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힘은 어디서 오는가

회갑을 앞둔 친구 정옥희

이옥임 | 기사입력 2008/06/22 [20:32]

그녀의 힘은 어디서 오는가

회갑을 앞둔 친구 정옥희

이옥임 | 입력 : 2008/06/22 [20:32]
비 오는 오후, 날씨만큼이나 울적한 마음으로 집안에 틀어박혀 있으면 그녀에게서 문자가 온다. ‘친구야,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은쟁반에 옥구슬 굴리는 것 같네. 네 목소리가 빗소리에 섞여 들리는 것만 같아.’
 
은퇴 후 오랜만에 친구들과 여행이라도 하게 되면, 일 때문에 함께 가지 못하는 그 친구는 어김없이 문자를 보내온다. ‘지금쯤 아마 하늘을 나는 기분이겠지? 보드라운 솜털 구름 하나가 너희들 소식 물어다 놓고 가는구나. 내 몫까지 행복한 여행하고 와!’
 
평생 일속에 파묻혀 살았으면서도, 그것도 한 가지 일만을 주욱 한 것이 아니라 이 일 저 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해왔으면서도, 일에 찌들지 않고 언제나 평온한 미소로 넉넉해 보이는 여자. 정옥희. 과연 그녀의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만년 소녀
 
▲ 소녀같은 내 친구 정옥희     
그녀를 인터뷰하겠다 했더니 처음엔 손사래를 치며 안 된다고 한다.

 
“아서라. 내가 무슨 자격이 있다고 나를 인터뷰해?”
“인간 자격이지. 인간답지 않은 사람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 너만큼 인간자격 갖춘 사람 흔하지 않다, 너.”
“나처럼 친구들 귀찮게 하고 볼품없이 사는 여자가 무슨 인간자격?”
“그게 인간자격이야. 저 혼자 잘나서 저 혼자 잘 살아가면 그게 인간이냐? 너처럼 넉넉한 듯하면서도 어딘가 부족하고, 부족한 듯하면서도 넉넉한 그런 사람이 인간다운 인간이지.”

 
이렇게 넉살을 떨어가며 간신히 그녀와의 인터뷰에 들어갈 수 있었다.
 
기자: 정여사는 중학교 1학년 때 우리학교 예술제에서 친구가 읊었던 그 시를 어떻게 아직도 잊지 않고 있어? 나는 예술제를 했다는 기억조차 없는데.
 
정여사: 그때 그 친구가 좀 감동을 줬어야 잊지. ‘어머니! 백목련보다 하이얀 가슴을 주어요. 물보다 불보다 뜨거운 심장을 주어요.’ 그러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환경 정리할 때 그 시를 교실 벽에 써서 붙였었잖아. 잊고 살다가도 문득문득 그 친구 생각이 나면 읊조려보곤 했는걸. 그러면 그날의 감동이 되살아나곤 하더라구.
 
기자: 시뿐이 아니잖아. 우리들 학교 다닐 때 한창 유행하던 팝송들을 지금도 어떻게 가사를 잊지 않고 부를 수 있는 거야?
 
정여사: 나이 든다고 마음까지 늙남? 부엌일 할 때도 흥얼거리고, 공원을 걸을 때도 흥얼거리고 그러는 거지 뭐.
 
기자: 아무튼 정여사 감상적인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정여사: 마음은 언제나 소녀 아니던가? 자기는 안 그러나? 연두 빛 새싹, 작은 풀 한 포기, 밀려왔다 밀려나가는 파도, 그런 것들 보면 가슴이 따끔거리지 않는가? 난 어렸을 적보다 오히려 나이 들어가면서 감정이 더 예민해지는 것 같던데.
 
그녀의 감상적인 면은 가정을 꾸려 가는 데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시어머니 살아계셨을 때는 모임에서 조금만 시간이 늦어져도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늦을 거라며 전화 드리는 걸 잊지 않고, 서방에게도 수시로 전화를 해서 때로는 친구들의 놀림을 받기도 했다.
 
부요한 마음
 
▲ 지난 겨울 어느 카페 벽난로 앞에서  
기자:
정여사는 평생 시어머니 모시고 살았는데, 정여사 입에서 시어머니 흉보는 말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지?

 
정여사: 결혼해서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내가 모시고 살았는데, 우리라고 어찌 흉허물이 없었겠어. 그렇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낳아서 길러준 분이고, 또 내 자식들 잘 돌봐주시는 것만으로도 고마우니 허물을 허물이라 생각하면 벌 받지. 그리고 우리 어머니도 어디 가셔서 며느리 흉보고 그러는 분 아니셨거든.
 
기자: 내가 알기로 자기는 서방이 가장으로서 역할을 다 하지 못한 걸로 아는데, 어쩌면 그렇게 곰살갑게 대할 수 있어? 부부싸움이란 거 해 봤냐?
 
정여사: 남편이 일을 놓고 있는 건 아니야. 내가 전적으로 살림을 책임지는 것도 아니고. 나는 다만 일이 좋고, 일을 해야 살아있다는 느낌이 더 나고, 또 일에서 얻는 보람이나 배우게 되는 것들을 즐기는 것이지. 그래서 일을 계속하는 거야. 부부싸움? 하지. 하는데….
 
기자: 하는데?
 
정여사: 그게 그렇더라고. 우리가 어떻게 만난 사이인데, 어렵고 힘들다고 서로 미워하겠어. 오히려 남편이 내게 미안해 할까봐 안쓰럽지 뭐.
 
기자: 지금은 (남편의) 건강이 많이 좋아지셨다며?
 
정여사: 좋아졌어. 움직이는데 별 불편을 안 느끼니까.
 
기자: 그럼 잠자리도 해?
 
정여사: 얘는… 잠자리가 그리 대수더냐? 꼭 잠자리를 같이 해야만 부부야? 다정한 말 한 마디, 그윽한 눈빛, 생각해주고 걱정해주는 마음. 부부관계에서는 이런 것들이 잠자리 못지 않게 중요한 것 아니냐?
 
일 자체가 살아있는 느낌을 맛보게 해
 
▲ 거제도 소매물도 등대섬 남서쪽에서 본 바다
그녀는 그랬다. 우리 나이가 이제 내년이면 회갑인데, 앞으로 살면 얼마나 산다고 굳이 어렵고 힘든 시절에 대한 생각을 끄집어내어 아픈 마음 곱씹을 필요가 있느냐고. 내게 주어지는 하루하루가 고마움이고 선물인데, 그 선물을 소중하게 살아내야 하지 않겠느냐고.

 
내 곁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귀한 인연들인데, 그 인연들을 귀하게 이어가야 한다고. 그 인연들과의 좋았던 기억만으로도 충분히 내 삶이 윤택한 것이라 생각하면서….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긴 남편과 시어머니 모시고 두 아들 번듯하게 키워내면서 일을 놓지 않았던 그녀다. 중고생을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도 해보고, 음식점도 경영해보고, 자연학습장에서 보조역할도 해보고, 부동산중개업도 해보았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길 때도 있었지만, 돈보다는 일 자체가 사람이 살아있는 느낌을 곱절로 맛보게 하는 것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일에서 얻는 것이 꼭 금전적인 것에 국한 되겠냐며 늘 소녀 같은 감성으로 세상 파도를 힘차게 헤쳐나가는 그녀에게는, 눈에 보이는 삶뿐 아니라 가슴으로 혹은 꿈이나 이상으로 살아가는 세계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가진 것 없어도 마음이 부요한 그녀가 어떤 훌륭한 사람들보다 오히려 이 세상에 더 필요한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 기사는 신문발전위원회 2008년 소외계층 매체운영 지원사업의 보조를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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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자 2008/06/24 [19:48] 수정 | 삭제
  • 작은 풀꽃에게서도 뭔가를 느끼고 거기서 오는 힘으로 살아가시는 분 같습니다. 오래오래 우정 변함 없으시기 바랍니다.
  • 주황 2008/06/24 [12:28] 수정 | 삭제
  • 기쁠 때 배아파하지 않고 함께 나눌 수 있고
    슬플 때 동정하지 않고 같이 덜 수 있는
    맘씨 좋은 친구가 있다는 건, 참으로 든든한 일-
  • ann 2008/06/23 [18:15] 수정 | 삭제
  • 그런 질문 하게 만드는 사람이 때때로 우리 주변에 있지요. 그녀의 힘은.. 아마도 자연에서, 마음 속 자연에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
    시를 알고 읇고 만들고, 세상을 꿈꾸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힘이 되어주는 것 같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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