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그 모든 다양함

영국 런던 ‘자긍심 행진’

금오해령 | 기사입력 2003/07/28 [00:07]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그 모든 다양함

영국 런던 ‘자긍심 행진’

금오해령 | 입력 : 2003/07/28 [00:07]
영국에는 겨울을 제외하고서는 거의 일년 내내 10여개 이상의 지역에서 성적소수자 자긍심 행진(madis gras)이 열린다. 그 중에서도 런던 자긍심 행진은 가장 큰 행사라 할 수 있다. 행사참여자가 5만~6만 명으로 추산되는 가운데 지난 7월 26일 런던에선 ‘프라이드 인 더 파크(PRIDE IN THE PARK)’라는 제목으로 성적소수자 자긍심을 위한 축제가 열렸다. 이들은 정오경 국회의사당 앞을 포함한 런던 중심가를 행진한 이후 하이드(HYDE) 공원에 모여 늦은 밤까지 다양한 행사를 진행했다.

자동차 회사(FORD), 통신회사(BT)등의 대형 스폰서들과 영국 내 주요 성적소수자 매체들이 후원하는 가운데, 올해 처음으로 유료화 된 행사입장료가 한화로 일인당 5만원(한 달 전 예매시 4만원. 성인동반 10세 이하 무료)을 호가해서 한 때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행사 당일 하이드 공원은 수많은 성적소수자들로 가득 찼다. 맑다가 흐리다가 가끔씩 비까지 뿌리는 전형적인 영국날씨 속에서도 그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대형무대에서는 오후 3시부터 가수들이 공원의 중앙무대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그리고 공원 곳곳에는 여성전용 돔을 포함한 대형 댄스돔(Dorm)들이 임시로 설치되어 댄스파티가 열렸다. 공원 곳곳에 주점과 간이식당들이 섰고 공원 중앙에서는 성적소수자 문화와 관련된 각종 부스들이 6색 무지개 깃발들을 달고 행사참가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노력했다.

성적소수자 상징물과 관련된 다양한 아이디어 상품들을 파는 부스들이 눈길을 끌었고, 동성애 잡지, 서점, 동성애자 전용 여행사, 동성애 관련 작품 사진, 운세, 웹 사이트, 패션용품 등 이른바 핑크산업과 관련된 부스들이 경쟁을 벌여 볼거리를 제공했다. ‘정상인들이 무서워요.’ ‘나 변태.’ ‘이성애는 정상인 것이 아니라, 그저 흔한 겁니다.’ 등 익살스런 문구를 새긴 티셔츠들도 인기를 끌었다.

무대 왼쪽 쪽에는 커뮤니티 부스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있었는데, 이 부스들이야 말로 이번 성적소수자들의 다양성을 한 눈에 보여준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게이 축구모임 등의 취미모임들부터 시작해서 이집트 게이탄압 반대를 주제로 부스를 연 앰네스티 등의 각종 인권단체까지, 상상할 수 있는 대부분의 주제들이 모여 있는 듯 했다.

‘하느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성경은 정말 동성애를 반대하나요?’등 팸플릿과 사탕을 나눠주고 있는 크리스천 커뮤니티 부스 건너편에는 동성애 상징물을 잔뜩 달고 있는 불교신자를 위한 부스가 있었다. 동성애자 채식주의자들이 채식주의 캠페인을 하는 부스는 청소년 동성애자 지원단체의 부스 옆에 붙어있었다. 전국교사연합에서 교육과정에서의 성적소수자 차별 시정을 위한 캠페인을 하고, 한 여성단체에서는 여성 동성커플의 법적지위 보장을 주장하며 레즈비언들에게 법적권리를 설명하는 동시에 관련 책자를 나눠주고 있었다. 노동현장에서의 성적소수자 차별을 반대하는 단체, 전문직 동성애자 모임, 흑인 동성애자를 위한 단체, 동성 간 가정폭력 피해자 지원단체 등 그 내용은 실로 다양했다.

성적소수자에 대한 혐오범죄 예방 등에 대한 캠페인 역시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혐오범죄반대 캠페인과 동시에 이번 행사에서 가장 눈에 띄는 집단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경찰들이었다. ‘게이경찰연합’이 공원에 대형부스를 차린 것에 이어 몇 개의 지역별로 경찰들이 네 댓 개의 작은 부스와 각종 홍보물을 마련하고 적극적으로 행사에 참여한 것은 인상적이었다.

정복이나 일상복을 입은 경찰들이 참가자들에게 작은 인형과 볼펜 등과 함께 ‘당신의 신고가 작은 변화를 만듭니다’‘실천 속의 공정함, XX경찰’‘동성애자를 괴롭히는 건 범죄입니다’등의 문안을 담은 홍보물을 나눠주며 “괴롭힘을 당하면 신고하세요!”라고 외쳤다. 특히 런던(Metropolitan) 경찰팀이 적극적으로 배포한 분홍풍선은 행사장을 온통 분홍색으로 물들였다.

행사 참가자들도 다양한 양상을 보였다. 많은 참가자들이 동성애 상징물 등을 다는 것 이외에는 평범한 차림으로 모였지만 역시 참가자들의 패션 역시 행사의 주요한 볼거리였다. 6색 무지개를 변형한 패션들과 각종 테마의 커플룩들, 화려한 드레스나 전통의상들이 거리와 공원을 화려하게 만들었다. 방금 회사에서 퇴근한 것 같은 점잖은 차림을 한 사람들과 거의 벗은 거나 다름없는 차림을 한 사람들이 같은 길을 걸어갔다.

엄마들이나 아빠들과 함께 온 아기와 어린이들도 참가했다.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레즈비언 엄마들이나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게이커플도 자연스러운 풍경이었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남녀노소 성적소수자들도 눈에 띄었다. 중앙무대 부근에는 휠체어 장애인을 위한 전망대가 따로 설치되어 있기도 했다. 참가자들은 대부분 백인이었지만 아시아, 아프리카, 아랍계 등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고 연령대도 아이부터 60대 노인까지 다양했다.

이 날 공원 안에서 그 많은 성적소수자들 사이에서도 이성애자 커플 한 쌍이 아예 자리 펴고 누워서 애정표현을 하는 경우들도 볼 수 있었다. 무슨 사연인지 흔히 ‘정상가족’이라고 불리는 구성의 가족이 소풍 온 듯 모여 앉아 점심을 먹고 있기도 했다. 이 날 이 공간에서 그들은 완벽하게 ‘소수’였지만, 그들 스스로도, 그리고 남들도 신경을 쓰거나 두려워하지는 않는 듯 했다. 그저 그 공간의 현란한 다양함 중의 한 면일 뿐이었다.

반면, 이 날 행사가 끝나고, 그 숫자가 확실하게 역전이 되는 현실로 돌아오면서 자연스럽게 손잡았던 많은 커플은 다시 손을 놓고 길을 걸었을 게다. 그 현실을 우리는 ‘소수의 문제’가 아니라 ‘차별의 문제’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이 기사에서 얼굴 식별이 가능한 사진은 용도를 설명하고 당자사의 허락을 받은 사진입니다.)

이 기사 좋아요
  • 도배방지 이미지

  • 인어 2003/07/28 [15:04] 수정 | 삭제
  • 이성애는 정상인 것이 아니라, 그저 흔한 거죠. ^^
    문구들이 재밌어요.
    경찰들이 핑크풍선을 들고 있는 모습도 신기한데,
    호모포비아들의 혐오범죄를 신고하라고 말해주다니...
    감동적이네요.
  • 마디그라 2003/07/28 [03:24] 수정 | 삭제
  • 자유로운 공기가 느껴지네요.
    마디그라 축제에 함 가보고 싶었는데..
    생생하게 그 현장의 느낌 잘 전달받았어요. ^^

    다양성이 인정될 때만이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살 수 있다는 걸..
    깨닫는 세상이 얼렁 왔으면 좋겠습니다.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