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4일자 MBC 뉴스데스크의 “칼슘약, ‘아들 낳는 약’ 둔갑”이라는 제목의 보도를 보면서 저널리즘에 윤리성과 인권의식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됐다. “현장출동”을 통해 고발된 이날 보도의 주요 골자는 평범한 칼슘제를 아들 낳는 약이라고 속여 파는 약국들이 성업 중이라는 것이었는데, 의학전문기자가 취재했다고 한다. 아들을 낳으려면 이 약과 함께 “비싼 철분제까지” 먹고, “보통 6개월에서 1년까지 장기 복용해야” 효과가 있다고 하는 약사의 멘트가 끝나고, 이 약을 1년 넘게 장기간 복용했다는 “딸 하나를 두고 있는 30대 여성”이 피해자로 인터뷰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그건 약이 아니었고, 어떻게 보면 거의 구세주라고 해야 될 것 같아요. 그 약 자체가 저한테는…” “(기자가 이어서 말한다) 그러나 오씨는 또 딸을 낳았습니다.” “(피해여성이 또 이어서 말한다) 아들을 낳고자 하는 그 엄마들의 마음을…” 멘트만 봐서는 “아들을 낳고자 하는 그 엄마들”이 “일부 약국들의 얄팍한 상술”로 인해 피해를 입었고, 그런 과학적 근거도 없는 약에 의존해 아들을 낳으려고 한다는 “우리 사회 뿌리깊은 남아선호사상”이 문제다. 그러나 이 멘트가 나갈 때 보도되는 장면을 보면 MBC의 보도자체가 당혹스럽고 불쾌하다. 어머니가 ‘그 약이 구세주’라고 언급할 때도, 기자가 “그러나 오씨는 또 딸을 낳았습니다”고 말할 때도, 그 여성이 화면에서 사라질 때까지, 함께 옆에 소파에 앉아있는 남편은 태어난 지 얼마 안돼 아직 말도 하지 못하는 딸을 안고 있다. 딸은 엄마가 말할 때, 물끄러미 쳐다보기도 하고 인상을 찡그리기도 하지만 아빠 품에 안겨 낯선 카메라 앞에서도 얌전히 앉아 있다. 그리고 이 아이의 사진과 또 다른 딸의 사진도 잠깐 보여진다.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나이라고 하지만, 태어나자마자 ‘원치 않은 딸’로 부모에게 낙인 찍힌 아이는 카메라를 통해 만인에게 공개됐다. 부모가 아들을 원해서 임신 기간 중에 어머니가 비싼 약까지 사서 먹었는데 그 기대를 어기고 또 태어난 딸로서 말이다. 즉 딸의 태생은 ‘약국들의 사기행각의 결과’인 셈이다. 기자가 마지막 멘트로 날리는 것처럼 “우리 사회 뿌리깊은 남아선호사상”으로 점철된 부모들의 의식이 문제다. 그러나 이런 사회 문화와 문제를 지적하고 고발하는 기자들에게도 보다 사려 깊을 것과 저널리즘의 윤리성이 요구된다. 기자들의 편의에 의해, 대립되는 이미지로 극화된 그림을 만들어내기 위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없거나, 저항하지 못하는 약한 대상이 인권침해와 폭력에 노출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자들은 더욱 민감한 인권의 촉수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진매체나 영상매체에서 한 카메라 안에 동시에 담길 수 없는 장면을 담기 위해 연출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연출이 어떤 경우에는 인권침해를 부를 수도 있고, 살아있는 피사체의 경우에는 대상화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특히 죽은 사람, 큰 고통을 당한 사람들, 경제적으로 취약한 계층, 인권침해에 대한 개념이 다소 부족한 사회 사람들, 어린이, 장애인, 노약자, 야생동물이나 동물원에 갇힌 동물 등은 특히 카메라가 선호하는 대상들이다. 카메라에 의해 선호되는 만큼이나 이들은 카메라 앞에서 취약하다. “그렇게 찍히기 싫다”고 말할 능력도 없고 이후 초상권 침해로 대응할 수도 없는 취약한 집단의 대상들이, 찍는 사람으로선 손쉽다. 또한 저널리스트들의 시선을 끄는 제3세계나 소위 "못사는 나라" 사람들의 모습도 카메라에 의해 대상화되어 구경거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이런 손쉬운, 그러나 윤리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저널리즘의 관행은 계속되고 있다. 특히 대상이 항변할 수 없는 상황인 경우에는 더욱 쉽게 일어날 수 있다. 문제의 보도로 돌아가면, 약사의 사기로 인해 장기간 비싼 약을 복용한 부모는 스스로 카메라 앞에 나와서 ‘속았다’며 피해자로서 약국을 고발할 수 있다. 그러나 아이는? 말을 하지 못하는 아이는 그 상황에서 인격이 침해되고, 피해를 입었다손 치더라도 어떤 항거도 할 수 없다. 장기간 ‘아들 낳는 약’을 먹었는데도 ‘또 딸을 낳았다, 봐라!’하며 사기피해 증거물로 딸을 화면 앞에 들이대는 부모의 행위 앞에선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가 그 장면에 굳이 들어가지 않아도 거짓으로 인한 피해사례를 고발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항거할 수 없는 취약한 아이를 등장시켜 일종의 ‘그림’을 만든 기자 또한 아동학대와 인권침해 소지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시청자들은 한편으론 남아선호사상이 부른 우리 사회 일그러진 모습에, 또 한편으론 저널리즘의 윤리성이 결여된 현장에 노출된다.
이 기사 좋아요
<저작권자 ⓒ 일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언론 관련기사목록
|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