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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망설임 끝에 〈힌드의 목소리〉(카우테르 벤 하니아 감독, 2025)를 보았다. 영화를 보기까지 왜 그렇게 오래 걸렸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쏟아지는 총탄 앞에서 “데리러 와 주세요, 제발요! 나 혼자에요”, 5시간 넘게 호소하던 여섯 살 소녀의 목소리와 끝내 도달하지 않는 구원의 손길.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음을 목격하기 위해서는 얼마큼의 용기와 힘이 필요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 구원에 필요했던 시간은 단 8분이었다. 8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그곳에 구조대는 그러나 영원히 도착하지 못했다.
“우리는 이제 재현의 윤리를 깨야 하지 않을까요?” 오랫동안 팔레스타인과 평화연대를 이어온 활동가가 어느 날 집회에서 비탄에 무너지며 말했다.
가자지구의 알 아크사 병원 응급실에 한 소녀가 실려왔다. 소녀의 온몸은 불에 그을렸고, 살갗 밖으로 튀어나온 심장은 희미하게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소녀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의사 알리 가잔은 참담한 심정으로 내부인들만 볼 수 있는 사이트에 소녀의 영상을 올렸다.
“전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이 영상을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요? 상상하기조차 두렵고 끔찍한 집단학살이 날마다 벌어지고 있는데, 이걸 알면서도 방임하는 나라들과 사람들이 이 영상을 보면 달라지지 않을까요?” 그는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정말 그럴까. 더 참혹한 영상을 보여주면, 알면서도 움직이지 않는 이들의 심장이 다르게 뛰기 시작할까. 끊긴 숨의 진실이, 그 사람의 사랑과 고통의 이야기가 전해질까. 뭐라도 해야겠다고 신발 끈을 다시 묶을 수 있을까.
그러나 모함메드 엘쿠르드가 한탄하듯, 그곳에서 일어나는 너무나 많은 죽음은, 그저 매일매일 보도되는 일기예보에 아무렇지도 않게 끼어든 숫자에 불과하다면? “하늘에 구름이 끼고 가벼운 소나기가 내리는 한편, 지난 열흘 동안 팔레스타인인 3000명이 사망했습니다.”(모함메드 엘쿠르드, 『완벽한 피해자』, 19)
우리는 너무 많은 죽음을 ‘안다’. 저곳 팔레스타인에서, 우크라이나에서, 이란에서, 그리고 이곳 바다에서, 불타는 공장에서, 골목에서···. 저곳과 이곳의 죽음 장소는 계속 늘어난다. 죽음은 점점 많아지고, 그리고! 우리의 감각은 점점 줄어든다. 역설이다. 이 역설이 너무 괴롭다. 도대체 이 역설에 맞서는 길을 어디에서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죽음은 어떻게 공동의 경험이 되는가?
죽음은 나 자신의 경험이 될 수 없다. 나는 내 죽음을 살 수 없다. ‘나는 죽는다’라는 일인칭 현재형 문장은 단어와 단어가 연결되어 만드는 문법적 뜻은 있지만, 실존적 의미는 지니지 못한다. 죽음은 언제나 타인의 죽음으로만 다가오고, 이 타인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무감하거나 무력하다. 잔혹한 폭력에 의한 죽음이 아니더라도, 어떤 마땅한 죽음에서조차도 죽음의 목격자가 되는 건 ‘다른 자기’가 될 수밖에 없음을 감당하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보지 않는다. 보지 않으면서 본 척한다. 이미 무의식의 차원에서 본 척하며 타인의 죽음이 내 곁을 그냥 스쳐 지나가게 한다. ‘나’의 울타리 너머에는 그을리고 찢긴 피부 아래서 마지막 파동을 가까스로 견디는 심장이 있고, ‘나’는 뼛속 깊이 제 살을 파먹는 수치심을 무기력하게 방치한다. 그러나 이게 다일까. 몇 번이고 되새김질한 이 질문 앞에서 나는 김혜순의 문장을 다시 읽는다.
“저는 죽음 사건으로 비탄에 빠진 사람들의 연대와 죽음의 선험적 직관 사이에서 헤매고 있었습니다. 이 시들을 쓰면서 저는 죽은 후의 ‘나’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라는 시적 경험을 하게 되었지요. 그러자 복수의 화자가 말하는 시끄러운 시들이 폭주했습니다. 그 복수의 존재가 저에게 말을 걸었어요.” (김혜순/황인찬, 『김혜순의 말』, ebook, 10)
내게 그가 쓴 시들은 살아있는 우리가 어떤 비탄의 몸이 될 수 있는지 묻고 연행하는 시도들이다. 죽음들이 서로 만나기 시작하는 몸, 하나의 죽음이 다른 죽음을 부르는 몸. 바리데기(한국 무속 신화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무조신 이야기로, 바리데기는 부모에게 버림받았음에도 결국 부모를 구하고 죽은 이들의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길잡이가 된다)는 죽음들이 자기 안을 지나가도록 몸을 여는 애도의 상태를 가리킨다. 그렇게 죽음은 하나의 이름이 아니라 서로를 부르는 복수의 이름들, ‘너(희)’가 된다.
바리데기가 전승하는 이 여성적 애도의 연행은, 소중한 너/타자의 죽음 속에서 직관적으로 어렴풋이나마 ‘나’의 죽음을 엿볼 수 있다는 장 켈레비치의 철학적 통찰을 넘어선다. 죽음을 ‘경험’하는 게 이곳 삶에 중요하다면, 그 삶은 ‘나’의 영토를 가리키는 게 아닐 것이다. 오히려 탈영토화를 감내하는 어떤 사랑의, 비탄의 공동체를 가리키는 것이리라.
죽음과 작별하지 않는 방식
우리는 아직 들을 수 있을까, 우리가 아는 그 많은 죽음이 우리를 ‘부르는’ 그 목소리를? 우리는 아직 이 죽음‘들’에 닿고자 소망할 수 있을까? 지금 팔레스타인에서 죽음을 살아내고 있는 이들을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얽히고설켜 함께 뒹굴 수 있을까, 해변에 앉아 함께 화장하며 희희낙락 웃을 수 있을까. 그러길 원하는가.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으리라.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고 비탄하고 죽을 수 있는 건, ‘나’ 개인의 불/가능성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복수적이고 집단적인 무엇이기 때문이라고. ‘작별하지 않는다’는 말은 ‘나’ 개인의 결단이 아니라, 이 집합적이고 복수적인 존재가 행하는 사랑과 비탄을 가리킨다고.
여기에서 경하가 죽었는지 살아있는지, 일인칭인지 이인칭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성적 왜’가 아니라 ‘서사적 어떻게’를 붙들고 작별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유령과, 아직 채 죽지 않은 죽음과, 아니 죽었으나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몸들과 함께 하룻밤이라도 같이 기거할 수 있겠는가? 이 ‘어떻게’는 ‘함께’를 향한 몸의 상태, 삶의 지향성, 감각의 재조율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한강이 들려주는 이 ‘어떻게’에, 이 ‘작별하지 않는 방식’에 우리는 감염되어 우리의 ‘어떻게’를 더듬어나간다.
불면의 어두운 우물 속에 갇혀 두려움에 몸을 떨면서도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게, ‘어서 빨리 이 우물에서 빠져나가고 싶다, 통증에서 해방되고 싶다’가 아니라, 이 통증과 아픔과 비탄으로 연대하는 방식은 무엇일까를 바로 그 통증 한가운데서 질문하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상처입는 걸 두려워하지 말고, ‘함께’ 슬퍼하는 몸의 힘을 믿으며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우리’의 자리에서, 누군가의 구원에 내 삶과 죽음의 몫이 있다는 걸 계속 감각하고 깨달으며.
그렇게 죽음이 다른 죽음을 부를 수 있도록 자기 안에 길을 내는 일, 저 부름이 내 몸에서 끝나지 않게 하는 일. 어느 죽음도 다른 죽음을 대신하지 않고, 어느 죽음도 홀로 남겨지지 않는 세상. 사랑으로 비탄하고, 비탄으로 연대하고, 연대로 죽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세상을 나는 ‘죽음의 실감’이라고 부르고 싶다.
[필자 소개] 김영옥 : 페미니스트 여성으로 늙어가고 있다. 교차성의 관점에서 노년기 말년성에 대해 질문하고 감각하고 쓰고 지우고 또 다시 쓰고 있다. ‘죽음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사유는 무엇을 하는가’에 관심이 있다. 이번 연재에서 죽음에 대한 사유는 명사적 죽음의 보편성과 동사적 죽음 경험의 특이성을 교차적으로 탐색하면서, 삶의 여러 국면을 고유한 문장으로 새롭게 낯설게 만나게 하리라 기대한다. 『늙어감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 『흰머리 휘날리며, 예순 이후 페미니즘』 단독 저서와 『돌봄의 얼굴』, 『돌봄의 상상력』, 『돌봄과 인권』,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등 다수의 공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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