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을 미혼모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다

[입양 다시 보기] ③ 입양특례법 재개정 공청회를 앞두고

권희정 | 기사입력 2013/03/25 [23:37]

‘입양’을 미혼모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다

[입양 다시 보기] ③ 입양특례법 재개정 공청회를 앞두고

권희정 | 입력 : 2013/03/25 [23:37]
아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개정된 입양특례법이 오히려 ‘아동 유기를 조장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입양특례법 재개정 공청회를 앞두고 있다. <일다>는 ‘입양’을 둘러싼 문제들을 ‘여성의 양육권’와 ‘아동의 인권’ 차원에서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필자 권희정씨는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에서 사무국장으로 일했으며, 현재 미혼모와 입양에 관한 논문을 준비 중이다. [편집자 주]
 
‘미혼모를 보호한다’는 논리의 상반된 방식
 
입양아동의 출생신고를 의무화하고, 태어나서 1주일 간은 친부모가 입양 여부를 숙고할 수 있도록 한 ‘입양특례법’에 대해 논쟁이 많다. 미혼모가 출생신고를 꺼리기 때문에 이 법이 ‘아동 유기’를 조장하고 있으니 재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측의 논리를 살펴보자.
 
▲ 1969년에 아기를 입양 보냈던 미국 조안나 위브의 책 『Birth Mother』 표지 이미지
요약해서 말하면 ‘경제적 능력이 따르지 않고 미혼모라는 낙인을 두려워하는 미혼모들을 보호하고, 버려지는 아이는 입양을 보내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평생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호적 때문에 결혼도, 취직도 쉽지 않을 것인데 그런 굴레를 씌우는 것은 가혹한 것”(입양특례법 재개정추진위 대표 인터뷰, <주간동아> 2013년 2월 25일자)이라고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을 보며 끊임없이 의문이 생긴다. 경제적 어려움과 낙인 때문에 엄마가 아이를 유기한다면 우리 사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입양특례법 재개정을 주장하는 측의 문제 제기가 오히려 답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이를 버릴 수밖에 없는 미혼모를 보호해야 한다고 하지만, 법의 재개정 방향을 보면 오히려 ‘미혼모’라는 신분이 굴레가 되는 사회를 더 보호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법 재개정을 요구하는 측에서는 아이가 출생 등록을 하지 않더라도, 입양기관에서 친부모의 인적 사항에 관한 정보를 가지고 있으니, 나중에 커서 친부모와 만나게 될 수 있을 거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먼저 던져보아야 할 물음은 이것이다. 나중에 친부모와 만나는데 문제가 없다면, 왜 처음부터 헤어지지 않도록 도와줄 생각은 하지 않을까?
 
또한 입양 숙려기간 동안 엄마가 아이와 머물 곳이 없어 문제가 된다면, 숙려기간을 없애는 것이 답일까, 아니면 아이와 있을 곳을 마련해주는 것이 답이 될까? 어린 아이라도 어느 쪽이 정답인지 알 수 있는 문제일 것이다. 태어난 아기에게 물어본다면 어느 쪽이 좋다고 할까? “엄마가 너랑 사는 것에 대해 생각해볼 시간을 주는 게 좋겠니, 엄마와 네가 지낼 곳이 없으니 지금 널 입양 보내는 게 좋겠니” 라고 말이다.
 
우리는 사회의 진보와 더 윤리적인 공동체를 원하면서도, 왜 ‘어떤 문제’에 있어서는 이토록 변하지 않고 오히려 퇴보하는 쪽으로 향하는 걸까?
 
미혼모들 목소리를 내다: 에블린의 이야기
 
195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서구 사회에서는 한편으로는 근대 결혼 중심의 가족제도의 질서를 잡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혼외 임신’에 대해 통제했다. 그 시기 많은 입양이 이루어졌다. 결혼제도 밖에서 태어난 아이를 결혼한 부부에게 입양 보내는 것이 미혼모 자신과 아이를 위한 일이라고, 누구나 그렇게 여겼다. 일단 입양이 이루어지면 아이를 떠나 보낸 미혼모와 입양된 아이는 그저 잘 살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1970년대 말부터 많은 여성들이 아이를 포기했다는 죄책감과 아이를 잃어버린 슬픔으로 평생 고통 속에 지내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뉴질랜드에서 미혼모란 이유에서 아이를 결혼한 부부에게 입양 보내야 했던 조스 셔어(Joss Shawyer)가 쓴 『입양으로 인한 죽음』(Death by Adoption, 1979)이란 책은 많은 사람들이 입양 문제를 미혼모 여성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시작한 첫 기폭제가 되었다. 이후 입양으로 아이를 잃은 많은 여성들이 자조모임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나누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 2011년 5월 27일 이화여대에서 열린 “비혼모, 입양과 젠더법” 학술대회에서 자신의 사례를 발표하는 에블린 로빈슨.   © 권희정
에블린 로빈슨(Evelyn Robinson)은 열정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여성들 중 한 명이다. 2000년 『입양과 상실: 은폐된 슬픔』(Adoption and Loss: Hidden Grief)이란 책을 통해 무기력하게 입양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경험과, 입양에 대한 올바른 관점은 무엇인지에 관한 저작 활동과 강연, 교육을 하고 있다.

 
에블린은 1949년 스코틀랜드 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대학에 다니던 1969년 우연히 만난 남자에게 데이트 성폭력 상황을 경험하며 임신을 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사회는 여성의 혼전 순결을 강조하고, 피임약은 오직 결혼한 여자만이 처방 받을 수 있었고, ‘데이트 성폭력’이란 개념이 없어 자신이 겪은 일을 언어화할 방법이 없었다.
 
기독교 신자였던 에블린 스스로도 결혼 전까지는 순결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혼전 임신은, 더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 사이에 생긴 아기는 너무 견디기 힘든 사건이었다. 하지만 더 가슴 아팠던 일은 임신에 대한 주변의 반응이었다.
 
“오랫동안 나를 알던 사람들이 나에 대해 추측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분명히 오랫동안 난잡한 생활을 했을 거라고 수군거렸다. 아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느냐고 물었을 때는 난 거의 돌아버릴 거 같았다. 아이 아버지가 누군지 알 뿐 아니라 임신이 된 바로 그날까지 알고 있다. 교회 사람들은 마치 임신은 나 혼자만으로도 할 수 있는 것처럼 반응했다. 아무도 어떻게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해 하지 않았고, 아무도 아이 아버지는 탓하지 않았다. 나 혼자 나를 곤경에 빠뜨리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정말 놀라운 상상력이었다.
사람들은 마치 내가 전염병 환자라도 되는 것처럼 나를 피하기 시작했다. 나의 모든 것은 사라지고 오로지 재생산 능력으로만 판단되고 있었다. 나는 무기력함 속에 그저 그들의 태도에 분개할 뿐이었다.” (『입양과 상실: 은폐된 슬픔』)

 
에블린이 다니던 교회 사람들이 “죄를 속죄하는 방법은 결혼한 좋은 부부에게 아이를 입양시키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녀는 교회를 믿은 만큼 그들의 이야기를 온순하게 따르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입양에 동의했으면서도 날이 갈수록 그녀가 확신하게 된 건,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도 싫고 아이 아빠도 미웠지만, 한 번도 아기를 미워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에블린은 “정부에는 어떤 보조금도 없었고 가난한 학생”이었기에 입양 결정을 번복할 수는 없었다. 주변 사람들은 “모든 걸 잊고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을 해서 새 출발을 하면 된다”고 위로했다. 아이와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점점 더 강해졌지만, “아이를 혼외자라는 낙인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에블린은 아이가 “입양되었다는 낙인 속에 자랄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고”, 사람들의 말과 달리 “아이를 한 번도 잊고 산 적이 없다”고 고백하고 있다. “입양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해결책 같지만 입양 보낸 엄마와 입양 보내진 아이에게 모두 옳지 못한 일”임을 그녀는 힘주어 강조하고 있다.
 
한국 사회의 변화는 언제 올 수 있는 것인가
 
▲ 에블린 로빈슨과 그녀의 잃어버렸던 아들 스테판 (1998년)
그리고 이제 서구 사회는 바뀌었다. 1980년 대 후반 에블린은 결혼해서 낳은 4명의 아이에게 잃어버린 아이에 대해 털어놓았는데, 아이들의 반응은 완전히 바뀐 당시 상황을 잘 말해주고 있다.

 
“아이들은 놀랐고 화를 냈고 울었으며 나를 비난하기도 또 동정하기도 했는데, 한결같이 ‘어떻게 우리 가족을 입양 보낼 수 있었냐’고 의아해 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10대였을 때 미혼모였던 것이 얼마나 수치였으며 불명예스러운 일이었는지 어렵게 설명해야 했고, 미혼모는 결혼한 커플에게 아이를 주어야 아이에게 최선의 이익이 된다고 믿었다는 것을 겨우겨우 설득시켰다. 하지만 아이들이 이해하기란 여전히 힘든 노릇이었다.”
 
1970년 사회의 편견과 낙인 속에 아기를 입양 보낼 수밖에 없었는데, 약 20년 후 그러한 상황은 설명하고 설득시키기 매우 어려운 일이 된 것이다.
 
에블린이 겪은 이러한 변화를 경험하기엔 우리 사회는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고 이야기할 것인가? 우리 사회가 미혼모 또는 가난한 여성이 계속 아이를 포기하는 상황을 용인하는 제도를 옹호한다면, 변화는 도대체 언제 올 수 있는 것인가?  (연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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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그네 2013/04/27 [22:52] 수정 | 삭제
  • 미혼모가 호적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아무 꺼리낌 없이 지낼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혼전성관계나
    미혼모를 오히려 조장 할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 태어난 생명을 죽게 할수는 없는것이겠구요. 가장 좋은것은 미혼남녀가 혼전순결과 혼전임신에대한 명확한 인식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생명존중의 의식도 있어야 하구요. 그래서 미혼모의 발생을 최대한 억제하고 혹시 미혼모가 되더라도 아이를 없던것으로 하고 새출발을 하려는것보다 아이의 출생에 대한 책임을 질려는 마음자세가 필요합니다.
  • 불금 2013/03/29 [18:14] 수정 | 삭제
  • 이 연재 정말 좋네요. 미혼모가 아이를 키울수 있는 사회, 그것은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고 현실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더 많이 알려야한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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