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옷 Old coat (III)

단추 | 기사입력 2003/04/30 [18:52]

오래된 옷 Old coat (III)

단추 | 입력 : 2003/04/30 [18:52]
6. 윈윈게임 Live and let live

부다페스트는 여러모로 서울과 비슷한 도시죠. 부다와 페스트를 남북으로 가르고 있는 다뉴브강. 물가도 비슷하고, 서남아시아에서 건너온 선조들은 몽골의 침략을 받으면서 오랫동안 전쟁을 치루기도 했고, 1950년대에 들어서 일어났던 공산주의에 반기를 든 학생 민주화 운동. 매운 맛이 들어가는 음식들은 어떤 것은 김치찌게 같고, 전골 같기도 하고, 동태찌게 같기도 하대요. 헝가리어도 한국어처럼 우랄 알타이 어족에 속하죠. 어떤 말들은 정말 비슷하다고 해요. 그러면서도 서유럽의 화려한 도시들 못지않게 아름다운 도시라고... '헝가리 무곡'을 들으면 사람들이 가진 감수성도 어딘가 한국 사람들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곤했죠. 나에게는 이 곳을 벗어난 모든 곳은 꿈처럼 내 밖에 존재하는 것들이고, 언젠가 그곳에 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너무 먼 미래일 뿐이죠. 부다. 페스트. 두나강.

그녀가 부다페스트에 있다는 얘기를 들은 것은 지난 달이었어요. 한 장의 엽서에는 알 수 없는 한자 말이 있었는데, 그건 童和想 時代 이었어요. 본문보다 중요한 추신을 늘 써오던 그녀의 엽서, 추신에 적힌 다섯 글자의 한자 말은 도저히 풀이할 수 없는 말이었죠. 그 밖에는, 잘 지내느냐는 말과 잘 지낸다는 말, 그런 절약하여 쓴 말들이었어요.부다페스트에 있다는 말은 없었지만 엽서는 부다페스트에서 온 것이었죠. 그녀와 부다페스트. 어울릴 것도 같고 그렇지 않을 것도 같고. 나는 거의 맹목적으로 여행사에 전화를 걸어 비행기 표를 예매했어요. 될 수 있는 대로 빨리요, 네, 내일이라도 상관없어요. 그리고 나는 방송국에 전화를 걸고, 짐을 싸기 시작했어요. 무엇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이제 너에게로 갈께. 그냥 거기 있어줘, 조그만 기다려줘. 나는 확신도 없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냥 집을 나섰어요. 이제 나는 그녀에게로 가기 위해.


7. Ⅴ : 불확실성의 숫자. 때로는 역경을 의미 Don't wait for me.

편지 1 처음 당신을 사랑할 때는 내가 무진무진 깊은 광맥 같은 것이었나 생각해봅니다 날이 갈수록 당신 사랑이 어려워지고 어느새 나는 남해 금산 높은 곳에 와 있습니다 낙엽이 지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일이야 내게 참 멀리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떠날래야 떠날 수가 없습니다

겔러트 언덕에서. 당신이 언젠가 내게 준 하얀 꽃잎을 넣은 책 속에 들어있는 엽서를 꺼내 몇 줄의 숨을 보내요. 살아있다고 보내요. 곁에 있었다가 다시 사라지는 당신에게, 내 안에 살아있었다가도 내 밖에 있는 당신. 미워했다가 다시 생각나는 당신. 붙잡기에도 떠나보내기에도 너무 아까운 당신. 생각만 하면 숨이 가빠지는 내 평생에 종교.

내 지금 그대를 떠남은 그대에게 가는 먼 길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돌아보면 우리는 길이 끝난 자리에 서 있는 두 개의 고인돌 같은 것을 그리고 그 사이엔 아무도 발디딜 수 없는 고요한 사막이 있습니다 나의 일생은 두개의 다른 죽음 사이에 말이음표처럼 놓여 있습니다 돌아보면 우리는 오랜 저녁빛에 눈먼 두개의 고인돌 같은 것을 내 지금 그대를 떠남은 내게로 오는 그대의 먼 길을 찾아서입니다.

부다페스트에서 베네치아로 가는 길은 두 번 기차를 갈아 타야 해. 오늘 밤엔 동역에서 기차를 타고, 또 어디에선가 내려 값싼 커피를 마시고, 또 떠나겠지. 이렇게도 시간이 갈 수 있다니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일이야. 미래는 멈춰버린 것도 같고, 여기가 미래인 것도 같아. 지나가는 모든 이방인들을 보고 있으면 결국 사람들의 피도 모두 이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고, 그러니 당신과 나도 어느 지점에선가 이어지겠지 하는 꿈을 꿔. 베네치아엔 크고 작은 섬들, 넓고 좁은 골목길들, 작고 예쁜 물건들이 많다고 해. 골목들을 가로지르는 바닷물 사이에 꽃잎을 띄워보내면 언젠가 당신에게 닿을까. 표현할 수도 없고, 그러기도 싫은, 염치없는 내 마음이 전해질까. 끝없는 여행. 안녕.


Inspiration - "Delicate soft-bred, brittle creature" from Bronte, The Spell:An Extravaganza, 37

4월 2003년 단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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