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가운’의 정치학

<김효진의 다른 생각> 정체성이 충돌하는 순간

김효진 | 기사입력 2009/12/13 [21:25]

‘하얀 가운’의 정치학

<김효진의 다른 생각> 정체성이 충돌하는 순간

김효진 | 입력 : 2009/12/13 [21:25]
김효진님은 <오늘도 난, 외출한다>의 저자이며, 장애여성네트워크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장애여성단체, 장애인단체들과 연대하면서 순간순간 예민하게 부딪치는 지점이 생긴다. 언뜻 서로가 지나치게 사소한 일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꼼꼼히 되짚어보면 그것은 결코 개인적이거나 단순한 맥락이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맥락이 있기에 부딪히게 되는 문제들이다.
 
얼마 전 일이었다. 한 장애인단체의 연대회의에 참석하고 나서 함께 식사를 하게 됐다. 회의참석자 대부분이 중증장애를 갖고 있어서, 편의시설이 구비된 식당을 찾기도 어렵고 이동하는 데도 시간이 많이 걸리는 상황을 고려해 회의실에서 배달음식을 먹기로 합의했다. 설렁탕과 굴 국밥 중 하나를 선택해 배달되어 온 음식을 먹고 있는데, 회의를 주관한 단체의 단체장이 인사차 회의실로 들어왔다. 그런데 그 단체장은 ‘하얀 가운’ 차림이었다.
 
그 단체장은 한의원을 경영하는 한의사인데, 단체사무실이 한의원 바로 맞은편에 있었기에 진료 중 잠깐 짬을 내 인사하고자 들른 것이었다. “바쁘신데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이들 드십시오” 하고 인사를 건넸는데, 아주 잠시였지만 왠지 모를 어색한 분위기를 느꼈다.
 
“회장님이 가운을 입고 나타나시니, 마치 시설의 원장님 같으시네요.” 
어색함을 풀어보고자 건넨 농담이었다. 그런데 아차 싶었다. 약간 권위적인 느낌을 주는 사람을 빗대어 우리 단체 회원들과 스스럼없이 주고받는 농담이었지만, 때와 장소가 다른 만큼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걸 감안했어야 했다.
 
‘시설의 원장님’과 장애인의 관계
 
‘시설의 원장님’은 장애를 갖고 있는 우리들에겐 매우 권력적이며, 장애인을 대상화하고, 나아가 장애인을 이용해 사리사욕을 채우는 인물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굳이 그런 나쁜 인물이 아닐지라도, 시설에 수용되어 있는 장애인은 최소한의 자기결정권도 누릴 수 없다는 점에서, 시설을 유지해야만 하는 원장들과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있다.
 
대부분의 장애인들은 시설에 수용되어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지역사회에서 비장애인과 마찬가지의 삶을 누리고 싶어 한다. 하지만 지역사회가 장애인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며, 오랜 세월 유지되어왔던 시설을 하루아침에 없애지 못하기에, 아직도 시설에 수용되어 있는 장애인이 많다. 그 장애인단체나 우리 장애여성네트워크나, 반(反)시설을 주장하는 점에서 입장을 같이하고 있기에 자주 연대해왔던 건데, 그런 농담을 건네고 말았으니….
 
“시설의 원장은 가운을 입지 않죠. 주방장이라면 모를까…. 제가 졸지에 주방장이 되어버렸네요.”
 
다행히 그 단체장은 내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하긴 시설의 원장님이 흰색 가운을 입는 경우는 없을 법했다. 그런데도 흰색 가운을 입은 채 나타난 그에게서 왜 권위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던 걸까? 그것은 아마도 간호사, 상담사, 치료사, 사회복지사들과 시설 원장이 동일시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사회적 약자로서의 정체성을 느끼게 될 때
 
장애를 가진 우리는 그들을 가리켜 ‘전문가집단’이라고 한다. 지금은 장애인당사자의 목소리가 꽤 커졌기에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장애가 있는 우리들에게 위압적인 존재로 느껴진다. 심지어 우리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존재로까지 여겨진다. 그것은 우리와 관련된 문제에 있어, 우리 자신의 경험과 요구는 무시된 채 ‘전문가집단’이 우리를 대변해왔던 지난 역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얀 가운’에서 전문가집단에 의해 좌지우지되어야 하는 약자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곤 하는 배경과 맥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장애인단체장 입장에서는 잠시 인사나 하려고 들렀다 졸지에 권위적인 시설 원장님 같다는 소리를 들었느니 상당히 불쾌했을 듯하다. 하지만 장애여성활동가 입장에서는 장애남성단체의 권위주의적인 문화로 인해 늘 섞이기 어려운 경험을 하고 있기에, 무심코 던졌던 농담이 그저 웃자고 한 소리만은 아니었던 것 역시 사실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활동을 하다 보면, 소통과 존중보다는 명령과 복종에 익숙한 수직적인 문화로 인해 가까이하기 참으로 버겁고, 그렇다고 멀리하자니 고립될 것이 뻔하므로 매우 예민한 지점에 스스로 서있음을 절감하곤 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장애여성들만의 천국을 만들자는 것이 아닌데다, 그것이 가능하지도 않다고 여기기에 매순간 긴장 지점을 확인하면서 성찰, 또 성찰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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