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만화 속 여자 만나기] 이미라와 황민화

순한 만화가의 제멋대로 나쁜 분신들

홍문보미 | 기사입력 2003/04/30 [23:20]

[여자만화 속 여자 만나기] 이미라와 황민화

순한 만화가의 제멋대로 나쁜 분신들

홍문보미 | 입력 : 2003/04/30 [23:20]
황미나의 <이씨네 집 이야기>는 그리 추천할 만한 만화가 아니다. 특히 여성으로서의 자의식이 있는 여성이라면 읽다가 화병이 생기거나, 혹은 만화 속으로 들어가 저 지독히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가발을 당장 벗겨 내고픈 충동에 시달리는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간단히 말해, 이 만화는 한
국적 가부장제의 첨단을 걷는 가족의 오싹한 일화들을 안온한 정과 따스한 웃음으로 둔갑시켜 '어쨌든 이게 가족이고 또 이게 좋은 거니까 그냥 이러고 살아' 라고 속삭이는 만화인 것이다.

게다가 이 만화 속 여성캐릭터들은 얼마나 무시무시한가! 인내와 순종의 어머니들이든, 예쁘고 조신하고 남자 비위 기막히게 잘 맞추는 애인상이든, 허영심 넘치는 바보신데렐라든 여자만화에서 보기 힘들 정도의 비현실적인 스테레오 타입의 여성들이 넘쳐난다.

날 묶는 규범 따윈 없다 '황민화'

그런데 이 오싹한 만화 속 신기하게 튀는 캐릭터가 있으니 바로 황민화이다. 그녀는, 안하무인의 성질 나쁜 여자. 세상에 두려울 것 없다. 남녀간의 성적인 접근도 이 여자에게 두려운 일이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상대 남자에게 무시무시한 일이 된다. 시어머니에게도 '시끄러워요!'하고 소리치는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을 삭히지 않는다. 세상 관습에 잘 따라가는 순한 일화들에 어울리지 않는 여자.

엽기적인 그녀라고? 아니다, ‘엽기적인 그녀’도 실은 사랑에 눈물 흘리고 노인공경 잘 하고 부모 무서운 줄 아는 알고 보면 착하고 한국적인 여성 아닌가. 그런데 건방진 황민화는 세상이 오로지 자기 마음이다. '조폭마누라'도 '가족의 정'이라는 신파에 붙잡히고 모성이데올로기에 슬쩍 무릎 꿇는데 이 영악한 아가씨는 오히려 그것들을 이용한다.

그런데 웬일일까? 황미나가 황민화에게 보내는 애정이란! 엑스트라 격에서 어느 틈엔가 조연급으로 부상시키더니 갖은 에피소드에 다 내보낸다. 그녀와 별 관련 없는 에피소드에도 대사 한마디 얼굴 한번은 꼭 비추게 하더니, 에필로그에서도 (이씨네 직계가족도 아니면서) 가장 많은 사진을 찍게 한다. 이 정도면 조연이 아니라 주연급이다. 게다가 이름도 '황민화'가 아닌가.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황미나가 남자 입맛에 잘 맞는 그림과 시대착오적인 내용으로 이름 높은, 가부장제 규범을 잘 지키는 만화가라는 사실이다. 반면 황미나 자신의 분신으로 설정한 황민화는 규범 따위는 신경도 안 쓰는 여자이며, 작가가 애정을 조금만 덜 주었어도 바로 악역으로 설정될 법한 캐릭터이다. 왜 황미나는 자기를 이런 식으로 그려냈을까?

거칠고 쓴맛을 보여줄게 '이미라'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미라의 순정신파극 <인어공주를 위하여>에서도 이 비슷한 캐릭터가 나온다. 이슬비의 언니로 이름도 작가를 그대로 딴 이미라이다. 그녀 역시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캐릭터이다. 주인공 이슬비가 힘은 좀 세도 실은 여자답고 소녀다운 아이이며, 이슬비 어머니 역시 겉으로는 폭력적이지만 사랑 앞에서는 사르르 녹는 '알고 보면 천상 여자' 캐릭터인 데 비해, 이미라는 어디로 보나 가부장제 사회의 여성/소녀 이미지와 먼 곳에 있다. 소녀적인 면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타인에 대해 조금도 배려하지 않는, 자기 마음대로만 행동하는 나쁜 언니. 심지어 이미라는 황민화처럼 예쁘지도 않다. 머리는 항상 헝클어진 커트, 외모에는 전혀 관심 없어 보인다.

이미라 만화의 순하고 달콤한 환상들은 세상 규칙에 어긋남이 없는데, '제멋대로 나쁜 언니- 이미라'는 전혀 순하지도 달콤하지도 않는다. 이미라의 만화 세계와 작가의 분신은 오히려 서로 반대쪽에 가있다. 캐릭터 황민화와 만화가 황미나가 엇갈리는 맥락과 같다. 이러한 엇갈림은 어디서 오는걸까?

이봐, 우리 만화는 너무 남자를 배려하는 거 같지 않아?

황미나와 이미라 만화 속의 여자들은 남자캐릭터들을 지나치게 배려한다. 그리고 그녀들의 만화 역시 남자중심의 이 세상에게 지나치게 배려하고 있다. 그 점을 생각할 때 황당할 정도로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는 두 캐릭터- 황민화와 이미라는 그야말로 이단이며 어떤 의미로는 탈출구이다.

나쁜 분신들을 집어넣으면서, 작가들은 여성에게 '남자에 대한 배려'가 끊임없이 요구되는 자신의 만화 속 세계를 자기도 모르게 파열하려는 걸지도 모른다. 사실 어느 여자에게 이 갑갑한 세상이 그저 좋기만 하겠는가. 설탕물 뿌리고 꽃치장하고 장밋빛 안경을 쓴다 해도 현실의 딱딱한 벽은 여전히 느껴지는 거다. 비록 숨겨진 채 그 모서리만 드러난다 하더라도 그 균열은 슬쩍 드러나고야 만다. 마치 황민화와 이미라의 존재가 그러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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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무현 2021/06/16 [03:13] 수정 | 삭제
  • 18년전 기사노 응디따악
  • 아이하라 2003/05/07 [16:21] 수정 | 삭제
  • 전 평범한 주인공들이 나와서 우왕좌왕 왁자지껄하게 사고치면서 사는 얘기들을 깔깔거리면서 봤거든요.
    공부못하고 못생기고 씩씩한 이슬비도 좋고, 이씨네집에 나오는 다소 황당하지만 주변에서 본것같은 인물들도 좋았어요.
    그 책 읽으면서 `참고 살아라`란 속삭임은 들리지 않았는데...ㅡㅡ;
    오히려 고정관념을 많이 깼다라고 생각했습니다.
  • 마르스 2003/05/04 [09:51] 수정 | 삭제
  • 슬비,장미,푸르메 맞죠? 야, 옛날 얘긴데 기억이 나네요.
    오랜만에 인어공주를 위하여 표지를 보니 반가와요.
    그때 이 만화 안 보는 애들이 없을 정도였죠.
    내용은 신데렐라 이야기에다가 현모양처 이야기였는뎁.
    푸르메가 깡패에 꽃미남에 착하기까지 했고
    슬비는 매력이라곤 없는데 현모양처형이고 등장하는 남자 모두가 좋아하는.
    유치뻑적지근한 만화였는데 그래도 다시 한 번 보고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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