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정치세력화 운동에 대해 지금까지 <일다>를 통해 제기된 방향 제시 및 비판을 두고, “일각의 영 페미니스트들의 도발적인 비판”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사용되고 있다. 이런 반응은 주로 <일다> 기사들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이들의 입을 통해 나오고 있다. 여기서 과연 <일다>가 제기한 여성정치세력화 담론이 “일각”의, “영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인지 물어볼 필요가 있다.
몇몇 진보매체를 통해 제기된 ‘박근혜 사유론’을 비롯해 “여성도 더러워지자”는 논조에 대한 반론, 여성정치세력화 운동이 기본 취지를 잃고 ‘여성정치’와 무관한 여성들과 손 잡는 것에 대한 우려, 여성운동 단체장의 정계 ‘영입’이 여성운동에 미칠 영향 분석, 여성의 정치 참여가 ‘여성운동계의 특정 인맥 국회 보내기’가 되어선 안 된다는 질책, 여성정치는 여성유권자의 변화를 끌어내는 것이 우선이라는 원칙 재확인과 방향 제시 등이 그 동안 여성주의 저널 <일다>를 통해 제기된 담론이다. 이러한 담론을 생산해내는 이들, 그리고 이에 동의하는 이들이 “영 페미니스트”인가? 반대로 여성정치세력화에 대한 <일다>의 문제제기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은 “올드 페미니스트”인가? 한국여성단체연합의 대표를 비롯해 몇몇 여성계 인사들이 그런 식의 구도를 만들고 있고, 이들의 말과 글을 몇몇 매체들이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창비에서 발간한 계간 <창작과 비평> 123호와 역시 창비에서 발간한 <여성과 사회> 15호,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 2004년 봄호, 그리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발간한 <기억과 전망> 7호 등 매체들이 올해 여성정치세력화에 대한 이슈를 주요하게 다루며 이 같은 구도를 전제했다. 여기서 <여성과 사회>의 편집자문위원과 <기억과 전망>을 발간하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이사가 현직 한국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라는 사실은 배경지식으로 필요할 터이다. ‘세대 구도’로 문제의 본질 호도 어찌하여 여성정치세력화 논쟁이 ‘세대갈등’으로 비화된 것일까. <일다>에 게재된 여성정치와 관련한 기사들은 소위 “여성386”으로 불리는 필진부터 그 이상 세대인 여성학자를 비롯해 여성단체 실무경력이 있는 기자와 여성언론사에 몸 담은 바 있던 필자까지 다양한 이들이 다뤘는데 어떻게 “영 페미니스트” 그룹으로 묶일 수 있는가. 사실 ‘비판’적인 목소리가 제기되면, 비판을 받는 쪽에서 이를 ‘세대갈등’으로 명명해버리는 태도는 재작년 말부터 감지됐다. 당시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의 특정 기사에 대해 “반여성주의적 내용”이라는 비판이 제기됐을 때, <이프> 측은 이를 “영 페미니스트의 문제제기”라며 여성주의자 세대간에 토론이 필요하다는 제안을 했었다. 그러나 해당 기사에 대한 문제의식은 ‘젊은’ 여성주의자들만의 의견이 아니었고, 이를 ‘세대갈등’으로 보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피해가는 것이었다. 마치 ‘올드 페미니스트’들은 <이프>의 해당 기사에 대해 찬성한다는 가정을 깔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정치세력화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도 이런 식의 구도를 형성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박근혜 사유론을 제기한 바 있는 최보은 <프리미어> 편집장은 이계경 전 여성신문사 사장의 한나라당 행에 대한 여성주의자들의 비판에 대해 “젊은 페미니스트들”을 지칭하며, “존재 자체가 한국의 여성운동사의 중요한 일부분인 사람(이계경)에 대한 인격살인을 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이계경 한나라당 의원의 당시 행보에 대해 비판한 것은 “젊은 페미니스트들”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여성운동을 오랜 기간 해 온 페미니스트들은 더 큰 배신감을 표하기도 했다. 또 이계경씨의 행보에 공식적으로 문제제기를 하며 여성신문사에서 받은 ‘미래사회를 이끌어갈 여성지도자상’을 반납한 두 명의 여성변호사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과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들 중에 유독 “젊은 여성주의자”를 꼽아서 세대 구도를 만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의 주장을 “나이 든 여성주의자”의 주장인 것처럼, 다시 말해 “나이 든 여성주의자”들은 자신과 같은 입장인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전략이다. ‘나이주의’도 한 몫 작년부터 <일다>에서 제기된 여성정치세력화 담론과 기존 여성정치세력화 운동의 방향에 대한 비판에 대해, 그 비판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과 그들의 입장에 동조하는 이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세대갈등론’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창작과 비평> 123호는 여성운동단체 대표의 정계 ‘영입’을 둘러싼 논란을 아예 “여성운동의 세대갈등”으로 정의 내리고 토론에 붙였다. 여기서 ‘올드 페미니스트’ 격으로 토론을 한 정현백 한국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는 <일다>에서 문제 제기해 왔던 내용에 대해 “영페미니스트의 도발적인 비판”이라 칭하면서, “정확하지 않은 예단은 열악한 조건 하에서 묵묵히 일하는 수백명의 활동가들을 낙담케 한다”고 말했다. <여성과 사회> 15호에선 현재 이계경 한나라당 의원이 명예회장으로 있는 여성신문의 박이은경 편집국장이 ‘맑은정치여성네트워크’ 측의 입장을 대변해주면서 “한 선배 운동가”의 심정을 글로 옮겨 실었다. “일부 영 페미니스트들이 후보운동을 하는 데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운동의 에이, 비, 씨도 모르는 소리다. (중략) 그들이 여성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국회 근처에라도 와봤는지, 정치권을 향해 어떤 액션이라도 취했는지 묻고 싶다”는 것. 한편 <기억과 전망> 7호에서 강남식 한국여성단체연합 복지위원장은 <일다>의 문제 의식을 '영 페미니스트'의 정체성 변화라고 규정하며, "영 페미니스트들로부터 올드 페미니스트로 규정받는 이들이 영 페미니스트들의 도전에 어떻게 대응하며 진보 여성운동을 발전시켜 갈지 자못 흥미롭다"는 뜬금없는 논의를 전개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영 페미니스트”라는 지칭이 담고 있는 함의다. 이들은 <일다>의 문제 제기를 “영 페미니스트들의 공격”이라는 식으로 ‘좁히려’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 때의 “영 페미니스트”란 여성운동단체 외부의 페미니스트들이자 단체 활동가들과 ‘대립’되는 존재로 보려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엔 또 다른 함의가 있는데, 사회적으로 “젊다”는 말이 담고 있는 의미는 꽤 긍정적이지만 현재 여성정치세력화 논쟁을 둘러싸고 “영 페미니스트”란 용어가 사용되는 맥락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올드”를 논하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얘기가 ‘선배/후배’ 얘기인데, 여성정치세력화 논쟁을 둘러싸고 ‘선배/후배’가 논의되는 양상은 다분히 ‘나이주의’에 기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마디로 ‘너흰 아직 어려서 철이 없다’는 식이다. 비판을 변화의 계기로 삼아야 여성정치세력화 논쟁을 ‘세대갈등’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계속해서 여성정치세력화 담론을 왜곡시키고 있다.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여성정치세력화 운동의 방향에 대해 고민하고, 우려하고, 여성운동단체 대표의 잇따른 정계 ‘영입’ 방식에 대해 문제 의식을 느낀 사람들 중엔 여성운동단체 내부 활동가들도 많았다. 그 중엔 <일다>에 제보를 하거나 취재에 도움을 주고, 함께 논의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인 이들도 있다. 또한 여성운동단체에서 일했던 경험을 토대로 이 문제를 바라보고 심각성을 느끼고 공개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고자 했던 사람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다>를 통해 제기된 담론들에 대해 “영 페미니스트”의 도발적 비판이라 칭하는 이들은, 그러한 논의를 “운동에 대해 잘 모르는”, “현실을 간과하고 원칙만 세우는” 여성주의자들의 주장이라고 매도하고 있다. 말은 바로 하자. 정말로 “열악한 조건 하에서 묵묵히 일하는 수백명의 활동가들을 낙담케” 했던 것은 <일다>가 제기한 비판이었는가, 아니면 활동가들과의 약속을 어기고 정계로 진입해버린 여성운동단체 대표의 행보였는가. 이번 17대 총선을 앞두고 여성정치세력화 운동의 방향을 정했던 이들은 그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비판에 대해 변명하기 위해 더 이상 “일각의 영 페미니스트” vs “선배 여성운동가” 구도를 세워선 안 된다. 그런 식의 대응은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비판을 피해나가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부당할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단체 안팎에 있는 사람 모두 여성운동의 방향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의견을 개진할 수 없게 만든다는 데 더욱 큰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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