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이는 태권도보다는 발레를…’
맘껏 돌려차기를 하고 싶었던 여성들
조이승미 | 입력 : 2007/12/20 [21:46]
‘아이고, 어머니, 어머님! 애가 하고 싶어한다고 다가 아니죠. 아무래도 승미는 고전무용이나 발레를 하는 게…. 휴우~ 우린 더 이상 가르치기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태권도를 하며 팔을 뻗는 폼이 허공에 춤을 추는 듯해서. 원.’
초등학교 5학년. 태권도를 막 배우기 시작한 지 세달 즈음 지난 어느 가을날, 태권도장 원장선생님이라는 사람이 엄마와 면담하며 꺼내 놓은 말이었다. 면담 하루 전날, 내 머리를 안쓰럽다는 듯 쓰다듬으며, 무슨 비밀이야기라도 있는 것처럼 어머니를 따로 오시라 하길래 무슨 일인지 어리둥절하던 참이었다.
원장을 만나고 돌아온 엄마는 그 날 저녁을 먹으며, “더 이상 태권도를 배우기가 어렵게 됐다”고 우물쭈물 이야기를 꺼내셨다.
“고전무용학원은 어떨까. 시내 00동 가면 있다는데….”
얼굴을 찌푸린 나는 밥을 먹다 숟가락을 밥상에 탁 소리가 나게 놓고, 무작정 집 골목길 앞 고물상으로 쏜살같이 뛰어 나갔다. 고물상에 가면, 실력 유단자 경숙이가 살고 있다. 고물상 대문 앞에 이르자, 눈물 콧물이 얼굴에 범벅이 되어 있었다. 울먹이며 경숙의 이름을 몇 차례나 불렀다.
경숙이는 머리가 짧고, 잘 빗지 않았고, 거의 언제나 도복차림이었다. 여느 남자애들처럼 보였다. 반면에 난 할머니가 매일 아침 긴 머리를 단정하고 곱게 묶어주었고, 엄마가 입히는 레이스 달린 원피스를 입고 다녔다.
우리는 사이 좋게 태권도장까지 함께 가곤 했다. 경숙이와 나는 태권도 배우는 아이들이 70명 남짓 되는 도장에서 둘 뿐인 여자아이들이었다.
태권도를 배운 3개월 동안 느낀 즐거움
내가 그때 태권도 도장에 보내달라고 엄마를 조르기 시작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시도 때도 없이 아이스께끼하며 치마를 들추던 남자애들에게 한 번쯤 내 주먹으로 펀치를 날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시달림에 지쳐 내가 더 이상 치마를 입지 않게 되자, 책가방에 우유를 넣어 밟는 등 새로운 종류의 괴롭힘이 시작됐다. 할머니가 학교를 쫓아와 나를 괴롭히는 남자애들을 혼내면, “네가 좋아서 그러는 것”이라고 친절한 선생님이 대신 변명을 늘어놓으셨다. 신물이 났다.
둘째는 경숙이었다. 전학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경숙은, 어렸을 적부터 태권도를 한다 했다. 집이 고물상을 하고 있어 경숙이의 하얀 도복은 항상 때가 타 있었다. 하지만, 허리 춤 아래 가볍고 단단히 맨 검은 띠는 매우 인상 깊었다. 골목길에서 동네아이들과 매일 고무줄로 소일거리를 삼고 있던 내게 경숙의 모습은 놀라웠다.
경숙이를 한동안 열심히 관찰하고 있노라니, 이내 신기한 사실을 깨닫게 됐다. 남자애들이 경숙이는 괴롭히지 않았고, 또는 좋아한다고도 말하지 않았으며, 함부로 대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이렇게 시작은 했는데, 고무줄 놀이 정도만 감당했던 체력이 태권도를 따라가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래도 즐거웠다. 자세 가다듬고 ‘태! 권!’하고 구호를 외치고, 돌려차기, 발차기를 매일같이 연습했다.
내가 생각해도 한참은 어설펐지만, 도장의 넓은 공간에서 맘껏 운동하는 것도 좋았고, 실컷 땀을 흘린 후 벌컥벌컥 들이마시는 물도 맛있었다. 태권도를 처음 배우는 기초과정에서는 하얀 도복에 하얀 띠를 매는데, 이걸 매고 나가면 유단자라 착각하고 겁을 먹기도 하는 아이들이 더러 있어 더욱 행복했다.
‘한 풀 꺾여버린 경험’
‘오냐. 그까짓 거. 내가 거기 가서 우리 엄마가 열심히 벌어 온 돈 주고 배워주나 봐라. 절대로 안 간다. 안가.’
수십 번을 되뇌었던 거 같다. 내가 도장의 다른 남자아이들과 비교해 매번 뒤쳐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운동 중 코피를 쏟아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나에게 스트레칭 한번 제대로 가르쳐 본 적 없는 원장이 날 소질도, 재능도 없다고 평가해서 화가 났던 것이다.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소질이 있는 아이들만 가르치려고 태권도 도장을 운영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원래부터 원장은 당최 어디에 정신을 팔고 다니는지 항상 다른 일로 분주했는데, 도장 학생들에게 무관심한 사람이었다. 아마 원장은 내가 도장의 유일한 여자아이라고 생각했을 거고, 그 사실이 어느 순간 매우 불편해졌던 것 같기도 하다.
정말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어 오른 건, 그 태권도장은 내가 살던 변두리 마을에서 다닐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오지 말라고 하니, 이제 남은 선택지는 없었다. 그렇게 도장을 관두게 됐다. 뭔가 몸을 움직여 하고 싶기는 했는데, 그렇다고 원장 머리 속에 그려진 등식 그대로 태권도의 ‘반대 종목’인 고전무용과 발레를 하기는 죽어도 싫었다.
태권도를 그만둔 후, 도장에서 돌아온 경숙이가 가끔 고물상 앞마당에서 사사로이 개인 특별 태권도 레슨을 시켜주기도 했는데, 기분이 좋다가도 뭔가 자존심이 상했다. 이미 한 풀 꺾여 버린 마음은 나도 어쩔 수 없었다.
한동안 죽 화가 나 있어서, 엄마하고도 말을 안 했다. 원장과 행여라도 마주칠까 두려워, 도장 앞 길은 일부러 멀리 돌아가곤 했다. 경숙이와도 차츰 멀어졌다.
그 뒤 정확히 ‘왜’라고 딱 잘라 말할 수는 없는데, 성장과정에서 죽 모든 운동을 ‘하는 것’을 무척 싫어하게 됐다. 오래 달리기는 두 바퀴 돌면 “어지럽다”거나 “심장이 터질 것 같다” 거짓말하고, 3초 이내에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을 열심히 지어 보이고 기권을 했다. 심지어 100m달리기는 90m즈음에 일부러 걸어 들어와 26초 대에 머무른 적도 있고, 줄넘기 이단 뛰기는 죽어도 못하겠다고 버텨 0점을 맞았다.
대신에 체육과 운동을 ‘보는 것’에는 열광하게 되어, 주로 남자선수들이 등장하는 야구를 보러 다녔다. 돈이 없으면 7회 말에 공짜로 야구장에 들어가서라도 관전했다. 투수가 스트라이크 존에 공을 넣을 것인지, 심판이 볼을 줄 것인지 고민했다. 나름대로 재미있었지만, 도장에 다닐 때 느꼈던 기분은 맛보지 못했다. 한 1년쯤 야구장에서 살고 나니 그나마 이마저도 시들해 버렸다.
20년 만에 다시 태권도를 배우고 싶다
요샌 가끔 휴일에 부모님 집에 들르곤 하는데, 아빠는 그때마다 테니스를 참 열심히 치러 다니신다. 벌써 한 20년도 넘게 동호회 사람들과 함께 초등학교 테니스 코트를 빌려 매해 여름 보기 좋게 그을린다.
반면, 조심스레 안색을 살피며 내게 고전무용이라도 배우겠느냐고 물었던 엄마는 현재도, 과거에도 즐겨 하는 운동이 별로 없다. 대신 엄마는 아빠 동호회 사람들의 부인들과 함께 때때로 식사하러 가신다. 이제는 내가, 나와 엄마를 안타까워하고 있다.
단 한 번이라도 초,중,고등학교 운동장을 눈 여겨본 적 있다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일요일에는 얼마나 많은 남성들이 조기축구 현수막 회원 모집을 크게 내걸고 운동장을 마음 가는 만큼 한껏 누비고 있는지. 평일에는 얼마나 많은 남학생들이 야구연습을 부지런히 하고 있는지, 농구공을 던지고 있는지.
맘껏 돌려차기를 하고 싶어하던 여성들은 도대체 어디로 꼭꼭 숨어버렸나.
올 여름 무척 덥던 날, 우연히 태권도 격파시범을 바로 눈앞에서 봤다. 허리에 검은 띠를 맨 여성 한 분이 맨발로 무대에 올라와 눈가리개를 하고 절도 있게 돌려차기를 해서 격파 시범을 시원스레 보여주었다. 긴장했던 것인지 땀을 뚝뚝 흘리는 그 모습이 20년 전, 경숙이처럼 꼭 그렇게 멋졌다.
내년 봄에 여건이 허락되면 다시 태권도를 시작해보고 싶다. 체력을 기르기 위해서라도 좋고, 한이 맺힌 거라 해도 좋고, 뭐라도 좋다. 이제 내가 갈 수 있는 태권도장은 여기저기 많기도 하거니와, 만일 혹시라도 그 시절 태권도장 원장과 같은 사람들을 보게 되면, 딱 지난 이십 년 간 내가 내 땀으로부터 숨어버렸던 날들만큼만 엄중히 꾸짖어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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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두고보세요 2009/06/11 [21:08] 수정 | 삭제
- 어디 두고 봅시다 2008/11/30 [12:58] 수정 | 삭제
- 전지현. 2008/02/13 [13:14] 수정 | 삭제
- 신 2007/12/30 [10:15] 수정 | 삭제
- 가람 2007/12/24 [15:55] 수정 | 삭제
- 라라라 2007/12/23 [21:48] 수정 | 삭제
- 산모롱이 2007/12/23 [14:06] 수정 | 삭제
- blues 2007/12/21 [12:02] 수정 | 삭제
- gmkae 2007/12/21 [10:35] 수정 | 삭제
- 아침이슬 2007/12/21 [02:10] 수정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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