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아이들과 말이 통하지 않을까?”

아이들과 함께 만드는 수업규칙

김신정아 | 기사입력 2005/01/17 [16:39]

“왜 아이들과 말이 통하지 않을까?”

아이들과 함께 만드는 수업규칙

김신정아 | 입력 : 2005/01/17 [16:39]
<필자 김신정아님은 당곡고등학교 교사입니다. -편집자 주>

교사 임용시험 면접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2002년 1월,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이 흐르는 임용고시 2차 면접시험장에서, 면접관이 나에게 던진 1번 문제는 ‘학급 운영 원칙’에 대한 것이었다. “당신은 담임을 맡게 되면, 어떤 학급을 만들고 싶습니까?”

“저는 학급을 ‘학생들이 민주주의를 배우고 경험하는 공간’으로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즉, 학급의 일을 담임이 혼자 일방적으로 결정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과 함께 논의하여 결정하는 ‘학급자치’를 시도해보고 싶습니다.” 면접관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교사가 되었다.

얘들아, 우리 스스로 규칙을 만들어 보자

대학이라는 곳에 처음 입학했을 때, 나는 수업 시간에 선생님의 허락 없이도 화장실을 자유롭게 다녀올 수 있다는 사실이 꽤나 어색하고 신기했다. 왜냐하면 고등학교 때까지 무려 12년 동안이나, 수업 시간에는 무조건 선생님의 허락이 있어야만 화장실에 갔다 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울상이 된 학생에게 “못 참겠으면 그냥 싸.”라고 말하는 선생님에 대한 얘기 정도는,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다지 놀라운 사실이 아닐 것이다.

왜 중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은 오로지 감시와 통제의 대상일까? 왜 항상 그들은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에 대해, 스스로 고민하고 생각해 볼 기회를 부여 받지 못할까?

그래서 나는 첫 수업 시간에 학생들과 ‘수업 시간에 지켜야 할 규칙’을 함께 정해 보기로 했다. 가령 “수업 중에 화장실에 가고 싶은 학생은 선생님의 허락 없이도, 한 명씩 조용히 다녀오면 된다”거나, “수업 시간에 돌아다니는 것은 안 되지만, 수업에 관련된 얘기를 조용히 하는 것은 허용한다”와 같은 식의 규칙들을, 학생들이 스스로 만들어 보는 것이다.

처음에 내가 “너희들이 스스로 규칙을 정하는 거다”라고 얘기하며, 그 취지를 설명했을 때 아이들은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믿기 어려워하며 반신반의 하는 눈치였다. 나는 “너희들이 합의하여 만드는 규칙이라면 철저하게 지켜주겠다”고 약속했고, 모둠별로 필요한 수업규칙을 만들어보라고 했다. 과정은 대단히 순조로웠다. 아이들은 생전 처음 해보는 ‘자치 규칙 만들기’를 처음에는 다소 어색해 했지만, 매우 의욕적으로 수업규칙을 만들었고, 반마다 서로 다른 수업규칙이 완성되었다.

학생 A: 수업 시간에 조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대놓고 자는 것은 안 되니까, ‘조는 것’은 허용하고, 그냥 엎드려 잘 때에는 벌을 받도록 하면 어떨까요?
학생 B: ‘조는 것’과 ‘자는 것’은 구별하기가 너무 애매할 것 같아요. 그냥 자다가 걸리면 무조건 팔굽혀 펴기 20번 하기 해요.
학생 C: 그건 너무 힘들어요. 그것 보다는 그냥 뒤에 나가서 잠이 깰 때까지 서 있다 들어오는 걸로 합시다.

학생 D: 저희 모둠은 ‘수업 시간에 교과서를 가지고 오지 않으면 뒤에 나가서 서 있어야 한다.’는 규칙을 만들었습니다.
학생 E: 에이, 그건 너무 약하지 않을까?
교사 : (속으로) 얘들아, 그럴 필요까진 없을 것 같은데…

이런 식으로 여러 가지 얘기들이 왁자지껄 오가며 우여곡절 끝에 반별 수업 규칙으로 완성되었다. 나는 이를 컴퓨터로 정리한 뒤 인쇄하여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나도 교과서 맨 앞에 붙여놓았다.

‘학생들이 스스로 규칙들을 만들고 지킨다.’는 생각에 나는 무척 고무되었고, ‘이것이 생활지도의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까지 하며 무척 기뻐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생각은 한 달이 채 가기도 전에 쓰라린 실패를 맛보아야 했다.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가?

사실 우리 아이들이 만든 규칙들은 대부분은 이런 것이었다.
“떠들어서 2번 이상 걸리면 팔굽혀펴기 50번 한다!”

아이들이 규칙을 만들면, 자신들에게 편하고 유리하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아이들은 철저하게, ‘벌’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그 이상을 상상해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아이들에게 “규칙은 곧 벌”이며, 말을 안 들을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체벌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정규교육과정을 정상적으로 밟은 나 또한 결코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나의 생각은, 일방적인 채찍 대신에, 아이들이 스스로 ‘지킬 수 있는 규칙’을 만들고, 또한 ‘스스로 지켜나가길’ 바랐던 것이다. 사실 나는 체벌을 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그 모든 규칙을 행사할 ‘책임’을 ‘교사’에게 전가했다.

“선생님, 쟤 지금 떠들었어요. 빨리 팔굽혀펴기 50번 시켜요.”
“선생님, 쟤도 떠들었어요. 쟤는 왜 팔굽혀펴기 안 시켜요?”

즉, 나는 스스로 규칙을 만들고 실천할 권리를 학생들에게 주었지만, 학생들은 결국 교사에게 고스란히 그 권리를 돌려주었다. 결국 기존의 패턴을 그대로 유지한 것이다.

그리고 사실 나 자신은 “체벌”이라는 방식을 사용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그러면서도 체벌에 대한 구체적 대안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그러니 규칙이 도중에 흐지부지 된 것은 당연지사(當然之事)일 밖에. 이 방법이 실패한 이유로 과정상에 오류를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지적할 수 있다.

첫째, 나와 아이들이 함께 지켜나가야 할 규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의견을 전혀 반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만약 내가 지키기 힘든 규칙이었다면 아이들이 설사 원한다 하더라도 규칙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규칙은 ‘아이들의 규칙’일 뿐만 아니라, ‘나의 규칙’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 규칙을 내가 받아들일 수 없었다면, 나도 받아들일 수 있는 다른 대안을 마련했어야 했다. 또는 그 논의 과정에 나도 함께 참여하여, 나의 의견도 학생들과 함께 토론하였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둘째, 내가 체벌과 같은 방식의 규칙이 아닌, 전혀 다른 차원의 규칙을 만들고자 한다는 점을 아이들에게 충분히 전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 당시에는 이런 의식이 아주 확고하지 못한 상태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아이들과 나 사이에 충분한 공감대 없이는 결국 기존의 패턴을 반복하는 데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었을까? 왜 이런 문제들을 미리 예측하고 좀 더 나은 방식으로 규칙을 만들지 못했을까? 경험의 부족을 탓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좀 더 근본적인 인식의 차이가 이러한 오류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무의식적으로 아이들을 ‘의사소통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랬기 때문에 ‘나’ 자신 또한 아이들과 의사소통하는 주체로서 자리매김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의사소통의 주체로 아이들을 받아들인다는 것

언젠가 버스에서 이런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다. 여느 때처럼 한가한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데 한남동 부근에서 한 외국인 부자(夫子)가 버스에 올라탔다. 아버지가 차비를 치르는 동안 11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들은 버스 두 번째 칸에 냉큼 올라앉았다. 미국인 아버지는 돈을 치르고 아이를 보더니 앞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앞자리(바퀴가 불쑥 솟아있는 버스 맨 앞자리)에 앉으면, 다리를 올려놓을 수 있어서 더 좋을 것 같은데 앞으로 오지 않겠니?”

아버지의 말에, 아이는 귀엽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No”하고 대답했다.
“그러면 버스가 흔들릴 때 넘어질 수도 있어. 그래도 괜찮겠니?”
“(창틀을 잡으며) 이걸 잡으면 넘어지지 않을 수 있어요. 여기가 더 좋아요.”
“그래? 그걸 잡으면 정말 괜찮겠니?”
“네.”
“그렇다면 좋아. 거기 앉도록 해라.”

이런 대화가 오가곤, 아버지는 아이 뒷자리에 앉았다. 버스가 심하게 흔들리자, 아이는 창틀을 꼭 잡고는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냥 작은 감탄사까지 터뜨리며 즐거워했다. 아버지는 혹시 아이가 넘어지지 않을까 조금씩 살필 뿐, 조용히 버스를 타고 목적지로 향했다.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이 짧은 순간이 나에게는 선명한 사진처럼 남아있다. 왜냐하면 이는 사실 한국사회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부모와 자식 간의 ‘합리적인 대화’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이럴 때에 우리네 버스의 일반적인 풍경을 한 번 상상해보자.

부모: (앞자리를 가리키며) “저기, 앞자리에 앉아”
아이: “싫어요.”
부모: “얘가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빨리 가서 앉으라면 앉아.”

부모는 강제로 아이를 잡아당겨 앞자리에 앉히려고 하고 아이는 가지 않겠다고 칭얼거리며 옥신각신 신경전을 벌인 끝에, 아이는 입이 부루퉁 나와서 앞자리에 앉거나, 아니면 아이가 승리하고 부모는 아이를 데리고 버스에 타는 것조차 전쟁이라고 생각하며 지친 한숨을 내쉴지도 모르겠다.

“우리 아이들은 왜 이토록 ‘말이 통하지’ 않을까?” 규칙 만들기에 실패한 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무척 괴로웠다. 말로 해서 알아듣고, 대화해서 해결한다면 얼마나 좋겠냐는 말이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다시 나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혹시 나 스스로 이미 “아이들은 말이 통하지 않아”라는 편견에 빠져있는 것은 아닌가? 또 그런 편견을 가진 채 대충 몇 번의 대화를 시도하고, 그러고는 쉽게 포기하면서 나를 합리화시켜버린 것은 아닌가?

상대방을 진정한 의사소통의 주체로 인식한다는 것은, 곧 “상대방을 존중한다”는 뜻이다. 즉, 상대방을 나와 동등하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그런 전제 아래에서만 합리적인 대화가 가능하다. 그러나 둘 사이에 권력관계가 작동할 때는, 어떠한 솔직한 대화도 기대할 수 없다. 나는 다만 명령할 뿐이다. “조용히 해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의 권력을 이용하여) 너를 벌하겠다.”

버스에서 본 외국인 아이와 아버지의 대화를 목격하고 내가 놀란 또 하나의 이유는, 대화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 말투와 분위기였다. 마치 어른끼리 대화하듯, 너무나 자연스럽게 합리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서, 나는 ‘어른’과 ‘아이’라는 권력관계를 찾을 수 없었다. 부자(夫子)라는 관계 이전에 ‘인간’ 대 ‘인간’으로서 서로의 욕구를 존중하고, 서로가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함께 해결방법을 모색-버스가 흔들릴 때 창틀을 붙잡고, 위급한 순간 내가 아이를 지켜볼 수 있다면, 별로 위험하지 않다-할 수 있다는 것. 여기서 내가 규칙을 만들고 실패했던 것을 극복할 수 있는 열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실험은 계속된다

한 번의 실패를 경험했지만, 내년 3월이 되면 나는 다시 학급규칙 만들기를 시도해볼 생각이다. 나의 욕구와 아이들의 욕구가 만나는 지점을 솔직하게 나누고, 그 속에서 함께 머리를 맞대고 대안을 만들어갈 수 있는, 성숙한 ‘주체’로서의 아이들과 함께 말이다.

덧붙여) 내가 시도했던 학급 규칙 만들기는 호주의 빅토리아 초등학교에서도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고등학교’에서도 상상하기 힘든 일이, 외국에서는 초등학교 때부터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그러한 차이는, 결국 나중에 이 사회 전체의 자율성과 합리적인 의사소통 수준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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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신정아 2005/01/23 [17:44] 수정 | 삭제
  • 물론 아이들에게도 이를 알린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아이들이 직접 교사와 함께 만든 수업규칙입니다.
    함께 완성된 수업규칙은 교실 앞에 게시하고, 지켜나가는 것이지요.
    아무 의미없는 교훈이나, 지극히 강제적인 교칙과 비교해보면, 참 많이 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얘기는 <중학교 1학년을 위한 우리말 우리글>과
    <교사역할훈련>(토머스 고든, 양철북)을 참고하시면 좋습니다.^^
  • 균형 2005/01/21 [20:05] 수정 | 삭제
  • 존중을 받아본 사람만이 존중이란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안다고 생각합니다.

    존중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야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방법을 알게 되는 것이죠.
  • 프랜드 2005/01/19 [22:49] 수정 | 삭제
  •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 tei 2005/01/18 [16:51] 수정 | 삭제
  • 얼마나 어려운 일일지 짐작이 가요. 충분히..
    아이들이 마음대로 되어주지 않는 건 당연하죠.
    체벌 문제만 해도 교사들은 학생들이 체벌을 원한다고 얘기하게 되는게..
    실제로 그런 면도 있으니까요.
    교육현장에서 아이들을 주체로 인정하고 키워내는 일이 쉽지 않겠지만..
    나중엔 보람있는 일일 거라고 생각해요.
  • 독자 2005/01/18 [00:39] 수정 | 삭제
  • 저런 내용을 교사들에게만 알리는 건지 모르겠지만, 급훈, 교훈 이런 것보다 저런 수업수칙을 학생들에게 알려주고, 걸어놓는 게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생들이 스스로 학습권에 대한 인식을 할 수 있게 도움이 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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