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 그녀는 톡톡 튀는 아이는 아니었어도 매력이 있었다. 만화를 좋아하고, 그로테스크한 표정을 잘 지었던 그 아이. 한 번은 반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라고 했더니, 앞에 나가 칠판 쪽에 몸을 기댄 채 낮은 목소리로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를 불렀다. 꽤 그럴 듯 했다.
우리가 당시에 얼만큼 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서로의 성격과 개성을 인정해주는 사이였다는 건 분명하다. 그리고 우린 고등학생이 되었다. 서로 다른 학교에 입학했는데, 어느 날 고등학생이 된 그녀가 내게 편지를 보내왔다. 그 애가 내게 편지를 보내다니, 이전엔 한 번도 편지가 오간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의외였다. 두 장의 편지지에 적힌 글자들은 여러 가지 정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긴 했지만, 그 애가 내게 편지를 보낸 이유는 하나였다. 같은 반에 무척 예쁜 여자애가 한 명 있는데, 그래서 남자애들한테 인기가 대단하다는 거였다. 문제는 자신도 그 애를 좋아한다는 거였다. 그 앨 보면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리고 진땀이 다 난다고 했다. 편지지에는 또 이렇게 적혀있었다. “나 레즈인가?” 농담조로 말하는 듯 했지만, 당시에 나는 ‘레즈비언’란 말을 써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무척 놀랐다. 나는 놀라면서도 한편으론 그녀의 솔직한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그녀가 왜 내게 편지를 보냈는지 알 것 같았다. 이런 얘기 할 상대가 나밖에 없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십 년 가까이 흘러 내가 직장인이 되었을 때 그녀로부터 연락이 왔다. 인터넷 때문에 나의 이메일 주소를 알게 된 것 같았다. 나 역시 살면서 가끔 그녀가 떠오른 적이 있었는데, 그래서 중학교 졸업앨범을 뒤적이기까지 했었는데, 안타깝게도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잠시 생각만 하다 말았었다. 그녀로부터 메일을 받고 이렇게 인연은 이어지는 거구나 싶었다. 그 애는 서울에 살지 않았는데 나를 만나러 주말에 종로 쪽으로 나왔다. 약간 흥분된 상태로 그녀를 만나기로 한 장소에 나가 서성이며 사람들을 쳐다보던 나. 몇 미터 앞에서 내 쪽으로 향해 오는 사람은 그러나 나의 기억 속 그녀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글쎄 뭐라고 말해야 할까. 그로테스크는커녕 너무나… 너무나 “노말”한 이미지였다. 얼굴형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데도 애써 머리를 길어 넘긴 모습이나, 고지식한 화장법, 자신감이 없어 보이는 눈빛. 그 때 눈치를 챘어야 했다. 차를 마시다가 그녀는 내 손가락에 있는 반지를 목격했다. “누구야? 어떤 사람이야?” “어…” 그녀를 만나는 것이 기대됐던 이유 중 하나는 나의 사랑에 대해,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나의 연애관계에 대해 그녀에게라면 솔직하게, 재미있게,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자신이 ‘레즈’인지 고민을 했던 그녀. 십 년이나 지나 만난 거지만 그녀라면 나란 사람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나는 망설였다. 너무도 다른 느낌을 주는 그녀 앞에서, 십 년 만에 보는 사람 앞에서, 갑자기 커밍아웃을 한다는 건 아무래도 좀… “왜 말을 못해, 혹시 유부남이야?” “어린 애야?” “외국인?” 아마 계속 추정을 해보아도 그녀의 입에선 내가 사귀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답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 때만해도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 대해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기 싫었으니까 말이다. “남자가 아니야.” 그 후론 어떻게 시간이 흘렀나 모르겠다. 기억 나는 건 그녀가 너무나 큰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는 것과, 그녀가 들고 있던 잔에서 음료가 쏟아져 나와 닦아내야 했다는 것, 그리고 그녀의 시선이 끔찍한 물체를 바라보는 듯했다는 것 정도다. 그녀를 배웅하면서 ‘또 연락하자’는 식의, 내 입에서 나온 인사성 멘트가 그렇게도 가식적일 수 없었다. 그녀와 헤어지고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하고 불쌍해 보였기 때문에 한동안 풀이 죽었다. 그리고 한 일주일쯤 지나서야 나는 내가 그녀에게 몹시 화가 나있다는 걸 알게 됐다. 너 예전에 내게 보낸 편지 기억 못하는 구나, 편지만 아니라 당시의 너를 기억하지 못하는 거겠지, 한 여자친구 때문에 가슴이 뛰어 수업도 못 듣겠다던 너의 고백을 나는 우습게 여기지도, 무섭게 여기지도 않았었는데…. 너는 나의 고백을 듣고 이렇게 외마디 소리를 내질렀지. “너 어떻게 그럴 수가…” 그러나 정작 그 말을 해야 할 사람은 나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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