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만화 독자들을 위한 잡지 <오후> 창간

적당히 세련된 감성에 호소하기

김윤은미 | 기사입력 2003/05/26 [01:01]

여성만화 독자들을 위한 잡지 <오후> 창간

적당히 세련된 감성에 호소하기

김윤은미 | 입력 : 2003/05/26 [01:01]
나이 들어(?) 아쉬운 순정만화 독자들을 위한 잡지 <오후>(시공사)가 발간되었다. 발간 계획이 알려지면서부터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것은, 적당히 흥미로우면서도 작가주의적 성향이 있는 작품들이 연재되는 순정만화 잡지에 대한 목마름 때문일 것이다. 재작년 <나인>이 폐간된 이후 순정만화잡지 시장은 저연령 독자들을 대상으로 재편성됐고, 온라인 만화연재 사이트들은 대부분 제 구실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괜찮다 싶은 만화를 기다렸던 독자들에게 <오후>는 더욱 반가운 것.

작가주의적 무거움 덜어내

‘오후의 홍차처럼 그윽한 만화’를 캐치로 내세운 <오후>. 아무래도 폐간된 <나인>과 비교하게 된다. 잡지 컨셉 면에서 유사한 측면이 있으며 현 <오후> 편집장 강인선씨가 <나인>편집장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기도 하다. 97년 <나인> 창간 당시 순정만화는 시장규모나 작품의 질적인 면에서 전성기를 맞이했으며 그런 면에서 <나인>은 순정만화에 대한 자부심의 결과물과도 같았다. ‘나인’의 뜻 자체가 만화가 제 9의 예술로 일컬어진다는 데서 따왔으니까. <나인>은 예술로서의 만화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 장르에 얽매이지 않는 순정만화를 제시해야 한다는 점 등 여러 가지로 그 어깨가 무거웠다. 그래서 <나인>의 색채는 때로 과도하고 무겁게 느껴지기도 했다. 양영순처럼 남성중심적 섹슈얼리티가 농후한 작가의 작품이, ‘파격적’이란 이유로 연재된 것이 그 예다.

몇 년이 지난 지금, 만화시장은 더욱 축소되었고 순정만화계는 10대 초반 독자들을 대상으로, 단선적인 면모가 강한 작품이 주를 이루고 있다. <오후>는 이같은 어려움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권신아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일러스트가 돋보이는 표지와 깔끔한 책 디자인은 <오후>의 전략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적당히 세련되고 고급스런 감성에 대한 호소가 그것이다. 권신아의 일러스트는 세련됐지만, 도발적이지는 않다. 참고로 나인의 표지는 흑백 톤에 여자 두 명이 달려가는, 당시로서는 매우 도발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작가진을 살펴보자. <오후>는 <나인>의 작가주의적 무거움을 덜어낸 대신 톡톡 튀는 맛은 없다. 주로 90년대 새롭게 등장한 ‘괜찮은’ 작가들이 대부분. 유시진, 권교정, 나예리 등 이들은 대중적으로 소화 가능한 자기만의 세계들을 그려왔으며 열렬한 팬들이 있지만 천계영처럼 대박을 터트리지는 않은 작가들이다. <오후>를 산 독자들이라면 오랜만에 유시진과 권교정을 만나 반가울 것이다.

권교정의 '마담 베리의 살롱'은 중기 바로크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돈 벌기 위해 총사가 되겠다고 길을 떠나는 미소년 풍 분위기의 여자 에필이 주인공. 권교정표 유쾌함이 여전하다. 유시진의 '온'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연재 중단 이후 간간이 발표한 단편들의 연장선상에 놓인 작품으로 보인다. 판타지 소설가 하제경은 일러스트레이터 이사현의 동화책을 보고 이유없이 눈물을 흘린 후 그의 팬이 되어 무작정 이사현의 집을 찾아간다. '온'이 설정한 세계관 - 물질적인 세계와 마음의 미묘한 작용으로 구성된 세계- 흥미로우나 인물 캐릭터들이 밋밋하게 다루어져 있어 아쉽다.

무난하게 볼 만한 잡지

권교정이나 유시진처럼 은근히 많은 호응을 얻는 일본 작가들의 작품도 있다. <서양골동양과자점>의 작가 요시나가 후미의 '사랑해야 하는 딸들'과 이제 단행본 10권을 넘어 지루한 감이 없지 않은 이마 이치코의 <백귀야행>은 제 몫을 한 듯 싶다.

그 외 눈에 돋보이는 작품은 송채성의 '미스터 레인보우'이다. 밤에는 게이바, 낮에는 유치원 교사로 일하는 주인공이 자신과 같은 성정체성을 지닌 어린 소년 강민과 강민의 성 정체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완고한 할머니 사이의 갈등을 푸는 내용이다. 손자를 걱정하는 할머니의 눈물로 대표되는 송채성의 휴머니즘은 소박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사회적 차별 문제를 무겁지 않게 풀었다는 점에서 나쁘지 않다.

이빈의 'HerShe'나 이시영의 '공상과학전기'의 경우 다른 순정만화 잡지에서 볼 수 있는 정도의 무난한 작품. 한승희의 'Welcome to Rio'는 '연상연하'에서 보여준 성인들의 사랑에 대한 리얼한 맛이 그대로 살아있지만, 이야기 자체는 그렇게 극적이지는 않다. 석동연의 '말랑말랑'은 참으로 귀여운(!) 4컷 코믹물.

23일 발간 이후 <오후> 사이트(www.owho.co.kr)에는 오랜만에 순정만화에 대한 '목마름'을 해소했다는 독자들의 호응이 쏟아지고 있다. 독자들의 호응 이상으로 <오후>와 같은 잡지가 중요한 것은 작가들에게 자신이 그리고 싶은 작품에 맞는 매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오후>에 작품을 그리기 시작한 작가들의 공통적인 소망대로 <오후>가 지속적으로 발간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마도 격월간 발행이고, 그 나이 독자들의 선택지가 <오후> 밖에 없기에 창간호 정도의 수준을 유지한다면 지속적 발간은 어렵지 않아 보인다. 덧붙여 나이 든 여성독자들에게 어울리는, 여성들의 일상을 포착한 신선하고, 탁월한 작품들이 더 나오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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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디 2003/05/26 [15:52] 수정 | 삭제
  • 나인의 그 표지-박희정님이 그리신-, 그 그림 처음 보자마자 매혹되었었어요. ㅠ.ㅠ
    95년도쯤 첨 나온 준성인지 종류들이 그립네요. 그 때도 물론 지혜안님처럼 성폭력을 사랑으로 미화하는 만화들이 실리긴 했지만.=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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