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을 위해 몸을 내던지는 찰나의 미학

헌책방에서 만난 소설① <가면의 고백>

김윤은미 | 기사입력 2006/09/05 [16:04]

순간을 위해 몸을 내던지는 찰나의 미학

헌책방에서 만난 소설① <가면의 고백>

김윤은미 | 입력 : 2006/09/05 [16:04]
<매해 수많은 소설들이 서점가를 장식했다가 사라지고 있다. 과연 최신작이 지금의 우리에게 필요한 책일까? 책 중에서도 특히 소설의 경우 시간을 뛰어넘을수록 그 가치를 인정 받는다고 하지 않던가. 오히려 시간이 한참 지난 뒤 절판된 책들 가운데, 두고두고 볼만한 흥미로운 책들이 있을 가능성도 크다. 일다는 지금 시점에서 재음미해 볼만한 흔적을 지닌 오래된 소설을 발굴해 연재한다. -편집자 주>


미시마 유키오. 1970년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을 외치며 자위대를 선동했으나, 싸늘한 반응에 부닥친 미시마는 직접 할복을 거행한다. 죽음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는 찰나의 아름다움,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어우러진 순수미학을 사랑했던 작가로서 꽤 어울리는 죽음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가 언제인데, 전쟁의 추억을 잊지 못한 채 사태파악도 하지 못하고 ‘추한’ 죽음을 스스로 저질러 일본 우익의 레퍼토리를 강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곱지 못한 시선을 보내야 더 적격일 듯싶다. 실제로 미시마는 할복에 성공하지 못해 그의 연인으로 알려진 모리타가 칼을 휘둘렀으나 그것도 어설픈 나머지 실패했다고 하니, 현실은 죽음의 미학을 성취할 공간이 못 되는 모양이다.

이러한 군국주의적 이미지가 있으니 미시마 유키오라고 하면 우선적으로 거부감을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 혹은 그의 소설을 유명하게 만든 문체의 감각적 유려함에 반하면서도, ‘이래도 괜찮나’ 하는 검열을 행하게 될 가능성도 농후하다. 마치 바그너의 웅장한 음악에 반했다가, 나중에 그의 음악이 히틀러를 찬송하는 음악이었음을 알게 된 뒤 깜작 놀라게 되는 것처럼.

바그너든 미시마든 그 미학이 지닌 특징과 그것이 추구하는 삶이 무엇인지 안다면, 그 매혹적 양식에 반할 수 있을지언정 완전하게 동화되기도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의 초기 세계를 대표하는 자전적 소설인 <가면의 고백>은 미시마 자신의 동성애자로서의 성 정체성을 자각해가는 과정을 지루할 정도로 농밀하게 담아낸 수작으로, 초기작인 까닭에 미시마가 추구하는 미학의 출발점을 확인할 수 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이성의 눈에는 오욕으로 보이는 것이 감성의 눈에는 훌륭한 아름다움으로 보이다니, 과연 소돔 속에도 아름다움이란 것이 있는 걸까?”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한 대목을 맨 앞에 인용한 <가면의 고백>은, 시종일관 순수와 퇴폐와 추악함, 사디즘과 마조히즘이라는 대립되는 두 성질이 에로티시즘 안에서 공존하고 있다는 점을 주인공의 성장에 담아낸다.

주인공 ‘나’에게는 반생을 줄곧 괴롭혀 온 ‘기념비적인 영상’이 있다. 그것은 언덕으로 내려오는 젊고 아름다운 분뇨수거인 청년이다. 어린 ‘나’는 그를 보면서, 이 세상에 ‘얼얼한 어떤 종류의 욕망’이 있다는 것을 예감한다. 청년이 ‘나’를 유혹한 첫 번째 이유는 그가 착 달라붙은 바지를 입어 탄탄한 하반신을 드러냈기 때문이고, 두 번째 이유는 육체노동이 풍기는 ‘온 몸을 바치고 있다’는 비극적인 느낌 때문이다. ‘나’는 분뇨를 수거하는 그 반복적인 작업의 허무함과 청년의 육체가 지닌 활력이 눈부시게 혼합된 그 영상을 오래도록 잊지 못한다.

그 후로 ‘나’는 자라면서 성적 쾌감을 전달해주는 몇 가지 이미지와 이야기들을 만들어나간다. 가슴에 총을 맞고 쓰러진 서커스의 청년이나 추락하여 두개골이 쪼개진 곡예사처럼, 죽음과 탄탄한 육체가 결합했으며 공부라든가 지식과 같은 지성의 영역과는 거리가 먼 청년들의 이미지, 그리고 그런 젊은 청년을 끌고 와서 요리하여 먹는 섬뜩한 이야기들이 ‘나’의 정신세계를 지배한다.

특히 귀도 레니(Guido Reni)가 그린 ‘성 세바스찬’ 그림을 보며, ‘나’는 처음으로 ‘사정’한다. ‘성 세바스찬’ 그림에서 묘사된 세바스찬은 순교자로 설정되어 있긴 하나, 살이 탐스럽게 오른 그리스 조각상처럼 매끈한 미를 뽐낸다. 그를 찌른 화살은 그를 죽음으로 이끌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관능을 더욱 강조하는 역할을 맡고 있을 뿐이다. 같은 동기들에 비해 정제된 몸매를 갖추고 있었으며 ‘불량한’ 태도로 우월감을 과시했던 남학생 오우미에 대한 ‘나’의 첫사랑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진 사건이다.

그러나 남자라면 누구나 ‘여성의 나체’를 보고 싶어해야 한다는, 암묵적으로 제시된 문화적 성장 공식 속에서 ‘나’ 또한 여성에 대한 사랑을 욕망해야 한다고 믿게 된다. ‘나’는 ‘어떤 육체적 욕망도 품지 않은 채’ 여자를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이라고 가면을 쓰고 ‘정상성’을 자신에게 주입한다. 친구의 여동생인 소노코는 정상적인 인간을 연기하는 ‘나’의 연애 상대가 된다. 그러나 소노코와의 관계가 발전하면 할수록 ‘나’는 점점 더 뒤로 물러나며 연애에 책임을 지지 않는 우유부단한 남성이 되고 만다.

이러한 어긋남은 ‘나’가 연약한 자신의 몸을 부끄러워하면서 건강한 신체를 부러워하고, ‘우등생’이라는 딱지에 맞게 살면서도 내심 ‘악명’을 원했던 모순적인 태도와 일치한다. 소노코는 ‘나’의 머뭇거림 때문에 갑작스레 결혼을 행하지만, 결혼 후에도 ‘나’를 만난다. ‘나’는 소노코가 ‘나’에 대해 성적 욕망을 품고 있으며 자신은 여성을 결코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이제까지 쌓아 온 가면이 무너지는 상황과 대면한다.

<가면의 고백>에서 미시마는 ‘나’를 자극하는 상징과 이야기들을 솔직하게 묘사하고 있다. ‘나’의 욕망은 사드 백작처럼 이성애 이데올로기의 완벽한 붕괴에 도달하지는 않는다. ‘나’는 건강한 육체의 매력을 사랑할지언정 그 자신이 그러한 육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지나칠 정도로 의식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성적 쾌락은 금기를 완전히 넘어서지 않으며, 대상과 교감하지 못한 채 뒤틀린다. 이러한 뒤틀림은 많은 개인들의 욕망과도 일정 부분 교감한다. 누구나 성적 금기를 넘어설까 말까 망설이면서 머뭇거리는 모습을 지니고 있으니.

그리고 ‘나’가 이성애자 남성의 역할극을 수행하는 과정은, 누구나 이성애 사회가 강요하는 역할극을 잠재적으로 의식하며 성장하는 현실을 비추어볼 때 호소력을 지닌다. 소노코와의 연애에서 ‘나’가 느끼는 답답함과 억지스러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사랑이라고 ‘나’가 우기는 모습은, 청소년기에 흔히 겪는 감정의 미숙함과 더불어 사회의 강요가 개인의 내면에 어떤 낙인을 찍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이성애 사회의 실상을 폭로했다는 성과를 십분 인정하고 날 경우, <가면의 고백>이 추구하는 미학이 얼마나 가치가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다. ‘나’는 애초에 교감이 불가능한 대상을 욕망하며 ‘비극성’을 느낀다. 이 ‘비극성’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흔히 알려진 대로, 활짝 핀 상태에서 져버리는 사쿠라의 상징성을 빌릴 수도 있을 것이다. 미래는 없으며, 오로지 현재라는 이 순간을 위해 온 몸을 내던져 희생하는 찰나의 도취적인 미. 이러한 에로티시즘의 미학은 달콤한 노래를 속삭이는 이성애주의를 뒤집는 효과를 낸다.

그러나 상대방의 의사 같은 건 처음부터 무시해버리는 단선적, 획일적 에로티시즘은 순수미학에 해당될 테지만, 수많은 미학 가운데 단지 하나를 차지할 뿐이라는 주장을 이기기는 어렵다. 마치 포르노적 포즈를 취한 여성의 무표정함에서 ‘외설성’을 읽어낸다는 사진작가 아라키 노부요시의 미학만이 에로티시즘의 전부라고 할 수는 없는 것처럼. 순수미학도 그 종류는 여러 가지다.

모순을 품은 채 찰나를 향하는 이 단선적 미학은 그대로 정치에 적용된다. 미시마의 미학은, 천황을 정신세계의 정점에 모시고 그를 받들어 정신혁명을 하자는 식의 군국주의 정치관과 크게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 듯하다. 그의 미학은, 미래는 없고 과거는 죽은 것이니 오로지 현재에 전진하자는 폭력적 혁명관과 공통점이 있다. 수많은 아름다움, 그리고 수많은 현실의 다양성과 모순을 아예 지워버리는 것.

최근 미시마 유키오와 1960년대 일본의 학생운동 세력 가운데 하나였던 전공투와의 토론을 담은 책이 번역되어 관심을 부른 바 있다. 확실히 미시마는 기존의 권위를 부정하고 현재 그 자체만을 중시했다는 점에서 전공투 세력과 통하는 데가 있다. 그리고 미시마, 나아가 전공투 또한 현실을 단순화하는 이상주의를 극단적으로 몰고 간 결과 실패했다.

자신의 사상이 오히려 기성 우익 정치세력의 권위를 강화한 결과를 낳았다는 점은 미시마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얼마 전 미시마의 유족이 미시마의 게이로서의 성 정체성이 나타난 편지가 출간되는 일을 반대하는 유치한 소송을 걸었으며, 법원에서 엉뚱하게도 유족의 편을 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미시마 자신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그 정도의 소송 결과는 정신혁명을 위해 참아줄 수 있다고 넘기고 마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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