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사귀던 사람들과 커플링을 해본 적이 없다. 고등학교 졸업 후부터 계속 애인이 있어왔지만 그 동안 사귀던 사람들과는 커플링을 할 상황까지 교제가 계속되지 않았던 이유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 이목 때문에 일부러 하지 않으려 했던 이유도 있다. ‘친구’처럼 보이는 두 여자가 같은 모양의 반지로 커플링을 하고 다닐 때 고스란히 받게 되는 불쾌한 ‘의심’의 눈초리를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평소 반지나 목걸이 같은 장신구를 하지 않던 내가 어느 날 갑자기 반짝거리는 반지를 끼었을 때, 부모님이 의아하게 생각하고는 무슨 반지냐고 물으실 텐데 이런 때 거짓말을 해야 하는 상황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물론 보다 능청스럽게 친구들끼리 우정 반지를 했다던가, 그냥 지금부터 나를 꾸며볼 생각이라고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꼭 그렇게까지 이것 저것 숨기면서 살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지금 사귀는 애인과는 (나름의 각오나 마음의 준비를 해야만 하는) 커플링을 하고 싶었다. 동성애 정체성을 인정하고 산 지 어언 7년을 달리고 있는 중이며, 점점 불편한(혹은 불편할) 시선을 견딜 자신감이 생겨나고 있다고 생각됐다. 또 이런 정도의 ‘거짓말’은 충분히 꾸며낼 수 있을 만큼 호모포비아 사회에서 이미 능숙한 ‘거짓말쟁이’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애인과 처음으로 커플링을 하러 쥬얼리 가게를 둘러보러 가게 됐다. 그런데 애인과 둘이 가서 커플링을 고르는 우리를 가게 주인이 어떻게 대할지 좀 걱정이 됐다. 시간대나 날을 달리 해서 따로 반지를 둘러보고 결정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할 지 난감했다. 그래서 우린 조금 인상 좋게 보이는 주인이 있는 가게를 골라 들어갔다. 쭈뼛쭈뼛하며 들어서서 조용히 반지를 보고 있는 나와 애인에게 주인 아주머니가 “커플링 보세요? 요즘은 이게 잘 나가요. 이것도 괜찮고 저것도.” 속으로 얼마나 놀랐는지, 주인은 여자 둘이 와서 커플링을 하려는 것이 아무렇지 않게 느껴지나 싶었다. 혹시 우리 둘 중 하나가 남자로 보이나 해서 가게 안 거울로 비춰볼 정도였다. 아무렇지 않게 우리를 대하는 아주머니가 내겐 신기할 노릇이었다. 그래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반지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다른 가게도 둘러보기로 했다. 애인과 나는 나오자마자 마주보고 멋쩍게 웃었다. 애인도 나처럼 놀랐나 보다. 조금은 마음 편하게 바로 옆 가게로 들어섰다. 그 가게 주인 역시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커플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두 군데 가게를 더 둘러보고서 커플링을 맞췄다. 다른 레즈비언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원래 그 거리 쥬얼리 가게 주인들은 아무렇지 않게 반지를 판다고 했다. 세상이 좋아지려는 징조일까, 순간 생각했지만 쓴웃음 지을 수밖에 없었다. 진심은 그게 아니지만 그저 반지를 팔기 위해 우리를 자연스럽게 대한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내쫓기지 않았고 욕을 먹은 것도 아니고 예쁜 커플링을 끼고 있으니 좋았다. 얼마 뒤 애인과 지하철을 타고 가는 중에 일어난 일이다. 기분 좋게 애인과 함께 있는데 옆에 앉은 또래 여자가 내 손의 반지와 애인 손의 반지를 노골적으로 번갈아 보며 아주 이상한 눈빛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 사람에게서 따가운 눈초리와 비웃음을 느낀 애인은 지하철에서 내리고 나자 기분이 좋지 않았다고 말했다. 반지를 고를 때는 괜찮았는데 정작 이런 상황을 예상치 못했다. 아니 예상했던 일이지만 쥬얼리 가게에서의 예상치 못한 ‘환대’로 잠시 착각과 망각을 했던 모양이다. 잠시 잊었던가. 내가 레즈비언이라는 것, 내가 사귀는 사람이 동성이라는 것. 이런 나를 사회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나의 정체성과 사회에서의 위치를 깨닫게 될 때마다 정말 서글프다. 이성애자들이 커플링을 서로 자랑하는 것처럼 커플링이 차라리 ‘염장’으로 여겨진다면 나을 텐데, 애인과 나를 ‘변태’ 혹은 ‘우습거나 신기한 존재’로 만든다는 건 정말 유쾌하지 않은 일이다. 몇 년 전 한 음료광고 카피가 떠오른다. “우리 그냥 사랑하게 해주세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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