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구두 발자국

낭미 | 기사입력 2009/07/22 [23:30]

[단편소설] 구두 발자국

낭미 | 입력 : 2009/07/22 [23:30]
검은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교문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교실에서 애써 묵묵해야 했던 시간을 보란 듯이 내팽개치는 양, 교문을 나오자마자 개중 몇몇은 바로 담배를 꼬나물고 가래침을 뱉기도 했다. 뜻 없이 욕설을 내지르며 싱글거리기도 하고 징글징글한 불평을 늘어놓느라 얼굴을 일그러뜨리기도 하면서 제각기 입길이 바빴다. 혜선은 약간 고개를 숙이고 물살을 거스르듯 아이들 틈을 지나 교문으로 들어섰다. 유행 지난 갈색 정장차림에 낡은 가방을 맨, 고리타분한 선생 냄새를 풍기는 저 여자가 누군지 힐끔거릴 법도 하련만 아이들은 무심하게 등지고 자기네들끼리 킬킬대며 가버렸다. 운동장 구석에는 아직 체육복 차림을 한 아이들이 공을 차고 있었다. 널찍한 운동장이 눈앞에 펼쳐지자 숨이 트였다. 한편 도심 속 외딴 곳에 갑자기 휑뎅그렁하게 남겨진 기분이 들기도 했다. 각진 학교는 언제나 그렇듯 차디차고 비린 쇠냄새 같은 것을 풍기고 있었다.

교무실을 찾아 들어갔지만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얼른 방향이 잡히지 않았다. 교무주임이라 했지, 혜선이 듬성듬성한 자리를 눈으로 훑고 있을 때 창가에서 한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아! 선생님, 이리 오세요!”
그였다. 진심으로 반갑게 큰소리로 외쳤다. 아마 시간을 확인하며 그녀를 기다리던 참이었나 보다. 갑자기 가슴 밑바닥이 울렁이는 것 같았다. 혜선은 물걸레질해서 미끄러운 바닥을 걸어 그에게 다가갔다.
“반갑습니다.”
그는 다시 인사했다. 눈앞에서 두 번째로 건네는 인사는 과녁을 비껴난 듯 조금 어색하고 어정쩡했다.
“예, 반갑습니다.”
혜선은 그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잠시 둘은 침묵했다. 그는 혜선이 건넨 명함을 받았다. 학교에서 담당자를 만나면 그녀가 의례적으로 하는 행위인데, 명함을 받고 나서 그는 낯을 약간 붉혔다. 그리고 검지손가락으로 이마를 톡톡 두어 번 두드리며 난처해했다. 그는 나이 들어 있었다. 센터로 전화를 걸었을 때 목소리는 이전과 다름없이 정중하고 부드러웠지만 얼굴은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낯이 창백하고 눈가에 깊은 주름이 몇 가닥 패였는데 뾰족했던 턱선에 살이 올라 둥글어 보였다. 무엇보다 행동거지가 엉거주춤하고 어깨를 수그리고 있어 가난하고 겁먹은 가장을 떠올리게 했다. 실제로 그에게는 자식이 셋이나 있다고 했다.
“인사는 저녁에 식사 대접하면서 천천히 드리고요.”
명함을 지갑에 넣으며 그는 사무적인 목소리로 돌아가 차부터 권했다. 혜선은 알고 있었다. 그의 눈에 비친 그녀의 모습도 입 대지 않고 식은 차 같은 모습이라는 것을. 자기가 눈을 내리깐 사이 찬찬히 얼굴을 들여다보는 그의 시선이 느껴진다. 그는 그녀에게서 별 감정을 읽어낼 수 없을 것이다. 머리는 벌써 희끗희끗해지고 있는데 초연한 척 데면데면하게 있는 건조한 여자의 모습, 그것은 남의 학교를 보따리 장사꾼처럼 다니면서 체득한 보호색이기도 했다.
“강의를 맡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교무주임은 어조를 누그러뜨렸다. 그가 말하는 것은 3학년 전교생을 놓고 네 번에 걸쳐 강의하는 데 이십만 원에 떨이한 데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이겠다고 혜선은 생각한다. 학교 형편이 여의치 않으니, 한번에 이십만 원짜리 강의를 네 번에 나눠 해주시고 그냥 이십만 원 받으시면 안 되겠냐고 사정하다시피 하는 말을 들었을 때, 굳이 거절하기 어려웠다. 오랜만에 만난 세일즈맨 동창처럼, 일을 할 때 아는 사이란 것은 계륵처럼 목에 걸리는 것이었다. 지금 또 감사하다고 면목없어하는 그에게 혜선은 대꾸해주었다.
“아닙니다. 학생들을 위해서 이런 강의를 준비하시는 것만도 어딘데요.”
반은 진심이고, 반은 감치는 말이었다. 사실 또 그렇다. 학교 성교육 시간이 법적으로 할당되었다 해도 날림으로 때우기 태반인데, 졸업한다고 중구난방 날뛰는 학생들을 한번 더 고삐잡고 한데 몰아 성교육을 받게 한다는 것은 그래도 스승의 마지막 정일 수도 있으려니, 짐작해 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해주신다면……”
좀 감격한 목소리였다. “자! 그러면.” 그는 이제 완전히 씩씩해져 시계를 쳐다보며 말했다.
“1층 강당으로 가시죠, 제가 아이들한테 한번 더 방송을 하겠습니다.”
혜선은 입에 댄둥 만둥 한 찻잔을 놓고 일어서려다 곁에 있는 개수대를 보고 찻잔을 가져가 헹구려 했다.
“아이고, 됐습니다.”
주임은 속좋게 만류한다. “누구야?” 곁에서 여교사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성교육강사, 오늘 수업하기로 했잖아.”
“아, 그래? 성교육센터에서 오신다던?”
“그래. 아이고, 나도 저렇게 좋은 일 하고 살아야 하는데.”
웃으며 던지는 마지막 말은 꼭 들으라고 하는 입찬소리 같다. 혜선은 쓴웃음을 짓고는 꼿꼿한 걸음으로 그 사이를 가로질러간다. 좋은 일 한다고 웃는 정규직 교사 사이로 실은 일년 계약직, 그것도 사회적 일자리로 보조되어 최저임금을 받는 서른다섯 겉늙은 혜선이, 차고 습한 교무실을 빠져나온다.
“우리가 하기 민망한 이야기들 있잖아요, 저, 현장에 계셔서 알겠지만, 애들이 알 건 다 알거든요. 그러니까 이론적인 거 말고 실제적인 거, 거, 그러니까……”
학생들을 책임지고 있는 양치기 개 같은 그가 ‘거시기, 거시기’ 하듯 알맹이 감춘 말을 떠듬거린다.
“피임 같은 거요?”
혜선이 아무렇지 않게 한마디 하자 그가 끄덕이며, “또 다른 것도……” 하고 중얼거렸다.  “알아서 해주세요. 잘 하실 테니까요.”
그리고 속을 탁 터놓듯 순진한 소년처럼 싱긋 웃어 보였다. 목소리 말고 변하지 않는 게 그 사람의 웃는 모습이구나, 혜선은 그냥 알았다고 대꾸한다.


강단에 올라가 마이크를 점검하고 노트북을 켰다. 빔 프로젝터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도 부탁했다. 그리고 학생들이 하나둘 떠들썩하게 교실에 들어와 앉는 것을 지켜본다. 사실  회의적이다. 어른이든 아이든 사람들은 각기 자기 생각이 있다. 한 시간 수업, 그것도 외부강사가 와서 하는 대형 강의를 통해 학생들의 생각이 삽시간에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말이든 하지 않는 것보다 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는 것도 사실일 터다.
핸드폰이 울렸다. 엄마다. 꺼버릴까 하다가 꺼진 전화기에 계속 전화할 엄마 모습이 눈앞에 그려져 받기로 한다. 엄마는 자기가 할말 있어 전화를 걸 땐 상대가 잠들어 있거나 영화관에 있거나 직장에 있거나 아무 때고 전화를 해댄다. 자기밖에 염두에 두지 않는 그 터무니없는 자신감이 때로 밉살스러웠다.
“엄마?”
“야,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냐? 그게 숫제 협박이지 뭐냐?”
밑도 끝도 없이 대뜸 쏟아지는 말이다.
“엄마, 나 강의해. 나중에 통화해요.”
“아니, 야, 이제 와서 뭐라는지 아냐? 애도 필요 없고, 남편도 필요 없댄다. 외국 가서 살 테니 돈만 내놓으란다.”
엄마의 질부 얘기다.
“니 오빠가 그래 똑똑하고 잘났더만 여자 깡패를 만나서 기가 다 죽어 부인 말만 나와도 벌벌 떤다.”
엄마는 피붙이라 제 살 아픈 것 같은지 몰라도 혜선으로선 벌써 한 다리 건너라 소 닭 보듯 하는 외사촌에게 꼭 ‘니 오빠’라 명토 박는다. 마치 자기가 협박을 받거나 떼돈을 잃기라도 한 듯 펄펄 뛰며 불평을 늘어놓는다. 세상에 조카일이 가장 기막힌 사연이고 질부 흉보기가 다시 없을 중대사라는 양.
“엄마, 나 일하고 있어. 돈벌어야 돼.”
그녀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은근히 가장의 위세를 내세우며 말을 끊은 것이다. 갑자기 휴대폰이 적의를 품은 맹수처럼 울리기 시작한다. 야, 이년아, 에미 말을 버릇없이 그렇게 끊냐, 매정한 년, 최가네 딸들은 독하다고 그러더만. 그래, 나는 김씨다, 나는 남편도 소용없고 자식도 소용없고 김씨 우리 조카가 더 중해. 길러놓으니 에미를 얻다 무시해. 나쁜 년. 듣지 않아도 귀에 쟁그랍게 울리는 말말들. 혜선은 체머리를 흔든다. 남들이 자기를 무시한다는 것, 재산도 없고 일가붙이도 빈한해 만만히 대한다는 것은 시집살이 고되게 한 엄마 평생의 콤플렉스였다.
‘아이구, 엄마, 엄마가 나서서 그렇게 설레발 안 쳐도 돼. 이제 다 어른이야. 지가 한 행동은 지가 책임져야지. 자기 상처 같은 건 삭힐 수 있다고.’
치미는 대거리는 나중에 집에 들어가서 해도 늦지 않겠다.
학생들은 꾸역꾸역 들어오고 있다. 먼저 온 학생들은 자기들끼리 장난을 치거나 “뭐? 성교육? 무슨 성교육이냐, 성교육은.” 하품을 하거나 강사를 핼끔거리거나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벌집 쑤신 듯 웅성거리는 기미가 보이자 그가 지레 지휘봉을 휘두르며 “똑바로 앉아! 조용해! 야! 너! 너! 책상에서 발 내려!” 고래고래 소리지르기 시작했다. “애들이 감당이 불감당이에요.” 농담처럼 둘러대며, 버릇없는 자식을 둔 부모처럼 되려 강사에게 굽실댄다. 그쯤 해도 되련만 얼른 나가 방송실에서 각 교실로 방송을 한다.
“3학년 2반, 4반, 빨리 강의실로 내려갓! 안 내려가면 죽는다!”
방송으로 들리는 “죽인다!” 소리는 묘했다. 선생과 학생은 애증을 품고 이해관계 때문에 종일 쌍을 이루는 공범 같은 관계여서, 저런 증오어린 욕조차 정담처럼 쉽게 튀어나오는 건지 몰랐다.
학생들이 쫓기듯 우르르 몰려와 자리에 앉고 나서 혜선은 마이크를 잡아들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최혜선이라고 합니다.”
카랑카랑하고 밝게 인사를 했다. 무대에 나선 연예인이 그렇듯 생활의 구질구질한 때를 벗어버리고 스스럼없이 말을 시작했다. 상대가 천방지축 중학생이니까 더 그렇다. 처음에 호기심을 끌어내야 하고 십분 안에 집중시켜야 했다. 이것은 그녀의 밥벌이 일이었고 밥을 먹는 일이 그렇듯 일에 들어가서 혜선은 사심이 없었다.


  [불편한 방]    © 일다 -정은의 빨강그림판
“성 하면 뭐가 떠오르죠?”
학생들은 키득거린다.
“야동.”
“여관”
누군가 속삭인 말에 모두 큰소리로 웃어대며 강사의 표정을 살핀다. 아이들은 노상 그렇게 시작한다. 혜선은 ‘야동’을 말한 학생과 다른 반 학생 두어 명을 뽑아 앞에 불러 세웠다. 학생은 당차게 말한 것치고는 얼굴이 빨개져 몸을 비비 꼬면서 당장이라도 내려가려고 뒷걸음질한다. 일 년 가까이 이 일을 하면서 혜선은 요령이 생겼다. 학생들을 나란히 세워놓고 아이들의 이름과 반을 묻고 질문을 한다. 학년끼리 반끼리 경쟁을 시키거나, 남자와 여자끼리 묻고 대답하게 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놀랍게 집중한다. 그는 출입문 가까이 학생들 틈에 앉아 깍지 끼고 이쪽을 지켜보고 있다. 그가 보는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 그러니까 자신의 밥벌이 일을 보여준다는 것이 어쩐지 마음에 든든한 위로가 되었다. 이런 기분이 들다니 뜻밖이다. 그건 혼자가 아니라는 기분이었다.
앞머리를 뾰족하게 이마에 늘어뜨리고 쌍거풀진 큰 눈에 갸름한 턱선을 한 고운 소년이다.
“학생은 야동을 본 적이 있나요?”
고지식하고 차분하게 묻는 혜선의 물음에 소년은 깜짝 놀라 손사래를 치다가 나중엔 자기 혼자 본 게 아니라 친구들하고 봤다고 나직이 대답하며, 저쪽 누군가를 손가락질했다. 두어 명이 펄쩍 뛰며 “야! 시끄러! 죽인다!” 해쌓는다. 혜선도, 그도, 학생들도 다같이 웃었다. 재미있다. 무리 속에서는 그렇게 건방진 친구들이, 나와서는 모기만한 목소리로 자기 지식을 말하는 것이 재미있다. 끼리끼리 키득거리다 앞에서 갑자기 도학자처럼 입을 다무는 품이 어른들과 똑같다.
“선생님은 해봤어요?”
돌팔매처럼 질문이 날아온다. 학생들의 눈이 반짝인다. 혜선은 웃어넘겼다. 어떤 말을 해야 교육적인지 저울질해본다.
“선생님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모든 것을 다 할 줄 아는 사람이에요.”
“에이”
빗나간 대답에 아이들은 야유하고 그는 조금 얼굴을 붉힌다. 이런 농담에 익숙지 않은가 보다. 학생들이 다시 물고 늘어진다.
“선생님, 임신해봤어요?”
“결혼은 했어요?”
혜선은 질문하는 그 얼굴들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해보는 것과 임신과 결혼이 게임이름처럼 오르내리는 죄없는 입길을 본다. 그리고 말이 상대에게 어떻게 다가갈지 의식하지 않아 어떤 말이라도 지껄일 수 있는 순진무구한 잔인함을 본다.


그는 말이 많아지고 훨씬 유연해진 혜선의 모습을 응시했다. 대학생 때 만난 혜선은 언제나 혼자였다. 도통 재미라고는 없는 촌뜨기였다. 학생회관에서 이천 원짜리 밥을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에서 먹었고, 도서관에서도 강의실에서도 그랬다. 입을 꼭 다문 채 걸을 때는 팔을 몸에 붙이고 있었다. 친구들은 그 애를 ‘고장난 로봇’이라고 놀렸지만, 남한테 무관심한 그녀를 그다지 미워하는 사람도 좋아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는 어지간히 숙맥이었다. 처음 그녀와 같이 걷게 된 날, “앞으로 잘 사귀어 결혼했으면 좋겠다”고 수줍게 고백했다. “저는 결혼 같은 거 안 할 건데요.” 뜨악한 그녀의 말에 대뜸 기분이 상해 “그럼 뭐 하려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가버렸고, 다시 한번 더 만나기 위해 그는 얼마나 더 기다렸는지 모른다. 기다리는 데 이골이 난 그였지만 그녀를 기다리는 건 언제나 힘에 겨웠다. “왜 나죠? 나를 좋아하면 외로워질 텐데요.” 남의 일처럼 무안을 주는 그녀에게 “더이상 외로워질 수는 없을 것 같은데.” 하고 강경하게 들이대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그녀는 그와 눈길을 마주치는 것조차 피했던 것 같다. 다시 한번 그는 그녀가 한번도 자신을 좋아한 적이 없었다는 걸 느낀다. 그것은 그러니까, 이십대의 완전한 풋사랑이었다. 그녀가 여전히 자기를 아는 척하지 않고 명함을 내밀던 모습을 떠올렸다. 예나 지금이나 눈앞의 사람을 보지 않는 양 시선을 먼데 두고 무표정하게 정중하게 말하는 스타일이었다. 결혼했을까? 했겠지. 그러자, 그녀와 같이 밥을 먹고 잠도 자고 자기 아기도 가지게 할 그 남자에 대한 질투가 일어났다. 이런 기분이 들다니, 의외였다.
그녀는 막힘없이 말을 늘어놓는다. 물론 이 자리는 음담패설 시간도 아니고 성기 수업도 아니고 순결 서약 시간도 아니다. 그래서 혜선은 더 솔직하게 터놓고 얘기를 한다.
“한 남학생이 선생님한테 상담을 해왔는데 성기 크기가 작아서 고민이라더라, 클수록 만족한다고? 성기 크기 같은 건 아무 문제가 안 되는데 여자들이 정말 바라는 게 뭔지 모르는 것 같아.”
남학생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진다. 아가씨인지 아줌마인지 모를 여자가 나와서 성기 크기 운운하는데 졸음이 올 리 없다.
“한 여학생이 처녀막에 대해 물었는데 처녀막이 모든 여자한테 다 있고 무슨 창호지같이 북 찢기는 건 줄 아는가봐. 그게 절대 아니지.”
혜선은 목청 높여 이야기한다. 성기 크기나 처녀막 같은 거 사실도 아니고 의미도 없다고. 개중 어떤 아이는 갸우뚱할 것이고 어떤 아이는 그렇구나 할 것이고 어떤 아이는 위로를 받을 것이다.
혜선은 안다. 그 순간의 위로에 대해 자신은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을. 그것은 맞는 말이면서, 무책임한 말이다. 일테면 성폭력을 신고해야 한다는 말처럼 지극히 당위적인 말이면서도 더 상처받을지 모르는 말이다. 여성들의 권익은 마땅히 신장되어야 하지만 개인이 감내하는 고통은 더 늘어날 수 있는 말이다. 그것이 사실이어서 어쨌다는 건가. 그것이 옳다고 해서 그래서 어쨌다는 건가. 성기 크기 같은 것 아무것도 아니라 해도 줄 세우고 주먹질하면서 ‘니가 계집애야? 니가 애야?’ 하면서 사내가 되어가는 거고, 처녀막 같은 거 이름부터 잘못이라 해도 처녀가 제일 비싸니까 처녀행세를 하는 게 이익이라고 영악하게 계산하며 결혼시장에 가는데. 젊지도 늙지도 않은 혜선은 알고 있다.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고 서로 다른 내력은 언제나 서로 다른 내력일 뿐이라는 것을.
구석진 자리에 앉은 한 학생이 깐죽거리며 자꾸 딴말을 한다. 동성애 얘기가 나오자 “게이 새끼들, 다 죽여야 돼.”하고 내뱉고, 성폭력 얘기가 나오자 “그거 여자 눕혀놓고 옷 벗겨서 강간하는 거요.” 토를 단다. 그애는 분명 웃고 있었다. 혜선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녀는 생각한다. 동성애자나 여자에 대한 이 터무니없는 멸시는 어디에서 비롯한 것일까. 게이 새끼를 죽이고 여자를 옷 벗겨 강간해서 얻는 그 쾌락이란 건 도대체 무엇인가 하고.
그는 혜선을 계속 바라보고 있다. 그녀와의 마지막 만남을 기억한다. 눈이 오는 날이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 눈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사람이 오늘 결혼했어요.” 누구 말인가? 그는 무르춤해서 바보같이 혜선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그녀의 머리칼에 달라붙어  흩뿌려진 채 반짝거리고 있었다. “이상하네, 이런 기분일 줄은 몰랐어.” 여자가 내뱉듯이 말했다. “홀가분할 줄 알았는데, 버림받은 느낌이에요.” 그때도 그는 질투심을 느꼈다. 혜선이 마음 쓰고 있는 얼굴 모를 남자에 대해 맹렬한 질투심을 느꼈다. 그녀가 자신과 헤어지겠다는 말을 들어도 그보다는 더 나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눈이 오는 날 결혼하면 좋은 건가요? 나쁜 건가요?” 잔인하게도 혜선은 계속 물어댔다. “글쎄요.” 그는 속없이 웃어버렸고, “눈이 오는 날 결혼하면 잘 살게 되나요?” 눈치없는 혜선은 다시 물었다. 이번에 그는 침묵했다. 혜선은 목도리에 고개를 파묻고 눈만 내밀고는 어깨를 곤두세워 움츠렸다. “그러니까, 그가 나를 사랑한 건 아니었나봐요. 나를 좋아했다는 건 거짓말이에요.” 그는 그녀가 어린애처럼 군다고 여겼다. “그렇군요.” 그의 말을 듣고 혜선은 울었다. “그는 하나도 다치지 않았어요. 처음처럼 말짱해요. 나 혼자 아팠던 거라고요. 그 사람한테 나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었다고요.” 혜선은 주저앉아버렸다. 그리고 진짜 아이처럼 목을 놓아 울기 시작했다. 그는 나오는 대로 대답한 것을 후회하며, 쩔쩔매면서 그 옆에 쪼그렸다. 이런 때에 옷을 덮어주거나 눈물을 닦아주거나 멋진 멘트를 날리면 되는데, 하나도 생각이 안 났다. 한참 그러고 있다가, 그는 그녀 앞에서 걸었다. 눈 위에 발자국을 찍기 시작했다. 평균대 위를 걷듯 부러 기우뚱하면서 위태위태한 모양새로 앞모습을 뒷모습을 보이며 발자국을 찍어갔다. 유치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할 줄 아는 위로가 없어, 그녀가  우는 동안 그는 계속 그녀 주위를 맴돌면서 걸을 뿐이었다.


“좋아하는 여자는 어떤 여자예요?”
혜선은 남학생들에게 큰소리로 붙임성 있게 물어본다. 여기저기서 크고 작은 날치처럼 경쾌한 대답들이 튀어나온다.
“당근 예쁜 여자요.”
“키가 170cm는 넘고 날씬해야 돼요.”
“살림 잘해요.”
“머리 좋아야 돼요. 2세를 생각해야죠.”
낄낄거리면서도 수줍어하는 목소리들. 진심과 장난이 뒤섞인 대꾸들.
“여자는 예쁘면 다 용서돼요.”
“쭉쭉빵빵.”
남학생들의 말이 거침없어질수록 여학생들은 눈을 점점 모로 뜬다.
“지들은 못생긴 게”
“어휴, 재수 없어.”
“남자애들 얼굴 엄청 밝혀요.”
“야! 야! 그만해!”
혜선은 이번에 여학생들에게 묻는다. 그네들 얼굴이 단박에 누그러진다.
“키 크고 잘생긴 남자.”
“나만 사랑해주는 남자.”
“돈 잘 벌고 집안일 잘하는 남자랑 꼭 결혼할 거예요.”
“다 해주는 남자.”
여자애들은 꿈에 잠긴 듯 목소리도 달떴다.
“아휴! 말도 안 돼!”
한반에서 지지고 볶으며 도시락도 뺏어먹고 노트도 빌려 쓰고 말다툼도 할 남자애, 여자애들이 서로 못 말린다는 듯 외친다.
“솔직히 그런 남자 없어요! 하나도 없어요. 결혼해 보라지. 어디에 있나!”
“흥, 다 너네 같은 줄 알아?”
서로 이상형을 말하고 상대가 비웃으면 얼굴이 벌게져 목에 핏대 세우다가 이제 그런 남자, 여자가 어디 있냐고 입에 거품을 문다. ‘그런 남자 여자는 둘다 없단다’ 혜선은 아직 해맑은 십대의 아이들에게 이런 짓궂은 단정을 내려주고 싶었다. 김새는 인생훈계나 찬물을 끼얹을 참이다. 고만고만한 부모 밑에서 지내다 대학 가려고 아등바등하고 나와서는 또 마땅한 직장도 없고, 계약직 따위로 돌며 한 해 먹을거리에 고심하면서, 사랑도 연애도 두서없이 놓치다가 운좋게 짝 만나 애기 낳고는 곧 책임감에 눌려 낙타처럼 허위허위 어른이 되어가는 거란다.


엄마는 아직까지도 친구와 친척들에게 부끄러운 줄 모르고 줄기찬 불평을 들이대고 있을  것이다. 계약직 딸의 사글세 단칸방에서, 그 딸이 강의를 한 돈으로 사오는 쌀과 옷을 먹고 입으며, 엄마의 유일한 허위의식, 그 잘난 친정 조카의 편을 드느라 종일 싱싱하게 욕해댈 것이다. 축복받은 결혼식이라면 혜선은 입때껏 백번도 넘게 보았다. 엄마가 늘 자랑스러워했던 조카와 질부도 개중 한쌍이었다. 조카는 결혼식날 시를 써서 신부 앞에서 읽었다. “아름다운 그대, 그대만 떠올리면 잠을 들 수 없어 당장이라도 달려가 안고 싶은 내 마음, 순결한 내 신부.” 구절구절 상투적이고 우스웠지만 그걸 읽는 신랑의 얼굴만큼은 진지하고 얼어붙어 있었다. 스튜어디스였다는 신부는 발레리나 강수진처럼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우아하고 고왔다. 공인회계사인 유망한 신랑은 환하게 웃었고 신부는 그에게 두 손을 내밀며 행복해했다. 그렇게 잘 어울린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엄마를 보라. 부엌에서 썩어가는 음식들과 먼지 뿌연 방바닥 따위 등지고 앉아서 쉴새없이 일가친척에게 전화를 하며 늘어놓는 펄떡펄떡한 욕설들.
“남자가, 그래. 남자가 딴 여자를 사랑했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한번 잤다는데 그걸 갖고 이혼하자고 들어. 그년이 벌써 재산만 가로채고 도망갈 생각이 있었던 게요.”
“애는 왜 낳아, 애 하나 갖고 삼억을 달라네. 씹 갖고 장사하냐? 결혼할 때부터 색기가 있어 보이더니, 이제 아주 본색을 드러내는구만.”
“아이구, 아이구, 망했네. 우리 김씨 가문 망했어. 그 굴러들어온 깡패년 때문에 우리 조카가 이리저리 다 뜯기고 깡통을 차게 생겼는데 내가 뭔 낯으로 살아. 그 잘나고 씩씩하던 애가 달달 볶여서 아주 삶은 시레기같이 되어버렸다니까, 다 쓸데없어……”
예쁜 여자와 씩씩한 남자가 결혼해서 흔히 겪는 그 코메디 같은 참극을 떠벌이고 싶어 혜선은 심술궂게도 입이 근질거렸다. 남자나 여자의 역할극을 충실히 하면서 세상에 무턱대고 따르고 살다가 자기도 모르게 함정에 빠질 수도 있다고, 혜선은 때이르게 경고하고도 싶었다.
혜선이 엄마 얘기를 듣다못해 그만하라고 하면 엄마는 역정을 와락 내며 “성교육이 다 뭐야, 성교육이! 니년은 무슨 천 서방을 했길래 그런 얘기를 애들한테 하고 다녀!” 딴말로 달려들었다. 그건 없는 살림에 대학까지 나온 혜선이 대기업엔 취직 못할망정 구질구질한 일을 한다고 돌아다니는 데 대한 불만도 포함되어 있었다. 게다가 홀어머니에 외딸로 지지리 궁상을 떠는 현실 얘기보다 부잣집 조카의 비극에 동참하는 게 훨씬 신나는 일인 것이다. 아이들도 그럴 것이다. 냉정하기만 한 현실보다는 자기를 무조건 구원할 왕자나 폭력을 당해도 좋다고 교성을 내는 여자 따위가 더 재미날 것이다. 아까 강간 어쩌고 하던 학생을 혜선은 잊지 않고 말꼬리에 지목한다. 알고 있는 걸 다른 친구들에게 설명해보라고 했다.
“나 아무 말도 안했어, 씨팔!”
사내애가 외친다.
그는 안쓰러운 눈으로 혜선을 지켜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평소대로 “너, 이리 나와!” 하고 지휘봉으로 녀석을 한대 후려치거나 무릎을 꿇게 해 벌을 세울 터였다. 그러나 외부강사에게 양도한 시간이니만큼 최대한 자제하고 그녀의 자리를 지켜주려고 했다. 그는 이제 알 수 있었다. 입고 있는 철지난 정장처럼 때타고 구김진 혜선의 생활을, 학생들에게 시달리며 목이 쉬게 외치는 고단함을, 자기한테 씹을 하겠다고 덤비는 당돌한 남자애 앞에서 강한 척 하지만 여전히 안쓰럽도록 여린 낯익은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었다. 혜선은 사태를 빨리 수습하려고 한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탓도 있다. 교실 뒤 시계를 보더니 빨리 결론을 짓고 있다.
“성관계는 인간관계예요. 성을 가지고 힘으로 위계로 남을 지배하려는 건 성폭력이에요. 사랑은 말이죠, 일방적인 행동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이성에게 진정한 관심과 보살핌을 주는 상호 소통인 거지요.”
학생들은 혜선의 교과서 같은 말을 듣지 않는다. 첫마디가 나오자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집중하다가도 조금 재미가 없다 싶으면 금방 흩어져버린다. 다행히 혜선이 때맞춰 사인을 보내고 그가 영상을 틀어줄 준비를 하자, 학생들은 불이 왜 꺼졌나 싶어 조용해진다. 역시 비주얼 세대라니까. 그는 안심한다. 스크린에 비친 화면에는 고만고만한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나온다. 학생들은 숨을 죽였다. 빨간 장미꽃이 선물로 오가고 둘은 비디오방에서 키스를 한다. 어느새 남학생의 손이 여학생의 가슴으로 가고 있다.


콘돔이며 페미돔이며 루프 따위 피임기구가 탁상 위에 흐트러져 있다. 혜선은 그것들을 꼼꼼히 확인하며 챙긴다. 학생들이 실습하느라 주물럭거린 흐물흐물한 콘돔도 휴지에 싸서 뭉쳐 버렸다. 어느새 목이 좀 잠겨 있다. 그러나 “구성애 선생님!” 하고 쉬는 시간에 곁에 다가와서 “지금 남친 사귀고 있는데 같이 들었어요, 제가 말하고 싶었던 거 같이 들어서 참 좋았어요.” 하던 여학생과, “콘돔 하나 얻어갈 수 있어요?” 하고 일없이 머리를 긁적이던 남학생을 떠올려보면 오늘도 헛걸음을 친 건 아닌 것 같았다. 남들한텐 그냥 시답잖은 수업일지 모르지만 또 이렇게 나름대로 만족해한다. “이거 여자 편 드는 수업이죠. 기분 나빠요.” 개중에는 따지러 오는 예민한 남학생들도 있었지만, 적어도 성이 자기들이 생각한 것 말고 다른 게 있다는 걸 전달하려고 그녀는 애썼다.
혜선이 조촐한 자족감에 싸여 있을 때 그가 다가왔다.
“수고하셨습니다.”
이번에 그가 정중히 인사한다.
“예. 감사합니다.”
혜선은 네 시간을 연달아 강의해 얼굴이 발그레했고, 좀은 경계를 푼 편한 표정이었다. 잘 했다고, 그만하면 괜찮은 수업이었다고, 악동이들 데리고 고생 많았다고 그는 초보 강사에게 허물없이 칭찬해주고 싶었다. 혜선은 묵묵히 가방을 챙긴다. 평생 사람은 안 변하는 거구나, 자신만의 침묵이 오롯이 몸에 밴 혜선을 보며 그는 속으로 웅얼거렸다. 학생들 앞에서 달변을 토하던 빛나는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처음 올 적 그대로 담담하고 메마른 모습이다.
“저녁식사를……”
그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태연하게 말했지만 어떤 열망과 자제로 눈이 커져 있었다. 그녀는 가만히 있었다. 그 침묵이 길어졌을 때 그는 거절당한 것을 알았다. 눈앞에 그녀의 손이 있었다. 작고 마디마디가 도톰한 손이었다. 한번쯤 잡고 싶었던 앳된 손이었다. 혜선은 결혼을 했구나, 다시 확신했다. 저녁에 집에서 기다리는 남편과 자식이 있겠구나.
“집에 바로 가봐야 해요. 오늘, 안 되겠군요.”
거절을 하는데, 그녀의 눈은 처음으로 따뜻하고 촉촉한 빛을 띠었다.
“아, 그럼.”
그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까지 그랬듯 남자답게 빨리 체념하고, 가난한 학교의 주임교사로 돌아온다.
“강사료는 결재가 되는 대로 입금하겠습니다. 그리고 통장사본이 필요하다는군요. 주민등록증도요, 절차상 필요하다고 해서……”
이미 혜선은 모든 걸 준비해두고 있었다.
“금액이 너무 적어서 죄송합니다.”
통장을 손에 들고, 그는 무언가 더 해주고 싶은데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듯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연히 통화하고 어쩌다 만난 사이, 앞으로 더 볼일도 그럴 필요도 없는 것이다. 어른인 둘은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 인사를 나눈 후에는 서로 뒤돌아보지 않고 등을 돌렸다. 혜선은 학교를 나와 운동장을 가로질러갔다.


 [Touch me Not]  ©일다 - 정은의 빨강그림판
남자아이의 손이 여자아이의 가슴으로 가고 있다. 키스. “오빠, 난 싫어.” “왜? 넌 나 좋아하지 않아?” “그래도 난 지금 하고 싶지 않아.”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넌 아닌 거야? 이리 와봐.” “나는 지금 하고 싶지 않으니까, 안 할래.” 또박또박 말하는 화면 속 열 몇 살 여자아이. 외로운 산길에,
캄캄한 밤, 덮쳐오는 입술, 이게 뭐지? 사랑해, 혜선아. 숨죽이고 있는, 옆에서 속삭이는.  짝짝이로 멍울이 져 아파오는 가슴에. 자고 있니? 자지도 깨지도 못하는, 얼어붙은. 미끄럽고 부풀고 축축하고 비린 입술, 뺨을 핥는 끈적한 혀. 사랑해, 널 사랑해. 왜 그래, 오빠? 가만 있어, 쉬, 착하지, 엄마가 깔아준 이불 위에서, 외사촌들끼리 한 이불에서 자라고 깔아준 깨끗한 요 위에서. 발자국은 모두 아흔 일곱 개, 하나하나 세어보았지. 하얀 눈을 으깨어 밟은 발자국, 푸른 빛이 감도는 얼룩덜룩한 발자국, 발자국이 내던 뽀드득 소리, 이불 위에 하나하나 찍혀가는 발자국.
거칠게 가슴을 파고드는 손길, 여기는 어딜까? 거머리같이 들러붙는 검은 그림자, 길손 드문 산길에, 겨울해 다가도록, 혼자 남았네. 발자국, 하나하나 선명하게 찍혀가던 발자국들, 천사의 날개자국처럼 새하얀 발자국, 가만가만 따라 밟아가야 하는. 홀로 이 방을 빠져나가는, 길을 아는 발자국, 세상의 모든 곳은 아침, 이곳만 영원한 밤, 하늘에서 내리는 재처럼 검은 눈. 비명을 황급히 막는 손. 살살 할게. 살살. 사정하는 목소리, 울 것 같은 목소리, 죽일 것 같은 목소리, 오빠는 검은 색, 이불도 검은색, 흐르는 피도 검은색, 희디흰 것은 웃고 있는 입 같은 발자국,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 같은, 아무도 떠나지 못하는 이 방을 혼자 떠나는, 나무 너머로, 고개 너머로, 자박자박 걸어가는 발자국.
아, 아, 아파. 엄마한테 말하지 마, 절대로. 쉬고 숨가쁜 목소리, 사랑해, 혜선아, 너무 사랑해. 넌 너무 예뻐. 너 때문이야. 니가 좋아서 그래. 여기는 산속, 아무도 없어. 오빠도 엄마도 찾아오지 않는 이곳에, 편히 쉬어라. 발자국은 가버린 것도 돌아온 것도 아닌 꼭 그만큼 거리에서. 손을 잡아주는 것도 놓는 것도 아닌 꼭 그만큼에서 반짝거리고, 피냄새, 비린내, 들큰한 냄새, 등돌리고 떠나며 아비처럼, 어미처럼 손짓하며 우리 같이 가자, 저 너머로 아주 가자꾸나, 속삭이는데, 위협하지도 재촉하지도 않고 영원히 기다려주는 등불들이. 


날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오늘 나는 아이들에게 성교육을 했고, 엄마의 전화를 받았고, 그리고 언제나 잊지 않고 그리워했던 그를 만났다. 그래서 다시 떠오른 것뿐이다. 눌러버려도 다시 되살아나는 기억. 아직 누구에게 말하지 않아, 여전히 어린 모습으로 갇혀 있는 비밀을. 세상에 태어나 한번 겪은 폭력은 세상에서 한번 받은 사랑의 기억으로 덮일 수 있을까. 문득 코끝이 싸해진다. 낮은 목소리로 고백을 할 수 있다면 그렇게 말했을지 모른다. 고맙다고, 그가 보여준 사랑이 내 악몽이 거느린 유일한 빛이었다고, 골방에서 혼자 입때껏 자라날 수 있었던 환상이었다고, 내 비밀만큼이나 깊숙이 몸 안에 들어와 어둠을 견딜 수 있게 한 나의 노래였다고, 혜선은 언제나 하고 싶었던 인사를 끝내 입 밖에 내어 말하지는 못하고 교문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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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rah 2009/07/29 [15:49] 수정 | 삭제
  • 단편소설 재밌네요.
    저는 개인적으로 어두운 느낌이 좀 아쉽지만, 잘 읽었습니다.
  • 행복한 girL 2009/07/29 [09:53] 수정 | 삭제
  • 쉬지 않고 읽어내려갔습니다.
    늘 곁에 있을 법한 친구. 혜선.
    쪼그리고 앉아서 울던 그녀가 펑펑 다 울지 못해 아쉽습니다.
  • 파랑 2009/07/24 [08:25] 수정 | 삭제
  • 잘 읽었습니다.
    리얼리즘 문학이라고 할만큼 학교와 교실 풍경이 눈에 선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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