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사랑이 아니라고 한 적 없다

이성 간의 사랑만을 인정하는 세상에서

혜원 | 기사입력 2004/10/24 [21:54]

[기고] 사랑이 아니라고 한 적 없다

이성 간의 사랑만을 인정하는 세상에서

혜원 | 입력 : 2004/10/24 [21:54]
그냥 풋사랑이 아닌, 내 인생을 흔들어버리는 강렬한 사랑을 경험했던 게 언제였던가. 지금의 나는 서른을 넘긴 나이. 당시의 내 모습을 본다면 아주 어리게 느껴질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이가 무슨 상관이었단 말인가. 나는 무려 2년 남짓한 시간동안 그녀를 사랑했었다. 20대 이후 연인관계를 1년 이상 지속하기 어려워하는 나로선 매우 긴 시간이다.

매일 일기장에 그녀를 사랑한다고, 그래서 미워한다고 썼었다. 왜냐면 우린 서로 사랑했지만 결코, 절대로 연인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겐 남자친구가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나를 포함한 모두가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내게 다가왔다. 내가 그녀의 존재를 알기 이전에 이미 그녀는 나의 존재를 알아보았다.

나는 그녀와 같은 반도 아니었고, 심지어 동 학년이 아니었기 때문에 서로의 일정을 맞출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언제나 내 옆에 있었다. 쉬는 시간, 점심 시간에 그녀는 매점에서, 복도에서, 세면장에서 우연인 듯 나타나 말을 걸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갈라치면 어느 샌가 나타나 우린 같이 걷고 있었다.

그녀는 나의 이야기를 정말 세심하게 들어주었고, 나의 의견을 존중해줬다. 그렇다면 나는 그녀를 좋은 선배라고 불렀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나는 그녀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나를 존중해주었기 때문에 함께했던 게 아니었다. 내 이야기를 들어줄 다른 친구들도 얼마든지 있었고, 나를 존중해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사람들과의 만남을 뒤로하고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그것이 사랑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누군가를 미치도록 좋아해놓고도, 서로 그 많은 시간을 붙어 지냈으면서도. 우린 사랑은 남자와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나처럼 세상에 대해 의심이 많았던 사람조차, 그녀처럼 자유롭고 관대한 사고를 가진 사람조차, 거기엔 이견이 없었다. 그녀에겐 남자친구가 있었고, 나는 그녀에게 한 번도 남자친구와 헤어지란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나와 만나기 위해 남자친구와의 약속을 몇 번 깬 적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게 다 무슨 소용이었단 말인가. 우리의 관계는 결국 아무 것도 아니었는데. 세월이 한참 흐른 후에도 ‘사귀었었다’는 과거형으로조차 말할 수 없는 관계였는데 말이다. 생각해보면, 그 때의 그녀와 나는 우리 관계에 대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한 적 없다. 왜냐면 누구도 사랑이냐고 묻지 않았으니까. 우리 스스로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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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lue 2004/10/28 [06:20] 수정 | 삭제
  • 첫사랑이 유독 강한 잔향을 남기는 것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러나 즐거웠던 기억은 그 때로 고스란히 남겨두어야죠.

    님의 그녀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요?

    이반으로 살고 있을까요, 아니라면 그녀에겐 다른 기억으로 남았겠죠?
  • 원더 2004/10/27 [06:49] 수정 | 삭제
  • 내가 왜 남자로 태어나지 못했을까 원망했었죠.
    사실 처음엔 나의 그녀가 왜 남자가 아닌걸까 생각도 했었구요.
    글 중간에 님의 그녀가 얘기 들어주고 존중해주는 것 때문이 아니라고..
    참 아름다웠다고 얘기하는 게.. 그 말이 참 아름답네요.
  • 2004/10/27 [00:50] 수정 | 삭제
  • 이반이라면 한번쯤 겪어보았을 얘기기도 하지만 이렇게 보니까 또 느낌이 다른 것 같아요.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도 생각나구요. 이성 간의 사랑만을 인정하는 세상에서 우릴 슬프게 하는 것들이잖아요. 잘 읽었습니다.
  • 시월에 2004/10/26 [12:44] 수정 | 삭제
  • 20대 이후에 1년 이상 지속하기 어려웠다는 연인관계 얘기도 듣고 싶네요.
    슬픈 얘기는 아니길 바라면서...
  • 가현 2004/10/26 [12:06] 수정 | 삭제
  • 누군가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살아왔다는 것이

    위로가 되는 군요.

    계속 기자님 얘기를 시리즈로 써주시면 안되나요? ^^
  • 좋아보여 2004/10/26 [02:34] 수정 | 삭제
  • 헤어지자는 말도 없이 헤어진 게 가장 슬펐죠.
  • 2반 2004/10/25 [17:23] 수정 | 삭제
  • 이래서 이반감성인 건가 보다.
    거의..
    내 얘기를 듣는 것 같았다.
    지금도 그럴까?
  • Nill 2004/10/25 [14:19] 수정 | 삭제
  • 학창시절 얘기 나오면 다들 한 두개 사연을 가지고 있잖아요.
    그런 때 지금 이반인 친구들은 지나고 나서 부정하는 관계가 가장 서럽다고 말하죠.
  • 아큐 2004/10/25 [10:17] 수정 | 삭제
  • 그녀를 원망하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슬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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