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즈비언들의 다양성

누가 “동성연애자”라는 말을 쓰는가

시로 | 기사입력 2007/05/03 [14:34]

레즈비언들의 다양성

누가 “동성연애자”라는 말을 쓰는가

시로 | 입력 : 2007/05/03 [14:34]

‘일반’이 아닌 ‘이반’이라는 단어가 더 익숙하게 느껴졌던 시점은 언제부터였을까. “남자 친구 있어요?”라는 말이 불편하게 느껴졌던 시점은 또 언제부터였을까. 결혼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게 된 시점, 부모님께 죄스러운 마음을 가지게 된 시점, 가족들과 텔레비전 보다가 하리수가 나오면 채널을 돌려버리게 된 시점은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개인적으로 하리수씨 팬이다. 다만 가족들의 관심이 나로 집중될까 두렵기 때문에 채널을 돌리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레즈비언’이라는 단어가 나를 설명해주는 가장 친절한 단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한 순간의 깨달음 ‘그래, 난 레즈비언이야’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서서히 내 몸과 생활에 스며들듯이 점차적으로 그렇게 된 것 같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난 레즈비언이 되어 있었다. 이성애자 친구보다 레즈비언 친구들이 더 편하고, 그들의 얘기에 더 많이 공감하고 웃고 떠들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레즈비언 친구들을 만나는 게 좋았다. 나이, 직업, 환경이 모두 달라도 레즈비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왠지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많은 레즈비언들을 만났고, 지금까지도 모임을 함께 하며 관계를 맺어오고 있다.

레즈비언 커뮤니티 활동을 시작했을 무렵

나는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대부분의 레즈비언 친구들을 만났다. 그 이유는 사실 인터넷으로밖에 만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인터넷 상의 레즈비언 커뮤니티 규모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하다. 많은 레즈비언들이 인터넷 공간을 많이 이용하는 이유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인터넷은 가능한 개인정보를 드러내지 않고, 타인과 접속이 쉽다. 그리고 레즈비언들은 관계에 대한 수요가 상대적으로 매우 높은 집단이다. 따라서 인터넷 공간에서의 레즈비언 활동은 왕성할 수밖에 없다.

나는 약 10여 년 전 인터넷 보급 이전 pc통신 시대, 나우누리의 ‘레인보우’를 통해 처음 레즈비언들을 만났다. 그리고 지금까지 인터넷 상의 모임에서 무수히 많은 레즈비언들을 만나오고 있다. 중간 무렵 한동안은 인터넷 커뮤니티 활동을 하지 않은 적이 있다. 당시엔 인터넷 커뮤니티의 레즈비언 문화가 나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가입했던 몇몇 모임에 처음 나갔을 때의 일이다.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오프라인에서 만나기 전 필수적으로 적어야 하는 ‘가입인사’라는 게 있다. 내용에는 반드시 이런 질문들이 포함되어 있다. 애인유무, 성향(팸, 부치 등), 나이, 원하는 이상형 등의 질문이다. 어떤 곳은 몸무게와 키, 옷 입는 스타일과 성격(예를 들어 ‘애교 많음’)까지 질문하는 곳도 있었다. 이런 질문들을 곳곳에서 접할 때 들었던 생각은 ‘애인 있는 사람은 커뮤니티에서 사람들 만나기 힘들겠군’ 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애인이 없는 솔로가 커뮤니티 생활을 하기도 어려운 건 마찬가지였다. 첫 모임 때 ‘노예팅’에 억지로 나가게 된 적이 있었다. 물론 거절했지만, 신입회원인지라 거절이 거절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 연애하고 싶어서 이런 모임 나온 거잖아’ 라고 대놓고 말했다. 그 후부터 나는 ‘연애하고 싶지 않으면’ 커뮤니티 모임에 나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 동안 커뮤니티에서 사람들을 만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관계의 친밀함과 ‘연애코드’

나는 소위 말하는 ‘연애를 하지 않고 지낸 기간’이 긴 편이다. 길다는 기간도 상대적이긴 하지만 말이다. “연애 언제 마지막으로 했어요?”라는 질문에 내가 대답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놀라워했다. 최근에 이와 관련해서 느낀 점이 있다. 그것은 내 오랫동안의 솔로시간이 사람들의 신뢰를 얻는데 한 몫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유는 아마도 내가 연애상대를 신중하게 고른다는 점, 친분을 연애로 발전시킬 가능성이 없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나를 아는 레즈비언 친구들은 적어도 내가 ‘야, 영화 보자’라고 말했을 때, ‘나랑 연애할래?’라는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친구 사이에서 이런 극단적인 오해가 있겠는가 마는, 그래도 모르는 게 레즈비언 관계가 아니던가. 어떤 레즈비언 영화에서 솔로 탈출법에 대한 코믹한 방법을 제시한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중 하나가 ‘평소 예쁜 여자아이와 절친한 친구가 되어라’ 하는 것이었다. 일상에서 친하게 지내다 보면 어찌될지 모르는 게 여자들 간의 연애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 때문에 커뮤니티에서 레즈비언 친구들을 사귀기가 쉽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상대방이 호의를 고백으로 받아들이고, 칭찬을 작업으로 받아들여서 난감했던 경우가 실제로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대략 그 사람의 분위기 파악 후에, 오해의 여지가 있는 부분은 단호하게 끊을 줄도 알게 되었다. 혹자는 ‘친구 사귀는데 굳이 이런 부분까지 신경을 쓰다니’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레즈비언 커뮤니티에서 관계 속의 친밀함을 연애코드로 받아들이는 것이 그만큼 흔한 것도 사실이다.

다양성을 수용하는 문화적 조짐들

나와 꽤 오랫동안 친분을 쌓아온 레즈비언 모임 사람들이 있다. 그 곳 사람들의 불문율 중 하나는 ‘같은 모임 사람들과 연애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모임 내에서 커플이 생기면, 헤어지고 난 후 반드시 둘 중 한 명은 더 이상 모임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물론 커플이 된 후 10년이 넘도록 행복하게 잘 지내는 커플도 있지만, 대부분의 커플들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헤어지곤 했다. 그 후 헤어진 커플을 둘러싸고 모임의 분위기가 흐려지거나 심할 때는 다툼이 생기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모임 사람들은 연애에 관한 한 가장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나는 이 조심성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들과의 신뢰를 쌓기 위해, 그리고 연애감정이 아닌 친밀성을 보존하기 위한 노력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는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많아졌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이겠지만, 무작정 친목위주라든가 연령대별 모임보다는 등산, 예술활동과 같은 취미, 관심사를 공유하거나 같은 직업군에 속한 사람들의 모임들이 눈에 띈다. 어떤 커뮤니티에는 대놓고 ‘연애가 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가입불가’라고 광고하기도 한다.

내가 가입한 또 다른 모임에서는 한 회원이 만나자는 광고를 올리면서 ‘연애하자는 것 아님’이라고 덧붙여 웃었던 적도 있다. 이런 글들을 보면서 또 한번 ‘레즈비언 커뮤니티 안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구나’ 하고 느꼈다. 나는 커뮤니티 활동 초반에 모임 분위기가 나와 맞지 않다고 한동안 관심을 끊었는데, 또 다른 누군가는 자신들의 생각과 관심들을 함께 나누고,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 틀을 넓혀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다양한 사람들로 인해 레즈비언 커뮤니티가 계속 활발하게 유지되고, 다양성을 수용하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레즈비언을 “동성연애자”라고 말했던가. 만나면 한 대 때려주고 싶다. 레즈비언은 연애나 섹스에 목숨 건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많은 레즈비언들은 여성들끼리 관계의 친밀성이나 신뢰에 대해 고민하고, 노력하는 면이 크다. 거꾸로 이 세상에는 여자들끼리의 친밀함이나 배려와 신뢰를 보여주는 모델이 흔치 않은 것 같다. 동화 속에는 온통 아버지를 사이에 둔 계모와 미움 받는 딸이 등장하고, 드라마에는 불륜관계의 남편을 두고 싸우는 부인과 애인이 흔하게 등장한다.

우리가 남자를 사이에 두고 여자들끼리 경쟁해야만 한다는 암시를 무의식 중에 너무 많이 받아서일까. 그래서 남자 없이 사이 좋은 여자들을 ‘연애관계’로 밖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일까. 이런 의미에서 레즈비언은 결코 “동성연애자”가 아니다. 이것은 연애하지 않는 레즈비언들이 많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연애에 국한되지 않는 서로의 친밀성을 확장시키고, 또 공고히 해 나가기 위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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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이 2016/09/21 [19:53] 수정 | 삭제
  • 4840 5819 여자구함 동성
  • 동이 2016/09/21 [19:49] 수정 | 삭제
  • 저는 남자같은 여자 입니다 여자칭구 구해요
  • 강위 2008/11/04 [09:50] 수정 | 삭제
  • 속이 뭔가 후련하군요,

    "레즈비언은 연애나 섹스에 목숨 건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많은 레즈비언들은 여성들끼리 관계의 친밀성이나 신뢰에 대해 고민하고, 노력하는 면이 크다. 거꾸로 이 세상에는 여자들끼리의 친밀함이나 배려와 신뢰를 보여주는 모델이 흔치 않은 것 같다"라는 구절. 오오오. 얼마전 제가 썼던 글과 단어만 다를 뿐 맥락이 일치해서 놀라고 반갑습니다.
  • ...... 2008/10/14 [19:43] 수정 | 삭제
  • 저도 연애하고자 하는 것보다 단순히 레즈비언 친구들과 교류하고 싶은 ㅠ
  • a 2007/06/22 [05:28] 수정 | 삭제
  • 음 한참 지나고 쓰니까 좀 뻘글인데요. 그래도 눈에 보여서 씁니다.
    호모라는 말이 원래 같다 라는 말이니까(헤테로의 반대로)
    호모라는 단어 자체만 가지고는 별로 거부감이 없어야 할 겁니다.
    하지만 호모라는 단어에 혐오감을 깃들게 해서 많이 쓰잖아요.
    동성연애자라는 단어도 그와 같습니다.
  • 동소심 2007/05/14 [14:32] 수정 | 삭제
  • 동성연애자라는 말 많이쓰더군요...
    그래도 호모라는 말은 이제 거의 언론에서는 안쓰는것같지만
    호모라는 말도 많이쓰구-ㅅ-;
  • a 2007/05/08 [14:54] 수정 | 삭제
  • L커뮤니티 활동은 많이 못했지만 일다에선 글을 통해서 진짜 레즈비언들이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다양성을 인정해주고, 다양하게 살아가는 모습들을 계속 만나고 싶어요.
  • mari 2007/05/07 [23:27] 수정 | 삭제
  • '애인'이라는 말을 애용 ..
  • L 2007/05/07 [12:17] 수정 | 삭제
  • 동성연애자는 잘못된 표기죠.
    이성애자를 이성연애자라고 하지 않잖아요?
    동성애자를 동성연애자라고 하는 건 편견을 담고 있는 것이죠.
    섹스를 나쁘게 생각해서 반대하는 게 아닙니다.
  • 2007/05/07 [09:37] 수정 | 삭제
  • 동성연애자라는 단어에 필요 이상으로 거부 반응을 보이는 것 같네요.
    레즈비언은 듣기 좋고, 동성연애자는 듣기 싫다?
    글쎄요..
    오히려 전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귀하가 생각하는 연애는 섹스인지?
    관계의 친밀성이나 신뢰에 대해 고민하고, 노력하는 것 또한 연애의 범주에 속할 수 있죠.
  • 시로 2007/05/07 [00:32] 수정 | 삭제
  • 위의 글에서 사용한'연애코드' 의 의미는
    연애를 목적으로 하거나, 연애감정을 마음에 담고 상대방에게 접근하거나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흔히 속어로 '작업'이라고 말을 하기도 하죠.
  • 2007/05/05 [20:45] 수정 | 삭제
  • 연애도 중요하겠지만 엘커뮤니티에서 좋은 친구들과 알게 되고 함께 추억을 쌓아가는 것만큼 중요한 건 없는 것 같아요. 늙어서까지 함께 하고 싶은 친구들이 있다면, 그것으로 적금통장보다 더 훌륭한 자산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니겠어요.^^
  • 질문자 2007/05/05 [14:54] 수정 | 삭제
  • 진지한 질문인데요 연애코드란 건 뭔 뜻인가요?
  • m 2007/05/04 [00:52] 수정 | 삭제
  • 예전과는 다르죠.

    공감되는 부분이 있어서 나름.. 글을 쓰게 되네요.

    기다려준다는 느낌이 저는 참 중요하다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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