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이름을 불러달라

‘홈리스 여성들’의 세계

김홍수영 | 기사입력 2004/06/20 [23:19]

우리의 이름을 불러달라

‘홈리스 여성들’의 세계

김홍수영 | 입력 : 2004/06/20 [23:19]
이름은 존재를 알리는 첫 방편이다. 따라서 어떤 존재에게 이름이 있는가 없는가, 그리고 어떠한 방식으로 이름이 붙여지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IMF 경제위기 이전에 거리의 사람들에게 붙여진 공식 이름은 ‘부랑인’이나 ‘행려병자’였다. 부랑인들은 “시민생활의 명랑화와 범법자 등 불순분자의 활동을 봉쇄(내무부 훈령 410호)”하기 위한 일환으로 갱생원에 강제로 수용됐다. 1987년 보건복지부로 관할기관이 바뀌면서 처우가 개선되기는 했지만, 수용 위주의 정책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IMF 이후, 거리에 수천 명의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정부와 사회복지단체들은 이들을 ‘실직노숙자’라는 이름으로 불렀고, 기존 부랑인 정책과는 구별된 정책들을 펼치기 시작했다. 최근 ‘놈 자(者)’가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인식 때문에 ‘노숙인’이라고 이름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실업’은 노숙인을 바라보는 중요한 코드다.

‘실직노숙인’ 범주 벗어나 있는 ‘홈리스 여성’

하지만 ‘실직노숙인’이라는 이름으로 도저히 이들의 상태를 표현할 수 없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안정적인 주거지 없이 이곳 저곳을 떠도는 ‘홈리스 여성’들이 그러하다. 이들은 대부분 노동을 하고 있으며, 노상생활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는 이들의 실상에는 무관심한 채, 남성들의 실상만을 설명해주고 있는 ‘노숙’의 틀로만 이들을 보려 한다. 홈리스 여성을 취재하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는 모 방송국 기자는 “여성 노숙자들의 문제를 폭로하려는 좋은 취지로 현장에 나왔는데, 영상에 담을 만한 아이템이 없다”며 난색을 표한다. 엉뚱한 문을 열었으니 그것은 당연한 결과다.

한때 성매매(일명 꽃꼬지)를 하는 거리의 여성들이 사회이슈로 떠오른 적이 있다. 물론 거리에서 성매매를 하는 여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홈리스 여성 중 극히 일부가 노상생활을 하고 있고, 다시 이들 중 극소수만이 생계를 위한 성매매를 한다. 노숙인 쉼터 화엄동산에서 일하는 임동숙씨는, “성매매를 하는 1명의 여성이 다른 99명의 홈리스 여성들보다 더 심각한 위험에 처해있어서 관심을 받는 게 아니에요. 단지 ‘가출, 노숙, 성매매’에 이르는 과정이 자극적인 가십거리가 되기 때문이죠. 그런 관심은 당사자에게나 전체 홈리스 여성에게나 도움이 안 되요”라고 지적했다.

홈리스 여성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실업’과 ‘노숙’이라는 남성중심적 시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오히려 이들 여성이 겪는 고통은 대부분 가정폭력과 빈곤, 그리고 불안정한 노동 문제와 맞닿아 있다. 홈리스 여성을 만나기 위해서는 거리가 아니라 가정폭력 쉼터, 노숙인 여성 쉼터나 먹고 자는 식당, 숙식이 가능한 다방과 술집, 공장 기숙사, 그리고 이들이 파출부나 베이비시터로 고용돼 있는 가정집을 찾아가야 한다.

이혼 후 상경, 여관과 찜질방 전전

구민경(가명, 48)씨는 현재 노숙인 여성을 위한 W쉼터에서 생활하고 있다. 민경씨의 남편은 변변한 일자리 없이 허구한 날 그녀에게 폭력을 휘둘렀다고 한다. 시아버지가 고리대금업자라 가정형편은 넉넉했지만, 대신 매일 손님들로 복작거려서 하루 종일 뒷바라지를 해야 했다. 민경씨는 가사노동과 가정폭력을 참다못해 결혼 11년 째 되는 해에 이혼을 결심했다.

“그런데 제 발로 나가는 거니까 위자료는 한 푼도 줄 수 없대요. 그래서 제대로 보상도 못 받았어요. 남편이 부자면 뭐해요. 이혼을 하고 나니 저는 빈털터리더라고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저는 원래부터 가난했어요. 그걸 11년 후에야 깨달았을 뿐이죠. 그것도 모르고 시키는 대로 일만했으니 저도 참 바보죠.”

그 후 민경씨는 옷가지를 싸 들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벼룩시장을 보고 찾아간 식당에서 한동안 숙식을 했지만 그 생활도 고역이었다. “하루 종일 뼈 빠지게 일하고 나면 한 달에 떨어지는 돈이 고작 100만원 남짓이에요. 내 집이 있다면 들어가서 편히 쉬기라도 하겠지만, 식당에서 생활하다 보니 제대로 쉬지도 못했어요. 사실 24시간 일을 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에요. 예전의 삶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식당에서 나온 민경씨는 여관과 찜질방을 전전했다. 그러다가 모아놓은 돈이 다 떨어지게 되자 거리로 나오게 됐다. 다행히 아웃리치(야간 거리상담)를 나온 서울역 상담소 직원을 통해 여성쉼터를 소개 받았다. 그리고 3개월째 그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남편폭력 피해 가출, 보호시설 퇴소

김진숙(가명, 45)씨는 2년 동안 S가족쉼터에서 생활하다가 곧 자립을 앞두고 있다. 진숙씨는 전 남편과 사별하고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남편은 도박과 경마에 빠져 사는 사람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사채업자가 찾아와 진숙씨에게 몇 백, 몇 천에 달하는 돈을 요구했다. 세탁소 일로는 이자를 갚기에도 벅찼다. 남편에게 도박을 그만하라고 말을 하면, 남편은 온몸에 피멍이 들도록 진숙씨를 때렸다. 진숙씨가 아이를 임신하고 있을 때도 폭력은 계속됐다.

“출산을 하고 100일이 안 되었을 때였죠. 그 날도 남편이 술을 먹고 들어와 저를 때리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만 옆에 누워있는 아기에게 남편의 주먹이 헛나간 거예요. 아이 얼굴이 새파랗게 변하는데 정말 가슴이 철렁 내려앉더라고요.” 그날 밤 진숙씨는 아이와 함께 가출을 했다. 한동안 가정폭력 쉼터에서 생활했다. 하지만 가정폭력 쉼터는 단기보호시설이기 때문에 몇 달 후에 퇴소를 해야 했다. 그리고 영등포역 상담소를 통해 현재 있는 가족 노숙인 쉼터를 소개 받았다.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대한법률구조공단 도움으로 이혼소송을 했어요. 남편이 계속 이혼을 거부했기 때문에 1년 동안 7번이나 법원에 출두해야 했죠.” 진숙씨는 올해 5월에 고등법원으로부터 이혼 확정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경제력이 없는 남편에게 위자료나 양육비를 받으리라고는 기대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남편이 현재 살고 있는 영구임대아파트가 진숙씨 명의로 되어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밀린 임대료와 관리비를 진숙씨가 내야 할 판이다.

친구 집에서 더부살이, 파출부 구직

이경희(가명, 38)씨는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얼마 전 합의이혼을 하고 친구네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다. 경희씨가 결혼을 할 때에 친정에서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친정이 꽤 잘 사는데도 경희씨가 도움을 청하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결혼을 하고 나면 남남이니까요. 나이 들어서 손 벌리기도 뭣하잖아요.”

경희씨는 직장을 구하려고 이리저리 수소문을 해보았다. 하지만 나이도 있고, 오랫동안 가사노동만 하다 보니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아이가 아직 어려서 돈을 벌어야 해요. 가정집에 들어가 파출부로 일하면 130만원 정도는 받을 수 있대요. 그래서 아이는 잠시 친구네 집에 맡겨두려고요. 저까지 얹혀살기는 미안하잖아요.”

여성노숙인 세계, 남성노숙인과 달라

“여성 노숙인의 세계는 남성 노숙인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 있죠. 여성들은 노숙에 이르기 전에 비공식적 노동시장에 빠르게 흡수되어 버려요. 서글픈 현실이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의 가사 노동력과 육체는 어떤 방식으로든 소용되기 마련이거든요. 문제는 이들이 이차 노동시장에서 감수해야 하는 노동력 착취와 심적 고통이 상당히 심각하다는 거예요. 하지만 거리 노숙인처럼 훤히 보이지도 않으니 이들의 목소리는 사회 뒤편으로 묻혀버릴 수밖에요.” 화엄동산 임동숙씨의 설명이다.

본래 ‘노숙인’은 ‘거리노숙인’과 ‘쉼터노숙인’만을 지칭하는 이름이었다. 최근엔 상당수의 노숙인들이 노상생활과 쪽방거주를 반복하고 있으므로, 쪽방거주자를 노숙인 범주에 포함시키고 지원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노숙인’의 범주가 넓어진다고 해도 집 없는 여성들은 이름 없이 부유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노숙’이라는 개념이 이들의 상태를 대변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본 기사에서는 임시로 이들을 ‘홈리스 여성’라고 부르지만, 우리 사회에는 아직 이들을 부를 이름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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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4/06/21 [17:23] 수정 | 삭제
  • 가난한 여성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여주는 기사군요.

    여성의 빈곤화에 대해 말은 많아도 아직 이 여성들은 이름도 붙여지지 않았다는 게 우리 현실이라는 것이군요.

    노동계도 관심도 없고, 노숙인 문제도 남자들 잣대로만 보려고 하고요.

    여성이 왜 빈곤해지는지는 폭력과 노동시장의 성차별과 가족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이런 기사들이 많이 읽혀지고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빈곤문제를 여성의 눈으로 본다는 게 무엇인지 알렸으면 합니다.
  • rainy 2004/06/21 [10:26] 수정 | 삭제
  • 궁금해하기만 했는데 왜 여성들이 노숙을 하게 되고, 홈리스 생활을 하게 되는지 문제에 대해서 이제 실마리를 찾은 기분이 들어요. 지난 번 기사도 좋았지만 홈리스 여성들 생활에 대한 얘기를 들으니 더 가까이 다가간 느낌이 들어요. 이런 기사 정말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