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북 상주시 함창읍 함창버스터미널 맞은편에 있는 “카페 버스정류장”.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머무는 이 까페의 문을 연 박계해 선생님은 “학교를 떠나 산골로 들어간 한 여자의 귀촌일기” <빈집에 깃들다>의 저자입니다. -편집자 주
날씨 탓일까, 점심시간마다 들리는 단골 은수마저 오지 않는다. 같이 마시려고 참고 있던 커피를 한 잔 내린다. 한 모금 마시는데 피아노의 선율이 쇼팽의 녹턴으로 넘어간다. 물병자리인 나는(정녕 그래서?) 비와 녹턴과 에스프레소 한 잔이면 허파 가득 바람이 들기에 충분하다. 비바람에 일렁이는 짙푸른 보리밭을 바라보며 슬며시 가슴이 부풀어 오르더니 버스정류장도 기차역도 택시 승강장도 길만 건너면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생각과 행동이 동시에, 어떨 땐 생각을 맺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이는 나는 벌떡 일어나 딸의 방으로 갔다. “뭐해?” 딸은 모니터에 눈을 박고 인체 크로키연습 프로그램에서 초 단위로 움직이는 여러 가지 포즈들을 크로키 하고 있다. “바빠?” “왜?” “좀 나갔다 오려고.” “어디 가는데?” “그냥, 어디 좀......” “언제 와?” “글쎄, 가봐야 알지.” “........” “나가지 말까?” “........” “응?” “크로키 하는 것 십 분이면 마치니까 좀만 기다리세요.” 이야기를 하는 중에도 눈은 모니터를 보고 있고 손은 스케치북 위를 날고 있다. 딸아이는 자신을 과대평가하거나 비하하지도 않고, 오르지 못할 나무를 쳐다보는 일도 없는 현실주의자에다,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자기 스케줄이 그 무엇보다 우선인 개인주의자다. 하루 종일 골방에 틀어박혀 있어도 그날의 일정이 정해져 있다. 30분짜리 크로키 수업도 매일 한다. 감상에 휘둘려 충동적인 일 따윈 하지 않는 딸의 무덤덤한 얼굴을 본 것만으로도 평정심이 생겨버렸다. 어디를 가서 무엇을 하고 싶은 건지, 뭘 타고 갔다가 언제 어떻게 돌아올 건지를 생각해야한다는 자각만으로도 허파에 가득 찼던 바람이 다 빠져버린 것이다. “커피 한 잔 줄까?” “라떼로~!” 딸은 만화를 업으로 삼으려는데 시중에 나오는 월간만화잡지의 공모전에 당선한 것이, 그것도 대상 수상작을 내지 못한 해여서 ‘당선작’으로만 뽑힌 것이 이력의 전부이고, 대입검정고시를 통과한 것이 최종학력이다. 결국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 할 수도 있겠지만 그 과정만큼은 나무랄 데 없이 밟고 있다. 나는 어미로서의 역할을 ‘자녀교육에 무심하기’로 정하고 완벽하게 실천해 왔으며 지금은 ‘자녀의 삶에 무심하기’의 경지까지 도달했다. 아마도 내 살림이 좀 넉넉했다면 이런 간 큰 짓을 하지 못했으리라. 어쩌다 아르바이트로 그림 그리는 일감을 얻기도 하지만, 이렇다 할 경제활동을 하진 못하고 있어서 가끔 초조해 하기도 한다. 카페운영을 받아 업으로 삼으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더니 바쁠 때 도와주긴 하겠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싫다고 했다. 일주일에 한 번은 ‘대중스토리 작법’에 관한 강의를 들으러 서울에 가는데 간 김에 서점에도 가고 영화도 보고 콘서트 장에 가기도 한다. 그리고 일 년에 한두 번은 친구들과 여행도 하지만, 대부분의 날들을 집의 가장 구석에 있는 작업실 책상 앞에서 보낸다. 검정고시 출신이라 전공분야 운운하며 취업을 할 처지는 못 되고, 품위유지비 들여가며 어설픈 직장에 다니느니 시간이 좀 더 걸리더라도 하고 싶은 걸 하기로 한 것이다. 나의 막역한 친구는 이 상황을 ‘햇볕도 안 드는 구석방에 처박혀서 젊음을 다 썩힌다’며, 이십대인 딸을 그렇게 살도록 방치하면 안 된다고, 그 나이에는 연애를 하고 돈을 벌고 세상과 온몸으로 부딪히며 살게 해야 한다고 어미로서의 내 태도를 나무란다. 나도 안다. 그러면 좋다는 것을-. 그러면 좋은 일이 어디 한 두 가지일까. 인연이 닿아 운명의 사람을 만나게 되면 하고야 마는 것이 연애고,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할 처지라면 그 또한 해야만 하겠지만, 전형적인 결혼의 절차를 밟을 형편도 안 되는 데다 당사자가 감지하지 못하는 일에 내가 조바심을 가질 필요는 없으리라. 배우고 싶은 내용이나 과정을 스스로 선택해 온 덕분에 당연히 공부에 대한 거부감이나 의무감이 없는지라 아직도 배울 것이 무궁무진해서 시간 죽이기를 할 틈은 없어 보이니, 딱하기는커녕 슬며시 부러울 따름이다. 게다가 또래들에 비해 교육비를 덜 쓴 만큼 돈을 벌어야 한다는 부담도 덜 가질 권리가 있지 않을까. 크로키를 마쳤는지 으따따따, 하며 기지개를 켜는 딸에게 카페라떼를 건넸다. “쌩유~, 마암~. 나 머리감고.......” “마, 됐거덩, 나 안 나가니까 네 일이나 해.” 녹턴이 끝나고 에스프레소 잔도 비었다. 결국 비도 그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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