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day 5”
“FM대로 해라.” “어제 미팅에 폭탄이 나왔더라.” “내가 총대를 매겠다.” “하루 종일 삽질했다.” “파이팅!” 일상 속에서 흔히 쓰는 말들이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일상용어들이다. 그런데 이 말들이 모두 군사용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일이 있는 날'을 지칭하는 ‘D-day’는 군사작전계획상의 ‘공격예정일(Demobilization Day)’의 약자다. ‘교과서, 정석’의 의미를 갖는 ‘FM’ 역시 ‘야전교법(Field Manual)’의 약자다. ‘헛수고 한다’는 의미의 “삽질한다”는 군대에서 불필요한 일을 시키는 것에서 기인하며, ‘책임진다’는 의미의 “총대 맨다”, ‘당번, 하찮은 일을 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따까리’, 재수하지 않은 대학생을 일컫는 ‘현역’ 등도 군대에서 흔히 사용되는 말들이다. ‘힘내라’는 의미의 ‘파이팅 Fighting’ 역시 ‘싸우자’는 군사주의적 용어다. 심지어 언론에서조차 군사 용어를 거리낌 없이 사용한다. 평화를만드는여성회 김엘리 정책위원장은 ‘군사주의, 여성, 탈군사화를 위해서’라는 글에서 “국민들 스스로 행복했다고 말하는 월드컵 경기에는 전쟁이 진행되고 있었다”면서 월드컵 기간 언론의 보도행태를 꼬집었다. “한국의 4강 진출은 ‘징기스칸이 유럽을 징벌했던 것처럼 이제는 한국이 유럽을 점령하는 순간’으로 이해되고 있었다(SBS). 한국대표팀 선수들은 어느 새 ‘태극전사’가 되었고, 축구경기는 세계의 제패를 향한 전쟁이었다. 골이 빗나간 것은 ‘방아쇠는 당기는데 조준이 안 되는 일’이었고, 경기 승리는 ‘무적함대를 격침시킨 대첩’이었다. 또 하나의 흥미로운 예는 히딩크의 출신국가인 네덜란드가 6.25남북 전쟁 시 유엔군으로 참여한 국가라는 점에서 ‘혈맹’이라고 표현되고 있다(MBC)는 점이다.” 전쟁에 대한 암묵적 지지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언어 중 상당수가 군사용어다. 우리가 이렇듯 자연스레 쓰는 ‘군사용어’는 단순히 언어의 문제일까.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는 명제를 상기해본다면 그리 간단한 문제만은 아니다. 이런 군사용어를 일상에서 접하고 사용함으로써 숨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레 ‘군사주의’를 내면화하게 되는 것이다. 무의식 중에 군사주의는 사회화된다. 여성학자 권인숙 씨는 ‘우리 삶 속에 군사주의’라는 글에서 “군사주의가 개인이나 조직, 사회운동, 그리고 전체 사회를 형성하는 데 끼치는 영향과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군사화는 핵심개념이다. 즉 군사화는 이념 또는 가치체계로서의 군사주의의 일상화, 사회화를 일컫는다”고 지적한 바 있다. 김엘리 정책위원장 역시 “군사주의의 사회화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속에 호전적인 가치가 스며있고, 의식하지 못한 사이 전쟁 준비 동원을 위해 어떤 일정한 방향으로 개인과 사회가 구성되는 것을 말한다”고 분석한다. 2001년, 911 사태 이후 곧바로 미국 부시가 보복전쟁을 선포했을 때, 미국인의 84%가 전쟁을 지지한다는 여론 발표가 전 세계를 경악케 했다. 이는 여론의 조작, 강대국의 민족주의 등 다양한 지점에서 분석이 가능하지만 미국인 개개인이 체화하고 있는 군사주의, 즉 ‘군사화’ 의 맥락에서 보다 세밀하게 설명할 수 있다. 이에 대해 김엘리 정책위원장은 “갈등이 발생했을 때, 이를 전쟁이나 폭력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경향성, 사회 정치 경제 문제를 군대나 군사적 힘에 의존하여 해결하려는 어떤 흐름이 우리의 삶 속에 있다” (‘군사주의, 여성, 탈군사화를 위해서’)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렇다면 이라크 전쟁 당시 잠잠했던 여론, 그리고 파병 논의 가운데 보여졌던 한국인의 전쟁 불감증도 ‘군사화’의 맥락에서 짚어낼 수 있을 것이다. “언제든지 군사적 대결로 치달을 수 있는 흐름과 동력이 내면화된 가치체계, 일상생활에서의 실천 없이 하루아침에 생겨날 수 없다”는 권인숙 씨의 말처럼 우리의 일상, 삶 세밀한 기저에 자연스레 깔린 ‘군사주의’가 전쟁에 대한 불감증, 나아가서는 전쟁에 대한 암묵적 지지를 형성했던 것이다. 이렇듯 무의식적인 일상의 사고를 지배하는 주요 기제는 ‘언어’다. 우리 안 군사주의 잔재 버리자 작년 한해 군사용어, 그리고 군사문화에 대한 문제제기는 대학가에서 활발히 일어난 바 있다. 연세대의 ‘안티 FM’ 운동과 부산대의 ‘새내기 환영 문화’에 대한 문제제기가 그것. 연세대에서 ‘안티 FM’ 운동을 함께 전개했던 이갈(2002년 연대 부총여학생회장)님은 “신입생이 들어오면 에프엠(FM)이라는걸 시킨다. 소리를 꽥꽥 지르면서 하는 일종의 ‘자기 소개’인데 그게 마치 대학문화, 놀이문화인양 보이지만 에프엠(FM) 자체도 군사용어고 그런 군사용어에 걸맞게 남성중심적으로 정형화된 군대 소개방식일 뿐이다. 큰 목소리, 딱딱하고 호전적인 말투, 큰 몸동작 등 이런 요소들이 미진하면 다시 할 것을 종용 받는 것이다. ‘안티 FM’ 운동은 여성들을 그 커뮤니티에서 주변인으로 만드는 대학 내 놀이문화, 군사문화에 대한 문제제기였다”라고 설명한다. 부산대 여성주의 웹진 <월장>의 별리 님은 “보통 예비대학이나 신입생환영회의 행사의 일환으로 치뤄지는 ‘간다게임’은 대개 새내기보다 한 학번이상 높은 선배가 조교가 되어 새내기에게 지령을 내리고, 새내기는 그 지령을 수행해야 하는 방식의 놀이다. 우리가 너무나도 일상적으로 받아들이는 ‘간다게임’의 모양새를 찬찬히 뜯어보면 완벽한 권위주의로 무장되어있다. ‘조교’가 지령을 내리고 지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시에는 벌칙을 받는 명령과 복종의 형식, 그것은 ‘군대’의 신병훈련소와 한치의 다를 바가 없다”고 말했다. “실시” “복창소리 봐라” 등 군대에서 쓰는 용어들이 대학 내 선후배간에 통용되며 이는 대학놀이문화 속에서 완벽히 재현되는 것이다. 이에 부산대 총여학생회에서는 대학 내 뿌리 박힌 군사문화(용어)에 대한 문제제기를 공론화하고 다양한 심포지엄과 강연을 통해 군사주의적 놀이문화와 그 대안에 대한 논의를 진행했다. 올해 한국여성민우회 여성노동센터 회원소모임 ‘여성주의인권위원회’는 일상 속에서 흔히 통용되고 있는 군사주의 용어들을 찾아내는 작업을 시도했다. 박봉정숙 민우회 여성노동센터 사무국장은 “이라크 전쟁 발발 시 회원들과 함께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싶었다. 전쟁이 단지 ‘거대하고 먼’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 속에서 일상으로부터 출발하는 군사주의 체득에 주목하게 됐다. 세미나를 진행하면서 추상적 담론, 이론보다 실생활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했고 강력하게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는 일상언어로부터 출발해야겠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하게 됐다”고 말했다. ‘여성주의인권위원회’ 오성민씨는 “평소 잘 인식하지 못했지만 우리 안에 자리잡은 군사주의 문화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상상 외로 평소에 인식하지 못했던 군사주의의 잔재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말하면서 “일상의 군사문화를 없애가는 작업은 전쟁을 막고 평화를 만들어가는, 작지만 소중한 실천”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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