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선 고향땅에서 ‘조국’을 느끼기까지

재일동포 리정애 이야기 (상)

리정애 | 기사입력 2010/11/12 [02:20]

낮선 고향땅에서 ‘조국’을 느끼기까지

재일동포 리정애 이야기 (상)

리정애 | 입력 : 2010/11/12 [02:20]
[편집자 주] 글쓴이 리정애씨는 ‘조선적(朝鮮籍)’을 가진 재일조선인 3세로, 얼마 전 한국 남성 김익씨와 결혼했습니다. 민족21이라는 잡지에 연재한 ‘재일동포 리정애의 서울체류기’가 10월 초 책으로 묶여져 나왔으며 일다에서도 소개한 바 있습니다.
 
‘조선’ 국적은 ‘일본에 거주하면서 대한민국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적을 갖지 않고, 일본에 귀화하지도 않은 이들이 갖는 행정상의 적’입니다. 여권이 없는 ‘조선적’자들은 일본출국 시 매번 출입국관리사무소가 발행하는 ‘재입국허가서’를 가지고 여행을 떠납니다. (일다기사 ‘조선적(籍)’자의 변치 않은 현실 참조)
 
또한 한국에 입국 시에는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아야 입국이 가능합니다. 북한은 재일동포들을 다 ‘해외공민’으로 삼아 국적을 따지지 않고 받아주기 때문에 이러한 증명서를 발급받지 않고도 입국이 가능합니다.
 
한국정부에서는 조선적 재일조선인을 ‘북한국적자’로 보는 시선이 존재합니다. 정권이 바뀐 후 최근 들어 특히 조선적 재일조선인에 대해 여행증명서 발급을 거부하는 사례가 증가했습니다. 리정애씨 또한 결혼식을 앞두고 주오사카 한국영사관으로부터 여행증명서 발급을 세 차례에 걸쳐 거부당했습니다. 이후 언론과의 적극적 인터뷰 등을 통해 저항한 리정애씨의 노력으로 간신히 3개월 기한의 여행증명서를 발급 받아 한국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일다는 리정애씨의 목소리를 통해 조선적 재일조선인의 현실을 외면하고 억압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살펴보는 기사를 2회에 걸쳐 마련합니다.
                                                                                                  
 
나는 재일조선인 3세다. 고등학교까지 일본학교를 다녔고 일본이름으로 살아왔지만 어릴 때 가정교육 덕분에 내가 조선 사람이며 이름이 리정애라는 것은 항상 내 머리 깊숙이 있었다.
 
또한 내 조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것도 인식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역사시간에 그 어렵고 긴 정식 명칭을 배웠을 때, 한 글자도 빠짐없이 말하고 쓸 수 있도록 몇 번이나 연습하기도 했다.
 
고등학생시절, 내 외국인등록증의 기재되어있는 ‘국적 등’ 란에 ‘조선’, ‘제주도 한림면’이라는 것을 보고 갑자기 의문이 생겼다. 내 국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인데 왜 남조선인 제주도가 같이 기재되어 있을까? ‘본적지’라서 그런가?
 
그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 국적 ‘조선’이 조선민주주의공화국의 국적이 아니라는 것을. 일본정부가 멋대로 만들어낸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16살 이상이면 발급되는 외국인등록증 ‘항상 휴대’해야
 
▲ 조선적 재일조선인 3세 리정애씨.     
해방 후, 일본정부는 외국인등록제도를 시행하여 일본에 남아있었던 조선인들을 외국인으로 규정했다. 일제시대 ‘황국공민’ 정책아래 강제로 ‘일본인’으로 만들었다가 다시 마음대로 ‘외국인’으로 바꾼 것이다. 외국인이 된 조선인에게 ‘식민지조선’, 조선반도 출신자라는 뜻에서 조선적을 부여했다. 일본정부는 조선적을 ‘편의상’의 것이며 ‘기호에 지나지 않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를 ‘난민’ 취급 하고 있다. ‘조선’이라는 존재하지 않는 나라의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우리 조선 사람들을 또다시 망국노로 만든 것이다.

 
16살 때였다. 집에 엽서가 한 통 왔다. ‘외국인등록증명서’를 발급받으라는 통고였다. 우리는 16살이 되면 외국인등록증을 발급받아 그것을 항상 휴대해야 한다. 위반하면 벌금죄다.
 
통지 엽서를 봤을 때 거부감과 불안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당시에는 아직 우리 특별영주자도 ‘지문날인’을 해야 했다. 일본에서는 지문을 찍는 것은 범죄자들뿐이었기 때문에 거부하거나 반대운동을 하는 동포들도 많았다. 나는 그 당시부터 문제의식이 강했기 때문에 지문날인을 거부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다. 나는 범죄자가 아니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사람이 거부를 해서 체포됐다는 뉴스가 보도됐다. 거부하면 잡힌다. 무서워졌다. 접수기한이 다 될 때까지 버텼지만 어머니의 ‘그러다가 진짜 잡힌다.’는 말에 결국 찍고 말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권력 앞에 무릎을 꿇은 순간이었다. 나는 이제 어떤 권력에도 굴하지 않을 것이다. 그 정신은 우리 민족의 넋이다. 솔직히 말하면 일본에서 잡히는 것은 지금도 두려움이 있다. 남의 나라이기 때문일까. 그러나 고향땅에서 감옥에 들어가는 것은 두렵지 않다. 이미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다. 밥이 맛있고 방이 깨끗할지, 보자기(전통 조각보 만들기는 리정애씨가 공들여 하는 작업 중 하나다-편집자 주)를 할 수 있을지가 걱정이긴 하지만.
 
재일동포인 나의 뇌 속까지 침범한 국가보안법
 
이명박 정권으로 바뀌고 나서, 아니 바뀌기 몇 달 전부터 갑자기 만화를 연재해 나가는 것이 힘들어졌다. 예전보다 더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못하게 됐다. 바로 국가보안법 때문이다. 너무 괴로웠다. 이 나라에는 언론의 자유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가. 옳은 것을 옳다고 못하는 나라. 너무나 분하고 분했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은 언제인지 나도 모르게 재일동포인 내 뇌 속까지 침범했었다. 내가 쓴 글을 내가 검열하게 되었다. 그래도 하고 싶은 말, 해야 할 말은 하자. 나는 그때 마음을 먹었다. 나에게는 나를 이해해주고 도와주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두렵지 않다.
 
예전에 남쪽 고향땅은 조선적 총련동포인 나에게는 멀고 먼 존재였다. 성묘를 목적으로 한 ‘고향방문단’으로 평생에 단 한 번 갈 수 있을까 말까하는 곳이었다. 실제로 갔다 온 이모 이야기로는 양복을 입은 남자 두 명이 계속 뒤를 따라붙었다고 한다. 자칫 잘못하면 남몰래 끌려가 고문 끝에 실종당하는, 그런 곳이라는 인상이 들었다.
 
2000년에 6·15공동선언이 발표된 후로부터 모든 것이 바뀌었다. 우리도 비교적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게 됐으며 고향땅은 더 이상 무서운 곳이 아니었다. 난생 처음으로 고향땅을 밟은 것은 2004년 가을이었다. 그때는 그냥 여행으로 어머니, 이모들과 함께 동해안이나 설악산을 구경했다.
 
8·15를 우리 땅에서 맞이하는 기쁨
 
남쪽을 자주 찾게 된 계기는 2005년 여름이었다. 신문에서 일본의 동포NGO단체가 주최하는 역사탐방 투어가 있다는 기사를 봤다. ‘8.15민족대축전 참가’, ‘나눔의 집과 서대문형무소 방문’이라는 내용을 봐서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2005년 8·15민족대축전은 이름 그대로 북과 남, 해외가 함께 하는 대축전이었다. 통일이 멀지 않다, 아니 이제 되어가고 있다(!)고 느꼈다. 그때 감격과 감동은 5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8·15를 우리 땅에서 맞이하는 기쁨과 반가움도 알게 됐다. 8·15는 조국해방의 날이며 통일의 날이다. 일본에서는 패전국이 된 굴욕적인 날이다. 8월만 되면 언론들이 다 원폭 피해를 입은 피해국 입장만을 주장한다. 진짜 피해자는 식민지 지배를 당한 우리 민족인데 말이다. 그래서 매년 8월에는 매일처럼 열 받았고 지겨웠다. 나는 그 후로부터 매년, 8월 15일을 계속 서울에서 지낼 것을 결심했다.
 
몇 번 왕래하고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낮선 고향땅이 살고 싶은 곳으로 됐다. ‘재일동포? 일본사람이지.’ 그런 소리를 들어본 적도 몇 번 있었지만 내가 우리말을 할 줄 알고 우리가 일본에서 계속 차별받으면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자 같은 민족으로 인정해 주게 된다. 나를 동포라는 것만으로 따뜻하게 대해주는 사람들. 그들 속에 나는 조국을 느낀다. 민족이라는 것이 얼마나 좋고 고마운 것인지 느낀다. 이제 살고 싶은 고향땅은 내가 살아나가야 하는 곳이 됐다. 내가 여기서 살 수 있게 된 그날, 남쪽 땅도 내 나라가 될 것이다.
 
*다음편에서는 한국정부의 여행증명서 발급거부와 한국 국적 취득 강요에 대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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