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풋사랑이 아닌, 내 인생을 흔들어버리는 강렬한 사랑을 경험했던 게 언제였던가. 지금의 나는 서른을 넘긴 나이. 당시의 내 모습을 본다면 아주 어리게 느껴질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이가 무슨 상관이었단 말인가. 나는 무려 2년 남짓한 시간동안 그녀를 사랑했었다. 20대 이후 연인관계를 1년 이상 지속하기 어려워하는 나로선 매우 긴 시간이다.
매일 일기장에 그녀를 사랑한다고, 그래서 미워한다고 썼었다. 왜냐면 우린 서로 사랑했지만 결코, 절대로 연인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겐 남자친구가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나를 포함한 모두가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내게 다가왔다. 내가 그녀의 존재를 알기 이전에 이미 그녀는 나의 존재를 알아보았다. 나는 그녀와 같은 반도 아니었고, 심지어 동 학년이 아니었기 때문에 서로의 일정을 맞출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언제나 내 옆에 있었다. 쉬는 시간, 점심 시간에 그녀는 매점에서, 복도에서, 세면장에서 우연인 듯 나타나 말을 걸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갈라치면 어느 샌가 나타나 우린 같이 걷고 있었다. 그녀는 나의 이야기를 정말 세심하게 들어주었고, 나의 의견을 존중해줬다. 그렇다면 나는 그녀를 좋은 선배라고 불렀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나는 그녀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나를 존중해주었기 때문에 함께했던 게 아니었다. 내 이야기를 들어줄 다른 친구들도 얼마든지 있었고, 나를 존중해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사람들과의 만남을 뒤로하고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그것이 사랑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누군가를 미치도록 좋아해놓고도, 서로 그 많은 시간을 붙어 지냈으면서도. 우린 사랑은 남자와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나처럼 세상에 대해 의심이 많았던 사람조차, 그녀처럼 자유롭고 관대한 사고를 가진 사람조차, 거기엔 이견이 없었다. 그녀에겐 남자친구가 있었고, 나는 그녀에게 한 번도 남자친구와 헤어지란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나와 만나기 위해 남자친구와의 약속을 몇 번 깬 적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게 다 무슨 소용이었단 말인가. 우리의 관계는 결국 아무 것도 아니었는데. 세월이 한참 흐른 후에도 ‘사귀었었다’는 과거형으로조차 말할 수 없는 관계였는데 말이다. 생각해보면, 그 때의 그녀와 나는 우리 관계에 대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한 적 없다. 왜냐면 누구도 사랑이냐고 묻지 않았으니까. 우리 스스로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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