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커밍아웃 이야기

로맨티스트 소람

황보신 | 기사입력 2004/07/18 [21:18]

나의 커밍아웃 이야기

로맨티스트 소람

황보신 | 입력 : 2004/07/18 [21:18]
“레즈비언으로서 커밍아웃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느냐?”는 인터뷰 요청에 그녀는 흔쾌히 응해 주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소람님의 아파트를 찾았다. 인터뷰를 시작하려는데, 담배 피워도 되는지 묻는다. 담배를 피우면 이야기를 더 잘 한다면서. 그녀는 담배 한 개피를 태우면서 또렷하고 분명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최초로 커밍아웃한 것은 언제였나요?

“대학 때라고 봐야 될 것 같거든요. 제가 89학번이니까 그때만 해도 동성애자 모임이 눈에 보이는 것은 없었어요. 그렇지만 제가 여자대학을 다녔는데 주변에 동성애자들이 굉장히 눈에 많이 보였어요. (중략) 대학교 4학년 때 총학생회 선거에 많이 관여하면서 알게 된 친한 후배가 있어요. 그 후배가 저한테 동성애자 조직을 만들자는 제안을 하더라구요. (중략) 성사되지는 않았어요.”

“사회 생활하면서 제 자신이 갑갑해서 살 수가 없더라구요. 속이고 거짓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직장생활을 여기저기서 했었는데 그 속에서 굉장히 친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 확실한 이성애자이지만 인간으로서 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에게 ‘커밍아웃’을 하기 시작했어요. 직장동료들도 있었고, 개인적으로 친한 친구들도 있었고. 그 과정에서 집안 식구들이 다 눈치를 채죠. 하지만 알면서 모른 척 했죠.”

-집엔 커밍아웃을 언제 하셨어요?

“사실은 저는 집안에서는 ‘아웃팅’이 먼저였다고 생각을 해요. 대학을 졸업하고 한 학번 선배를 한 4년 정도 만났었어요. 그 선배가 저한테 보냈던 편지가 어머니 눈에 띄었어요. 엄마는 워낙 제가 중고등학교 때 여자친구랑 친했기 때문에 감을 잡고 있었어요. 그 선배 같은 경우는 우리 집에 굉장히 자주 왔었고 당시 선배가 대학원생이면서 자취를 하고 있어서 제가 그 집에서 자고 했기 때문에 엄마가 거의 감을 잡고 있지만 이야기를 할 수 없었는데 그 날은 결정적인 물증이 나왔기 때문에 엄마랑 이야기를 하게 되었죠.”

“그 선배를 부르더라구요. 야단을 칠 줄 알았는데…. 그때 선배와 저는 워낙 떨어지면 살 수 없는 상태였어요. (엄마를) 만나자마자 언니가 그냥 울어버렸어요. 엄마가 마음이 약하신 관계로 ‘그냥 딸 하나 더 있다고 생각할테니까 잘 지내라. 그런데 다른 가족들은 몰랐으면 좋겠다. 엄마는 모른척하겠다. 그런데 너희 어머니는 성격이 보통이 아니신 것 같으니까 너희 어머니가 아시면 양쪽 집안이 풍지박산 날 것 같으니까 절대 모르시게 해라’ 정도(말씀하셨죠).”

-온 가족에게 커밍아웃한 때는?

“4년 전이었어요. 어머니, 아버지, 동생에게 다 얘기했죠. 그 이야기가 길고 복잡한데. (중략) 2000년 1월에 최초로 한 이반동호회에 가입해서 활동을 하는데, 저보다 늦게 들어온 회원과 가까워졌어요. 당시 그 사람은 기혼자였어요. 그렇게 되면 여러 가지 문제가 걸리게 되잖아요? 그 친구의 남편이 굉장히 좋은 사람이에요. 남들 보기에도 그림 같은 부부였단 말이에요. 그래서 그 가정을 깨는 것은 저도 원하지 않았고 그 사람도 원하지 않았어요. 저는 별다른 요구사항이 없었고. (중략)”

“그런데 남편이 알게 되었고 그 사람이 자기는 나 없이는 살 수가 없다고 저를 선택하겠다고 이야기를 했어요. 저는 돈을 구해서 방을 몰래 얻었고 친구를 이사시켰죠. 이사 준비가 다 끝난 상태에서 내일 나가야 하는데 오늘 이야기를 한 거죠. 난리가 났죠. 엄마랑 둘이 껴안고 울다가 아빠가 퇴근하신 다음에 얘기를 했고, 퇴근한 남동생에게도 이야기를 했죠. (중략) 밤에 짐을 싸놓고 자는 척하고 누워 있는데 엄마가 들어오시더니 이불을 덮어주고 나가시더라구요. 진짜 그때 가슴 아팠어요. 그렇게 해서 집을 나왔죠.”

-그때 독립한 후 가족들과의 관계는 어떠세요?

“그 이후에도 집에 자주 갔어요. 제가 집안에서 장녀이자 장남이에요. 소위 말하는 딸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는 것을 엄마는 아세요. 어렸을 때도 그랬지만. 집안의 큰 일을 처리하는 범주가 다르니까. 엄마는 ‘아들 장가 보낼 때보다 네가 나간 것이 더 서운했다’고 지금도 말씀하세요. 어머니는 지금도 갈등하세요. 절반은 인정, 절반은 부인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시죠.”

“아버지는 굉장히 말수가 적으세요. 하루는 (자가용차 플라스틱 열쇠고리를) 당신 것이랑 동생 것을 해오셨는데 너도 해주고 싶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러면서 니 친구 번호는 뭐고 색깔은 무슨 색이냐고 물어보시더라구요. 제가 그 친구 차는 빨간색이고 차 번호는 뭐다라고 했더니 나중에 만들어가지고 저희 집에 가지고 오셨더라구요. 아버지 나름의 인정이었다고 생각을 해요. 백 마디 말보다 더 고마웠죠.”

“제 동생 같은 경우에는 전형적이고 보수적이고 성실한 한국의 가장인데 우리 누나는 좀 별난 사람이라고 생각하죠. ‘누나만 행복하면 된다. 누나가 혼자 살면서 피폐해지는 것이 보기 싫었다. 누나가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며 동생이 가장 인정해 주는 편이죠. 인간은 누구나 자기 방식으로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는 데 가장 동의해 주죠. 어머니, 아버지는 다들 동의하죠. 하지만 당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행복하길 바라죠. 한국의 부모님들은 자식들을 깊이깊이 치열하게 사랑하지만 방식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아요.”

-어렸을 때도 다른 집의 딸들과 달랐다고 말씀하셨는데?

“엄마와 최초로 투쟁한 것이 5살 때였는데 동생이 3살 때이었어요. 엄마와 먼 데를 다녀왔는데 소변이 마려웠어요. 버스를 내리자마자 맨홀 뚜껑이 있는 데로 가서 제 남동생은 바지를 내리고 바로 쉬를 누게 했어요. ‘나도’ 그랬더니, ‘여자가 어디서 엉덩이를 까느냐?’는 거예요. 거기서 집까지 걸어가다가 바지에다 오줌을 쌌어요. 이 일이 기억나는 것은 오줌 샀다는 것도 창피하지만 그것보다도 ‘여자기 때문에 나는 밖에서 쉬를 할 수 없다’는 것 때문이에요. 지금도 저는 그 일을 확대해서 나는 5살 때 내가 여성인 것을 알았다고 하지요.(웃음)”

“그게 최초였고 그 다음에는…. 엄마가 나를 이쁜 딸로 키우고 싶으니까, 한번은 내게 마론 인형을 사주고 남동생에겐 짚차를 사다줬어요. 그런데 마론 인형은 너무 수동적인 장난감이잖아요. 짚차는 굴러가잖아요. 지금도 움직이는 것을 굉장히 좋아해요. 바퀴 달리는 것을 다 잘 타거든요. 그때 짚차 때문에 남동생이랑 엄청 싸웠어요. 아빠는 지금도 그 때 제가 말한 것을 기억하신대요. ‘아빠 선물은 굉장히 감사한데 마음은 받겠지만 다음에는 원하는 게 뭔지 물어봐 주세요. 이 인형은 너무 재미없어. 이렇게 생긴 애가 어딨어. 나는 이렇게 안 생겼는데.’”

“또 치마 입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어요. 별다른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니라 저는 운동장에서 공도 차고 야구도 해야 하는데 치마는 걸리적거리니까 불편해서 싫었어요. (중략) 어쩔 수 없이 입었던 고등학교 2년을 제외하고는 치마를 입은 적이 없어요. 물론 학교가면 체육복으로 갈아입었죠. 어렸을 때는 불편해서 치마를 거부했지만 크니까 소변사건과 마찬가지로 강요된다는 것과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 좀 더 머리가 커지면서는 여성에게 치마가 강요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자각을 하게 된 거죠.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사실 치마가 편한 점도 있더라구요. 여름에 시원하고. (웃음) 그래도 지금 저는 치마를 안 입을 뿐만 아니라 정장도 안 입어요.”

-여자를 좋아한다고 느꼈던 것은 언제부터였나요?

“초등학교 5학년때였어요. 또래 남학생한테 전혀 매력을 느낄 수가 없었어요. 유치하고 지저분하고. (웃음) 내가 누구랑 지내는 것이 편한가 생각해 보니까 예쁜 또래 여학생들과 있을 때 기분이 좋더라구요. 남자애들이랑 권투하고 공차고 노는 그 느낌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렇지만 대화가 되는 또래 친구를 찾을 수가 없었어요. 유일하게 대화가 되는 여학생이 한 명 있었어요. (중략) 그 친구랑 있으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친구랑은 애정은 아니었던 것 같고 처음으로 우정을 느꼈던 것 같아요. 남학생들과는 심지어 우정도 못 느끼겠더라구.”

“반마다 공주 같은 애들 한 명씩 있지요? 남자애들이 그런 애들 놀리면 막아주고 울면 집에다 데려주면서 기쁨을 느끼면서 그때 생각했죠. ‘나는 여자를 좋아하는구나. 나는 잘나서 남자를 못 사귀는구나’ 생각을 했죠. 지금 생각해 보면 남학생들에 대한 열등감이었던 것 같아요. 그 애들이 XY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살아가는 지점이 다르잖아요. 그것에 대한 보상심리로 어렸을 때는 ‘그 남자애들이 남자로 하는 것보다 내가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게 컸어요.”

“그리고 제 성향 자체가 아름다운 것을 좋아해서 탐미적 인간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내가 나 자신을 거울을 통해서 봐도 아름답다고 생각을 할 수가 없었어요. 아주 오랫동안. 자신의 모든 면을 좋아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는 또래 여학생을 좋아하게 되고 동경하게 되고. 그러나 나는 한국 사회가 강요하는 그런 여성이 될 수가 없고, 그렇다고 남성도 될 수 없다는 말이에요. 거기서 느끼는 제 나름대로의 어려움이 있었죠. 남자애들은 적이고, 남자애들은 나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고, 게다가 내가 가질 수 없는 여성성이라고 생각되었던 것들을 여자친구들을 보호해 주고 그 곁에 있으면서 누린다고 할까요, 어렸을 때는.”

-동성애자라는 것이 고통이 되었던 적이 있나요? 호모포비아를 느낀 적은?

“초등학교 때 상당히 혼란스러웠죠. 책을 많이 읽었는데 그때 나오는 연애라는 것은 모두 이성애자의 연애죠. 원래 성격이 로맨틱한데 왜 나 같은 형태의 연애는 없는 것이냐는 고민에 빠졌었죠. 중학교 때는 동성애자라는 인식이 생겼는데, 저는 확신하는 게 있었어요. ‘사람이 사람을 증오하는 것이 문제이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절대로 나쁜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살아가는 방식과 정체성을 부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저는 제 자신이 너무 좋기 때문에 이 존재를 어떻게 하던지 스스로 제 안에서 긍정하려고 애썼죠. 사실이 이 긍정이 쉽게 나오는 것이 아니고 염세 속에서 오랫동안 헤매야지 나오는 거죠.”

“첫 연애는 중학교 때 했던 것 같아요. 연애라고 해 봤자 손잡고 떡볶기 먹으러 가고 팔짱 끼고, 그게 다였지만. 누구 때문에 잠 못 자고 편지를 수없이 썼던 것이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한 도서관 청소년 독서 프로그램에 참가했다가 동갑내기 친구를 만났어요. 처음에는 사이가 나빴죠. 토론만 하면 서로 공격하고 싸우다가 나중에는 서로를 인정하고 굉장히 가까워지고 온갖 이야기를 다하게 되었죠. (중략) 당시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고 오토바이도 타고 그랬는데. 그 집에서 알게 됐어요. 그 집 어머니는 우리 딸은 천사같이 착한데 못된 것을 만나가지고 (중략) 망쳤다고 생각했어요. 저를 사탄취급을 하고 ‘악의 화신’이라 했어요. 중 3때 집에 전화해서 온 집안이 발칵 뒤집혔죠. 처음 호모포비아를 느꼈어요.”

“그리고 대학교 때 이런 일이 있었어요. 두 학번 위인 선배인데 굉장히 유명한 선배였어요. 이 선배는 학교에서 공인한 동성애자였거든요. 다들 욕을 해요. 나도 그 선배의 정치적 입장이나 태도는 굉장히 싫어했지만 그 사람을 공격하는 방식이 사생활이나 성적 정체성이라는 것에 굉장히 공포를 느꼈죠. 나도 커밍아웃하면 저렇게 된다고.”

“직장에서 동성애자라는 것을 고객에게는 숨기지요. 삶의 근거를 잃게 되기 때문에. 하지만 직장에서 인간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 알아요. ‘요즘 만나는 남자 어때?’라는 질문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거든요. 직장이 돈 버는 곳만이 아니라 삶을 같이 나누는 곳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제 존재를 알리고 싶다고 생각한 사람들에게 알려요. 저는 커밍아웃 때문에 사람을 잃은 적이 한 번도 없어요. 한 인간으로서 바로 서는 모습을 보여주면 그보다 더한 설득력은 없다고 생각해요. 물론 이런 것은 아쉽죠. 처음에는 ‘너니까 봐주겠다, 너니까 괜찮다’죠. 그러나 이야기를 많이 듣기 시작하면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해요. 정치적으로 옹호하는 입장이 되기도 해요.”

-동성애자 결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가능하다면 하려고 생각해요. 우리나라에서 혼인신고가 안 되는 것은 알고 있어요. 만나는 친구가 있는데, 자기가 취업을 하면 같이 결혼하자더라구요. 하지만 결혼제도가 인정이 되더라도 제도적 인정이지 범사회적 인정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경제적인 기반을 무시할 수 없는데. 워낙 가난하게 살아가지고 그 부분을 잘 알거든요. 그 부분에 대한 안정적인 장치 없이는 굉장히 어렵다고 생각해요. 저는 적어도 40에서 50까지 완전히 어느 정도 (경제적인) 틀을 만들어야겠다고, 그때는 대사회적인 커밍아웃과 함께 전투적인 활동을 하겠다고 굉장히 생각을 많이 해요. (중략)”

“사람은 행복하기 위해 산다고 생각해요. 다른 가치보다. 그런데 (두 사람의) 행복이라는 게 각자가 자기 생을 살면서 서로가 삶을 공유할 수 있는 약간의 교집합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중략) 그런데 이게 왜 꼭 이성애자 가족에서만 가능해야 해요? 이런 폭력이 어디 있습니까? 용납이 안됩니다. 정말. 확대가족이라는 것은 서로 인정된다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사랑할 수 있다는 거예요. 연애라는 것이 에로스적인 것이기 때문에 배타적인 것이지만 아가페적인 것, 휴머니즘적인 것이 들어가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또 의식주를 반드시 같이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사람은 누구나 파트너를 원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이성애자 틀에 있었다면 벌써 결혼을 했을 테고 굉장히 모범적인 가정생활을 했을 거예요. 저의 수많은 연애편력은 한국사회에서 동성애자라는 특수성 때문이에요. 그토록 많은 연애, 실연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람을 버린 적은 한 번 밖에 없었다는 거죠. 상대방이 확실하게 동성애자로 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는데, 제가 설득을 해 볼 수는 있지만 강요하고 끌고 갈 수는 없는 거잖아요. 작년에는 너무 힘이 들었어요. 너무 좌절했고. 두 달 동안 살이 20kg나 빠졌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내 자신에 갖고 있는 자신감은 내가 아직도 사람을 믿고 사랑한다는 거죠. 사실 저는 담배하고 연애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어요.(웃음)”

연애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몇 바퀴나 돌아왔지만 현재는 인생의 반려자가 있어 행복하다는 그녀, 인터뷰를 마무리 지으려고 하는데 이것만은 꼭 좀 써 달란다.

“제가 생각하는 커밍아웃이라는 것은 내가 동성애자라는 성명서를 밝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것에 대한 이해, 동조, 공감대를 끌어내는 것이 커밍아웃이죠. 저는 제가 처음에는 어머니에게 ‘아웃팅’이었지만 ‘커밍아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내 성적 정체성을 가지고 어머니와 끊임없이 대화하려고 노력했고 완전한 성공은 아니지만 절반의 성공 정도는 했고, 앞으로는 완전한 성공으로 갈 거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에요. 제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도 제가 아까 말씀 드렸던 것처럼 그런 과정을 거쳐요. 너니까 괜찮아, 너를 좋아하니까. 그러다가 그들 스스로가 동성애 문제를 아주 중요한 문제들 중의 하나로 인식하고 있고 같이 고민하게끔 만들었다는 것, 제가 생각하는 커밍아웃은 이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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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와.. 2004/07/19 [19:42] 수정 | 삭제
  • 89학번인데 대학에 동성애자 모임을 만들려고 하셨다니 놀랍습니다. 그 때는 동성애에 대한 얘기가 하나도 없던 때 아닌가요.. 어쩌면 있었는데 몰랐을 수도 있겠네요.. 소람님 커밍아웃 이야기 잘 봤습니다.
  • 2004/07/19 [07:41] 수정 | 삭제
  • 일다 인터뷰들 너무 재밌게 보고 있어요. 로맨티스트 소람님 인터뷰도요.

    저도 성정체성에 대해서 고민하는 중이라서 소람님의 얘기 더욱 잘 봤어요.

    다 읽고 나니까 꼭 제가 올챙이처럼 느껴지네요. 너무 생각도 짧고 어려서..

    아직 개념도 없는 것 같고요.. 커밍과 포비아 문제도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고..

    그냥.. 느끼는 점이 많았어요. 저도 직장 다니는데 그 문제가 참 힘들거든요.

    돈도, 가족도, 사랑도, 요즘은 다 힘드네요. 성정체성 때문만은 아니겠지만요.

    저도 자신감을 갖고 싶지만요. 저는 커밍아웃으로 잃은 사람들이 좀 있어요.

    제가 미숙한 면이 많은 걸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차차 나아질 거라고 하더군요.

    그래도 이반 친구들이 있어서 다행이죠. 친구들이 있으니까 외롭지는 않아요.

    소람님의 커밍아웃 이야기들 중에 부러운 이야기도 있고, 가슴도 아팠어요.

    그냥 저는 여기 적는 게, 소람님이 제글 보신다면 잘 봤단 인사를 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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