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에서 구럼비를 만나다

홍보람 <붉고 푸른 당신과 나 사이-제주 강정>展

이충열 | 기사입력 2012/05/17 [00:02]

종로에서 구럼비를 만나다

홍보람 <붉고 푸른 당신과 나 사이-제주 강정>展

이충열 | 입력 : 2012/05/17 [00:02]
▲ <붉고 푸른 당신과 나 사이-제주 강정> 전시장 입구
조계사 건너편의 좁은 골목길을 여기저기 기웃기웃 찾아 헤매다 유난히 좁은 골목에 빨강 파랑 물결과 사다리가 작은 전시장의 입구를 알려주었다.

 
반가운 마음에 사진부터 찍으려는데, 지나가시던 40대 여성분이 “여기 뭐 있어요?”라며 관심을 보이셨다. “강정마을 관련 전시가 있어요.”라고 친절하게 답했는데, 대뜸 “왜요? 해군기지 반대요? 일본과 중국은 영토를 넓힌다고 난리인데, 우리도 해군들이 지켜줘야지 왜들 이러나 몰라.”하시며 혀를 끌끌 차셨다. 전시 관람 이전부터 뭔가 머리가 복잡해졌다. 하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작은 전시장 입구에 들어섰다.
 
전시장 입구에는 손으로 직접 그리고 쓴 전시장 안내도가 비치되어 있었다. 작가의 소박한 정성에 마음이 따뜻해지려는데, 들어서자마자 거대한 이미지가 펼쳐진다. 압도되는 걸 싫어하는 나는 조금 불편해지려한다. 그런데 먹물이 머금고 뿜어낸 이미지들은 형용할 수 없는 신비로움을 담고 있었다. 대체 무엇을 어떻게 그린 걸까 한참을 들여다보는데, ‘아!’ 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이것은 그림이 아니었다. 구럼비였다!
 
사실 ‘구럼비를 그리거나 강정마을을 재현하여 서울에서 전시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하는, 약간은 회의적인 마음으로 전시장을 찾았다. 그런 내 눈 앞에 구럼비를 흉내낸 그림이 아닌, 구럼비가 와 있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구럼비를 탁본한 것이었지만, 인간이 무언가를 닮게 그려낸 이미지에서 절대 표현해낼 수 없는 감성과 역사가 느껴졌다. 구럼비를 그리지 않고, 구럼비를 직접 만지고 두드리며 느끼고 소통하여 데려온 작가에게 신뢰감이 생겼다.
 
구럼비들을 지나 칸막이로 만들어진 작은 공간에는 두꺼운 도화지로 만들어진 긴 원통이 매달려있었다. 좀 허술하게 생긴 그 원통의 안쪽에는 작은 모니터가 설치되어 원통을 통해서 들여다볼 수 있다. 모니터 안에는 구럼비 위에 작가가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동틀 녘, 해질 녘, 해진 후 등 다양한 시간대에 파도 소리, 바람 소리, 곤충 소리, 새 소리 등 다양한 생명들의 소리가 들려온다. 한참을 서서 그들의 소리를 듣던 작가는 ‘아-’하고 조심스레 소리를 내어본다. 자연의 소리와 작가의 소리가 합쳐진다. 아-. 그 나지막한 소리는 숨이 다할 때까지 길게 들려온다. 하지만 결코 크지도 높지도 않다. 가만가만히, 하지만 최선을 다하는 듯 소리를 낸다. 나는 어디에 서서 어떤 소리를 내고 있는 걸까? 뭔가 뭉클하다.
 
▲  홍보람, 자연과 함께 그림, 195x110, 천에 잉크, 2011

한참을 서서 원통을 들고 안을 들여다보다 힘이 들어서 조금 뒤에 마련된 방석에 앉았다. 하얀 벽에 동그란 까만 구멍이 있고 그 안에 네모난 세상이 따로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딛고 있는 이 세상, 서울 한복판의 시간과 가치와 저 화면 너머의 그것들은 매우 다르게 느껴진다. 이제 구럼비 위에는 작가뿐 아니라 아이들이, 어른들이 함께 ‘아-’하고 소리를 낸다. 나도 저들과 함께 하고 싶다.
 
이 때, 건물 안 여기저기에서 들리는 자그마한 소음이 다른 세계로의 여행을 방해했다. 이 소리들에 집중하고 싶어져서 다시 일어나 원통을 잡고 그 안에 머리를 넣었더니 외부의 소리가 차단되고, 그 세상의 소리가 더 또렷하게 들려온다. 이곳에 딛고 있는 발을 들어서 원통 안으로 들어가 구럼비 위에 서고 싶어진다. 온전히 자연과 생명이 서로 존중하며 서로 보듬고 있는 그 곳으로 가고 싶어진다.
 
작가는 꽤 오랜 기간 구럼비와 함께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소중한 것이 파괴되어 가는 과정을 보며 아픔을 온몸으로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관객에게 무언가를 강요하지는 않는다. 단지 작가가 느낀 것을 관객이 함께 느낄 수 있도록 도와줄 뿐이다.
 
[토끼도 울음을 우나요?]라는 제목의 이 비디오 설치는 관객이 원하는 거리에서, 원하는 만큼 참여하고 느낄 수 있는 ‘여지(餘地)’를 준다는 점에서 자연을 닮았다.
 
▲  홍보람,  토끼도 울음을 우나요, 1분38초, 2009년- 2001년

전시장 한쪽에는 작은 방도 있었다. 그동안 작가가 해왔던 작업의 여정과 강정마을사람들과 함께 진행한 프로젝트가 놀이방처럼 푹신한 바닥과 함께 설치되어 있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하는 그 곳은 관객에서 휴식을 청하는 것 같았다.
 
작가가 오랜 기간 동안 사람들과 만나고 소통했던 작업들이 바닥에 옹기종기 놓여있어 그것들을 들여다볼 수도 있고, 그냥 벽에 기대어 앉아서 천천히 움직이는 아이들의 강정마을 그림과 주민들의 이야기를 보고  있어도 좋다.
 
<붉고 푸른 당신과 나 사이>라는 전시의 제목처럼 한국사회는 ‘붉은’ 또는 ‘푸른’ 두 가지 색으로만 사람을 나눈다. 이 이분법 안에서 ‘당신과 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를 연결하기를 소망하는 작가의 마음이 느껴지는 전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연을 재현하고 정복하려는 인간의 허황된 욕망과 교만함을 넘어서, 있는 그대로의 자연과 교감하는 작가의 태도가 좋았다.
 
전시장 입구에서 만난 분처럼 인간의 이기심으로 자연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인간보다 오랜 삶을 살아온 자연과 그 역사를 ‘그냥 느끼라’고 제안하는 전시인 것 같다. ‘구럼비 파괴에 반대한다’는 구호가 그리 와 닿지는 않을 서울 사람들에게 구호보다 훨씬 호소력 있는 전시를 열어주어 감사하다.
 
▲    홍보람, 마음의 지도-제주강정, 가변설치, 2011

   ○ 전 시 명 : 홍보람 <붉고 푸른 당신과 나 사이-제주 강정>
   ○ 주    최 : 평화박물관
   ○ 기    간 : 2012. 5. 25(금)까지
                    11:00-19:00 (토, 일 11:00-17:00) / 월요일 휴관
   ○ 장    소 : space99 (서울 종로구 견지동 99-1)
   ○ 전시부문 : 설치,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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