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동물의 존재를 알리는 소설

어니스트 시튼의 <쫓기는 동물들의 생애>

김윤은미 | 기사입력 2006/06/27 [23:11]

야생동물의 존재를 알리는 소설

어니스트 시튼의 <쫓기는 동물들의 생애>

김윤은미 | 입력 : 2006/06/27 [23:11]
‘늑대왕 로보’ 등의 동물 이야기로 유명한 어니스트 시튼. 시튼의 이야기는 주인공이 동물이고 이야기가 간단하면서도 인상적이기에 동화책으로 자주 만들어져 왔다. 그러나 어느 책이건 동화책으로 변화되면서 이야기 자체가 달라지기 때문에, 동화책으로만 시튼의 이야기를 접하면 그가 전달하고자 했던 핵심적인 사항을 놓치게 되어버릴 수 있다.

<쫓기는 동물들의 생애>는 시튼이 남긴 동물 이야기들 가운데 하나다. 원래 화가가 되고자 했던 시튼은 유럽을 오가며 그림을 공부했다. 그러나 건강 문제로 정착했던 캐나다의 광활한 자연에 관심이 생긴 그는 아메리카 인디언들과 교류하는 등 서서히 진로를 바꾸기 시작한다.

때는 19세기 후반으로, 목축업의 번성과 함께 아메리카 대륙이 바야흐로 개척의 무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많은 사냥꾼들이 목축에 방해가 되는 늑대나 코요테 같은 야생동물들을 잡기 위해 뛰어들었으며, 그 가운데 힘이 세고 날렵해서 잡기 힘든 야생동물들은 두고두고 사냥꾼과 목축업자의 입에 오르내렸다. 한편 국립공원이나 동물원처럼 동물들을 가두어두고 사람들의 관찰 대상으로 삼는 장소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시튼 또한 처음에는 사냥꾼으로 야생동물의 세계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늑대왕 로보’에서 그가 직접 고백하듯, 로보를 죽인 뒤 시튼은 고귀한 생명을 없애버렸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한편 야생동물의 서식지를 해치는 인간들의 행위 자체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깨닫는다. <쫓기는 동물들의 생애>의 서문에서 시튼은 “내 가장 큰 소망은 해롭지 않은 야생동물들을 멸종시키는 일을 멈추게 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 즉 우리 곁에 있는 야생동물들 하나하나가 멸종 당하지 않을 권리, 우리 아이들도 보아야 하는 고유의 권리를 가진 고귀한 유산임을 굳게 믿고 있는 우리를 위해서 말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시튼이 야생동물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법은, 사실에 바탕하되 동물이 직접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픽션을 만드는 것이었다. 동물이 아닌 ‘사람’이 동물이 등장하는 픽션을 만들었다는 점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동물들의 생태에 대한 시튼의 정성 어린 관찰은 인상적이다. ‘참새 랜디의 모험’은 도시에 사는 참새 랜디의 이야기다. 랜디는 카니리아와 함께 키워진 까닭에 카나리아처럼 노래를 부를 줄 아는 참새로 자라난다.

우연히 거리로 풀려난 랜디는 야생참새들처럼 싸움을 배우고, 암컷 비디와 짝을 지어 둥지를 만들기도 한다. 시튼은 비디가 둥지를 만들다가 어처구니없이 죽은 뒤, 랜디가 다시 사람의 손에 의해 키워지는 과정을 담담하게 담아냈다. 인간의 삶을 동물에 비유하는 등의 오류는 거의 저지르지 않는다. 그래서 시튼의 글은 사람과 동물 사이에 존재하는 깊은 간극을, 사람의 입장에서 넘고자 했던 하나의 중요한 시도로 여겨진다.

‘큰뿔양 크래그’는 슬기롭고 강인한 큰뿔양 크래그와, 그를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냥꾼 스코티의 이야기다. 시튼은 큰뿔양 크래그가 연약한 어린 양에서, 어떻게 무리를 이끄는 강인한 양이 되었는지 그 과정을 자세히 그려나간다. 크래그는 어른 양에게 복종을 하고, 무리 내에서 지위가 위태로울 때는 그들과 거리를 두면서, 인간이 쓰는 연발 소총에 대한 경계심을 배우면서 어른이 된다.

사냥꾼 스코티는 크래그가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절벽과 절벽 사이를 지그재그로 뛰면서 절벽 아래로 내려가는 모습을 본 뒤, 광기에 사로잡혀 크래그을 꼭 붙잡아야겠다고 결심한다. 스코티는 허수아비를 만들어 크래그를 유인하고, 마침내 크래그을 죽인다. 그러나 스코티에게 남은 것은 자신이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감정이었다. 그는 죽은 크래그가 자신에게 복수를 할 것이라는 예감에 사로잡힌 채 외롭게 산다. 시튼은 양을 죽인 뒤 허무에 빠진 크래그를 통해 인간의 욕심이 헛된 것임을 이야기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도시에 살고 있으며 사람의 손길이 뻗지 않은 곳이 점점 줄어가는 현재, 야생동물의 권리는 낯설게 다가온다. 보다 편리한 인간의 삶을 위해 얼마나 많은 야생동물들이 사라졌을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그러나 지금도 야생동물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예컨대 산과 산 사이를 가로지르는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죽은 야생동물의 모습을 흔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천성산 도롱뇽의 생명을 지키려 했던 지율 스님의 행동이 사회적으로 별로 이해 받지 못하는 지금, 야생동물이 고귀한 존재임을 강조했던 시튼의 이야기는 새롭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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