대성을 지키려는 것이 아니라, 효행에 대한 인과응보를 바라는 당대 민중들의 보편적인 욕구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래동화 심청전을 본 일반 독자들에게 전달되는 심청전의 교훈은 부모를 위해서는 목숨까지 버릴 만큼 효도해야 한다는 것뿐이다. 자식의 희생에 대한 나라의 보상이 효 교육? 공자는 “효자가 그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서 거처함에는 그 공경을 다하고, 봉양함에는 그 즐거움을 다하고, 병중에는 그 근심을 다하고, 제사 중에는 그 엄숙함을 다해야 한다”(명심보감)고 말했다. 이를 문자 그대로 실천하는 효행 이야기가 어린이용 교훈서적에 다수 등장한다. 손순 이야기는 어머니를 위해 아이를 묻으려는 자식의 효행 이야기다. 집안이 가난한 손순은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며 그 어머니를 봉양한다. 그런데 그 아이가 언제나 어머니가 잡수시는 것을 뺏어먹자, 손순은 ‘아이는 또 얻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구할 수 없소’라고 아내를 설득하여 아이를 산에 묻기로 한다. 아이를 묻기 위해 산에 올라가 땅을 파는데, 땅에서 기이한 석종이 나온다. 손순의 아내가 ‘이렇게 신기한 물건을 얻는 것은 아이의 복이니 아이를 묻어서는 안된다’고 말하자 손순은 이에 승복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산에서 얻은 종소리에 감복한 임금이 손순의 사정을 듣고서, 손순에게 집! 한 채와 매년 쌀 오십 석을 준다. 상덕 이야기에는 부모를 위해 몸을 자해하는 자식이 등장한다. 상덕은 흉년이 들고 염병이 창궐하는 해가 되어 부모가 거의 죽게 되자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먹게 하고, 어머니가 종기가 났을 때는 입으로 빨아서 낫게 하였다. 상덕의 소문을 임금은 상덕이 그 고통으로 죽기 전에 때를 놓칠세라 상덕에게 재물을 내리고 그의 집에 비석을 세워주었다. 만일 임금이 보상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런 효행담에서 나라의 보상이 빠진다면, 흥미를 끌기 어려울 것이다. 99년 간경화 아버지에게 자신의 간 일부를 떼어주고 대학을 포기한 채 등록금 일부를 병원비로 사용하여 고려대 효행특별전형으로 입학한 오강민씨의 이야기는 인구에 회자된 바 있다. 이는 부모-자식 사이가 각박한 ‘괜찮은 효자’가 나왔다는 것을 강조한 매체의 보도 탓도 크지만, 그가 효행의 대가로 대학에 특별전형으로 합격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부모에 대한 자식의 효도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이자, 일상적인 행위이다. 여기에 언제나 나라의 보상이 주어질 리는 없다. 그렇다면 극단적인 희생과 그에 대한 일회적인 보상을 강조한 효행담이 얼마나 교육적인 효과를 가질 수 있을까? 사람들의 머리 속에 남은 맹목적인 효는, 현실에서 별다른 교육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눈이 먼 아버지를 위해서 눈이 꼭 뜬다는 보장도 없는데 선뜻 목숨을 내던지라는 것은, 자식의 선택이지 ‘윤리’로서 강요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 효행담은 효를 강조하느라 다른 중요한 가치들을 간과하고 있다. 민담이나 설화에 기반한 이야기이므로 과장된 것을 고려하더라도, 아버지의 눈을 뜨기 위해 나이 어린 심청이 목숨을 내던지거나 어머니를 위해 손순이 아이를 묻는 것은 일종의 아동학대 아닌가. 현실 속 부모자식 관계를 교육해야 윤리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효 윤리 역시 마찬가지로 그 추상성 때문에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물론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윤리 교과서의 획일적인 내용과 기준이 실소할 만큼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교육은 부지불식간에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을 미치므로 웃음으로 넘길 수만은 없다. 윤리 교과서의 효는 부모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가르친다. 교과서에 따르면 효의 시작은 부모에게 받은 신체를 온전하게 잘 유지하는 것이며, 봉양(물질적 보답) 불욕(부모를 욕되게 하지 않는 것) 공대(표정을 항상 부드럽게 하는 것), 양지(부모의 뜻을 잘 헤아려 살핀다) 혼정신성(아침, 저녁 안후를 살피는 것) 입신양명(큰 일을 많이 하여 이름을 크게 떨침으로써 부모를 즐겁게 해 드리는 일) 등이 포함된다. 실제로 함께 사는 사람에게 이렇게 행하기란 결벽증적 관계가 아니고서야 하기 힘든 노릇이다. 더 나아가 교과서에서는 효를 현대산업 사회의 병폐인 인간성 상실, 물질 만능주의, 이기주의를 막아 낼 수 있는 정신적 원동력이자 가정을 안정시키는 동양의 대표적인 윤리로 설명하고 있다. 이쯤 되면 부담스럽기까지 하다. 현실 속 부모와 자식은, 부모가 아무 욕심 없이 자식을 존중하고 자식이 부모의 말을 순순히 따르는 점잖은 관계가 아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비현실적인 이상향으로 설정하는 효 보다는, 나이/세대 차 권력 차 성별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갈등을 빚기 쉬운 관계임을 교육하는 것이 부모-자식 관계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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