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수배] 총파업 끝나고 얘기하자

독자 | 기사입력 2003/04/30 [23:18]

[공개수배] 총파업 끝나고 얘기하자

독자 | 입력 : 2003/04/30 [23:18]
1997년 1월 대학생이었던 나는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설마 설마 했는데 임신테스트 결과는 2번 다 양성으로 나왔던 것입니다.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당시 선택할 수 있는 길이라곤 낙태를 하러 병원에 가는 일밖에 없다는 생각까지 미치자 너무나 두렵고 괴로웠습니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심정이었고 며칠 간 잠도 못 자고 얼굴이 누렇게 된 채 학교와 집을 몸만 왔다갔다했지요. 부모님에게, 친구들에게, 언니에게도 사실을 밝힐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남자친구에게는 임신사실을 알리고 상의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어찌됐던 나의 자궁에 있는 아기의 아빠니까 함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남자친구는 나와 다른 대학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 남자는 소위 말하는 ‘노동운동’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내가 그와 만난 것도 어느 집회에서였죠. 평소 나는 내 남자친구가 같은 또래 다른 남학생들보다 사회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만큼 생각이 깊고 어른스럽다고 생각해왔습니다.

드디어 남자친구를 만나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린 날. 나는 내 얘기를 들은 남자친구가 “피임을 하지 않아 미안하다”고 말하거나 나와 함께 울어주리라 예상했지만 그의 반응은 전혀 달랐습니다. 초조한 나와는 달리 남자친구는 짜증난다는 듯 ‘휘유~’하고 한숨을 내쉬었을 뿐이었습니다.

며칠을 식음을 전폐하고 끙끙 앓았던 나에 비해 남자친구는 아주 냉담한 모습이었습니다. 당황한 내가 무슨 말이라도 꺼내보려고 하자 남자친구는 이 한 마디를 툭 던지면서 내 말문을 막더군요.

“야, 총파업 끝나고 나서 얘기하자.”

나는 혼자 낙태를 결정하고, 혼자 병원을 알아보고, 혼자 수술을 받았습니다. 내겐 낙태의 후유증만큼이나 남자친구에게서 받은 상처가 큽니다. 그 모멸감. 당시 나의 심정은 아마 아무도 모를 겁니다. 그 와중에 혼자 고상하게 노동자를 걱정하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기가 막히고 분노했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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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자 2003/05/07 [17:32] 수정 | 삭제
  • 난 그 둘을 매도하고싶어진다
    왜냐구?

    어린애 아니잖어..실수한거..강간하거나 당한거 아니잖어..
    그런데 왜 피임을 않했어..
    그리구 남자만 피임한다는 법이 어딨나..

    서로들 준비를 했어야지..
    그게 남자탓이든 여자탓인든
    결국은 생명이 죽었잖어

    둘다 실타..

    그런남자를 제대로 파악하지못한 죄또한
    남의 책임이 아니쥐..그리구 반드시 피임해..

    남자가 알아서 피임해주길 바라는건 아니지 결코?
    제발 피임들해..
  • 털털이 2003/05/06 [02:26] 수정 | 삭제
  • 참담하단 생각을 했습니다.
    여성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것 같아요.
    모욕감같은 거.....

    분한 일들이 많은데 그 분노는 늘 자기자신에게로 향하죠.
    분노를 다 꺼내놓고 싶어요.
    모든 여성들이 그렇게 한다면 세상도 바뀔텐데 말이에요.
  • untilwewin 2003/05/04 [17:47] 수정 | 삭제
  • 그들..

    조국이건 노동계급이건.. 그리고 내가, 우리가 얼마나 치열하게 사랑했건 간에, 그것은 짝사랑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아무리 많은 여성동지들이 그 조직안에 있어도 지도자는 늘 남성이어야 '정상적'이라고 생각했던, 그렇게 생각하기를 강요했던 그들의 조작이었습니다.

    몇천년을 억압받는 인구의 반은 보이지 않지만 분단된 조국의 현실과 착취받는 프롤레타리아는 선명하게 보였던 그들 중에 하나가, 내 사랑하는 친구에게 청혼하면서 했던 말이 생각이 나네요.

    "내가 운동 열심히 할테니까 너는 우리 부모님과 동생들, 그리고 내 옥바라지와 활동비를 책임져 줘"

    하, 그 말을 듣고, 내 친구, 감동하면서 울었더랬습니다.. "열심히 할께" 하면서 말이지요..

    후에 옥에 5년간 갇힌 그 남자친구를 위해서 그의 식구들을 먹여 살리고 조직활동도 계속하고 영치금을 넣고, 결혼도 하기 전에 그가 원했던 역할들을 충실히 하던 그 친구를, 그 남자는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나이 어린 후배 여자아이와 사랑에 빠졌다,며 간단히 정리했었지요..

    알고 모르면서 여성에게 저지른 각종 범죄들로 수배대상이 되어야 하는 많은 '개새끼들'이 유시민처럼 되고 싶어서 안달인 꼴들을 보면서 '총파업이 끝나면 얘기하자'고 했던 그 넘같은 그들을 '동지'라는 이름으로, 나와 우리로 같이 테두리를 둘렀던 어리석음과 순진함을 억울해 합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어서 기쁩니다. 이를 악물고 목소리를 내어서 '공개수배합니다' 말하고 있으니까요.

    그들은, 결국은 포기하거나 투항하게 될 것입니다. 잡아내고, 노출시키고, 비판하고, 죄를 묻는 일을,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기는 커녕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우리들이 있는한 말이지요.

    solidarity until we win
  • 속상해-- 2003/05/04 [11:08] 수정 | 삭제
  • 끔찍한 일을 겪고나서 헤어졌습니다. 그제서야 내가 눈을 제대로 못 뜨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죠. 한꺼풀 벗겨지고 나니 그 남자는 한심하고 비열한 엘리트 운동권이었을 뿐이었습니다. 당당하게 살고자 했던 나에게 그는 진짜 무력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었습니다. 여자로 사는 게 얼마나 억울한 일인지 알게되었습니다. 몇 달간 죽고싶었던 기억이 나요. 더 두려웠던 건 그 남자로 인해 나같은 일을 겪을 사람들이 많을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에요. 생각하기 싫은 일들이지만 이렇게 공개적으로 얘기가 되니 조금 한풀이가 되는 것 같네요.
  • 비슷한경험 2003/05/02 [23:16] 수정 | 삭제
  • 저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분석을 해야할지모르겠죠. 여자남자로 이야기해야할지 사람대 사람으로
    말해야할지..
    아니면 사랑이니 아니니 말해야할지..

    참으로. 아무튼 여자는 애를 낳던 낙태를 하던 여자몸에서만 일어나는 일이기에.
    책임은 결국 여자가 떠맡게되어있지요.
    남자는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심각성이 아니기에 사실 무책임하답니다. 피임에..


    그렇게 임신을 하거나. 임신을 할까 두렵거나. 산부인과에 가야할때.
    남자친구에게 그사실을 이야기하거나 이야기하기전에 거절당하거나 그반응이
    두려울때.. 저는 제가 비굴해지는걸 느꼈어요. 약자가 되는 느낌.
    참 이상하죠? ㅠㅠ.

    여자측이 조심해야하는 수밖에 없는것같아요.

    많이 상처받았습니다.
    당황해하고 오히려 짜증내는 남자에게.
  • Tori~ 2003/05/02 [20:05] 수정 | 삭제
  • 최악의 운동권이군여..
    운동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필요조차 없는 반쪽짜리..사람임다.--;
    그래가지고 노동운동하겠어요.
    여성주의적관점이 없는 노동운동은 오히려 여성주의자들을 억압하잖아여--;
  • 베이브 2003/05/02 [14:14] 수정 | 삭제
  • 나쁜 놈들이 많아요.... 지들은 지가 나쁜 줄 알고 사는지..... 너무 화나고 슬프네요..
  • 충형된눈 2003/05/02 [09:47] 수정 | 삭제
  • '일다'는 여러분의 적극적인 의견개진을 환영합니다.
    기사(또는 칼럼)의 내용과 무관한 상업광고,인신공격,비방,욕설,음담패설 등은 지양해 주십시오.
    때문에 참습니다.
    더러운 자식!
  • 화나 2003/05/02 [02:08] 수정 | 삭제
  •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게 남자라니깐.
  • 으음 2003/05/01 [23:27] 수정 | 삭제
  • 운동권내에서 일어나는 성폭력이나 성희롱 문제도 상당히 많죠. 이상하게 운동권남자들 중에는 마초들이 많은 듯. 왜 그런 걸까요.
  • 보람 2003/05/01 [19:57] 수정 | 삭제
  • 다행히임신은 아니었지만 임신인줄 알고 불안했던 때가 있었죠. 남자들은 섹스에는 목을 매면서 임신은 나몰라라하죠. 끔찍했던 경험이..... 이해가안되죠.
  • 샤랄라 2003/05/01 [14:23] 수정 | 삭제
  • 정말 중요한 것이 뭔지 모르는 놈~ 그러나 나도 그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 그냥 안타깝네요
  • 나쁜여자 2003/05/01 [13:27] 수정 | 삭제
  • 짜증나. 나쁜놈들.
  • 열받어 2003/05/01 [11:43] 수정 | 삭제
  • 늘 언제나 운동한답시고 대의명분 운운하며 떠들어대는 XX들은 이런 상황에선 똑같은 행태를 보이는 것 같습니다.
    정말 열받지 않을 수 없죠.
    우습기도 합니다.
    얼마나 자신이 모순속에 빠져 있는지 스스로에 대한 냉정한 상황파악이 되질 않고 있는거죠.

    한심한 그대여!
    제발 좀 똑바로 살으소!
  • ㅇㅇ 2003/05/01 [09:31] 수정 | 삭제
  • 진짜 열받네요 으아아악~~ 그놈에게 말해주고 싶네요. 너 자신보다 민중을 우선시한다는 따위 말은 집어쳐. 그것은 '너'의 문제가 아니었던 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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