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월 대학생이었던 나는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설마 설마 했는데 임신테스트 결과는 2번 다 양성으로 나왔던 것입니다.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당시 선택할 수 있는 길이라곤 낙태를 하러 병원에 가는 일밖에 없다는 생각까지 미치자 너무나 두렵고 괴로웠습니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심정이었고 며칠 간 잠도 못 자고 얼굴이 누렇게 된 채 학교와 집을 몸만 왔다갔다했지요. 부모님에게, 친구들에게, 언니에게도 사실을 밝힐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남자친구에게는 임신사실을 알리고 상의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어찌됐던 나의 자궁에 있는 아기의 아빠니까 함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남자친구는 나와 다른 대학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 남자는 소위 말하는 ‘노동운동’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내가 그와 만난 것도 어느 집회에서였죠. 평소 나는 내 남자친구가 같은 또래 다른 남학생들보다 사회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만큼 생각이 깊고 어른스럽다고 생각해왔습니다. 드디어 남자친구를 만나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린 날. 나는 내 얘기를 들은 남자친구가 “피임을 하지 않아 미안하다”고 말하거나 나와 함께 울어주리라 예상했지만 그의 반응은 전혀 달랐습니다. 초조한 나와는 달리 남자친구는 짜증난다는 듯 ‘휘유~’하고 한숨을 내쉬었을 뿐이었습니다. 며칠을 식음을 전폐하고 끙끙 앓았던 나에 비해 남자친구는 아주 냉담한 모습이었습니다. 당황한 내가 무슨 말이라도 꺼내보려고 하자 남자친구는 이 한 마디를 툭 던지면서 내 말문을 막더군요. “야, 총파업 끝나고 나서 얘기하자.” 나는 혼자 낙태를 결정하고, 혼자 병원을 알아보고, 혼자 수술을 받았습니다. 내겐 낙태의 후유증만큼이나 남자친구에게서 받은 상처가 큽니다. 그 모멸감. 당시 나의 심정은 아마 아무도 모를 겁니다. 그 와중에 혼자 고상하게 노동자를 걱정하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기가 막히고 분노했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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