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에 눈뜨다, 나의 욕망과 직면하다

<나의 페미니즘> 여성주의 활동가 나랑 (2)

나랑 | 기사입력 2013/06/06 [03:26]

차이에 눈뜨다, 나의 욕망과 직면하다

<나의 페미니즘> 여성주의 활동가 나랑 (2)

나랑 | 입력 : 2013/06/06 [03:26]
<일다> 창간 10주년 기획 “나의 페미니즘”. 경험을 통해 여성주의를 기록하고 그 의미를 독자들과 공유하여 대안담론을 만드는 기획으로, 이 연재는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의 지원을 받습니다. -편집자 주
 
‘형님’문화 노동조합에서 ‘여성’활동가의 갈등
 
공장에서 여성노동자들과 함께 여성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여성으로서 나의 정체성을 자각하게 되었고 나의 삶과 일상도 다른 눈으로 보게 되었다. 대공장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로서 하루에도 수차례 ‘내가 남성이라면 굳이 할 필요 없는 선택’을 해야 했고, 그 선택 앞에서 무수히 갈등하고 고민해야 했다.
 
주변에서 일하는 정규직 남성노동자들이 야한 농담을 하면 어떻게 받아쳐야 할까부터, 식당에 밥 먹으러 갈 때마다 쏟아지는 신기한 듯 쳐다보는 시선에 어떻게 대응할까(특히 삭발을 했을 때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나의 성별을 확인하려고 가슴 쪽을 계속 쳐다보는 모습이라니!). 그리고 단식을 푼 남성 간부를 위해 챙겨주라며 나에게 죽을 갖다 맡기는 여성 간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심지어는 여자화장실이 너무 먼 데(남자화장실보다 개수도 훨씬 적다.) 지금 갈까 아니면 좀 더 참았다 갈까 하는 고민까지.
 
처음 현장에 발 디뎠을 때, 내가 만일 노조 간부를 맡게 된다면 ‘조직’ 분야에서 일하고 싶었고 어느 정도 자신감도 있었다. 남성은 정책이나 조직을 맡고, 반면 여성은 총무나 회계를 맡는 식의 성 역할이 구분되는 ‘운동사회 내부의 가부장성’에 대한 비판을 접할 때, 솔직히 내 문제일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헌신성과 능력이 떨어지는 여성활동가들의 투정으로 치부했다.
 
하지만 현장에서 3년을 보내고 막상 조직국장 자리를 제안 받았을 때 난 주저했다. 여성 간부는 사측에서도 얕잡아봤으니, 사측을 대면하는 데에 남성적 카리스마가 필요했고, 그래서 무슨 일이 생기면 여성조합원들도 남성 대의원이 와 주길 원했다.
 
당시 노조 전임자 4명 중 나만 여자였는데, 누군가 돌아가셨을 때 나한테는 물어보지도 않고 남자 셋끼리 상가에 갔던 일도 있었다. 활동에서 비중 있게 여겨지는 소위 ‘정치’나 ‘외교’라는 것은 남성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남성적 가치와 강점이 우선되는 능력주의, 성과주의적인 운동 풍토에서 매일 나 자신을 검열하는 것은 우울한 일이었다.
 
<페미니즘의 도전>을 쓴 정희진이 ‘한국남성들은 공적인 영역에서 여성들을 상대하는 법을 모른다’고 했던가? 이미 ‘형님’문화가 고착화되어 있는 대공장 남성활동가들 사이에서 형도 아니고 아우도 될 수 없는 나는 낄 자리가 없었다. 현장 활동 초반에 나는 몇몇 정규직 남성 활동가들과의 관계에서 폭력성을 경험했다.
 
그들이 호감을 표현하는 방식이 나에게는 폭력이었다. 술 먹고 집으로 오겠다고 하질 않나, 대뜸 사랑한다고 문자를 보내질 않나, 문제제기하겠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나를 동등한 활동의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았다. 성적 대상이 되거나 농담 따먹기 하는 아주 사적인 관계가 되거나 그냥 무시하거나... 차라리 아무 관계도 되지 않는 것이 속 편했다. 그럴수록 나의 활동의 영역은 ‘여성노동자 조직’으로 한정되어갔다.
 
‘성폭력 문제는 내 일 아니’라는 여성노동자들

 
그러다 내가 속한 조직의 여성주의자들과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들을 만나게 되면서, 내가 하는 고민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의 상처에 이름을 붙일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느끼는 고통이 혹시 내가 너무 예민해서 느끼는 ‘나만의’ 고통은 아닐까, 너무 주관적인 것은 아닐까 하는 검열에서 벗어나 내 고통과 상처를 있는 그대로 끌어안게 되었다. 그것이 페미니즘이 나에게 준 또 하나의 선물이다.
 
하지만 나의 페미니즘이 찬란했던 것만은 아니다. 언니들과 함께 만든 여성위원회는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비정규직 노조가 정규직 노조로 통합되는 격렬한 과정 속에서 결국 해체되었다. 사실 여성위원회를 만들 때에도 노조 내에서 ‘반대는 안 한다. 하지만 관심도 없다’는 분위기였던지라, 시간이 흐를수록 여성위원회는 여성의 모든 문제를 다 떠안는, 그 중에서도 성폭력을 전담해서 처리하는 기구가 되어가면서 점점 주변화되어 갔다.
 
그런데 우리가 가장 힘들었던 문제는 여성노동자들조차 ‘여성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것이다.
 
남성노동자들과의 임금 차별이나 정년 차별은 거의 없었고, 여-남의 차이보다는 정규직-비정규직 간의 차이를 좁히는 것이 시급해보였다. 민주노총 같은 상급단체에서 사무직 여성들을 중심으로 만든 매뉴얼화 된 ‘여성 이슈’는 육아휴직 같은 모성보호나 일/가정 양립, 직장 내 성희롱 문제 중심이었고 우리의 상황과는 맞지 않았다. 그나마 20~30대 여성이 많은 업체에서는 성희롱이나 육아휴직 시 대체근로의 문제 등이 생겼지만, 그런 업체는 소수였다.
 
한 번은 사측과의 단체협약 요구안을 만들려고 설문조사를 하는데 40~50대 여성조합원들이 성폭력에 대한 부분은 아예 건너뛰면서 “이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랬다. 오히려 남성노동자들보다 기혼 여성노동자들이 음담패설을 더 즐겼고 그걸로 스트레스를 풀었다. (여성위원회 활동을 열심히 하는 한 언니의 별명이 ‘음란사이트’였다.) 그렇게 미혼, 비혼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기혼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달랐기에, 가장 선명한 여성문제 중 하나인 ‘성폭력’이 중년의 여성들에게는 성적자기결정권에 대한 고민이 아닌 ‘말조심’으로 다가갔을 것 같다.
 
나이 차이나 자기 삶의 맥락에 따라 다양한 경험과 스펙트럼을 가진 여성들의 요구를 ‘보편적인’ 여성의 요구를 묶어내는 것은 무리였다. 더군다나 사측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 노조를 사수하느냐 마느냐가 절체절명의 과제인 시기에, 가사노동이나 가족의 문제 같은 공장 외부(?!)의 문제를 공장 담벼락 안으로 끌고 들어오는 것이 가능할 리 없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어떤 이슈를 다룰 것인가’를 넘어서서 조직의 문화, 활동 기풍 등 모든 측면에서 새롭게 운동 판을 짜야 하는 문제였다. 단순히 여성노동자들이 수적으로 우세하다거나, 여성의 이슈를 더 많이 다룬다고 해서 운동 내 가부장적인 권력 질서까지 전복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사실 운동의 여성주의적인 전환이 무엇인지를 고민할 겨를이 없었다고 보는 게 맞다.
 
‘차이’에 직면하는 법을 알려준 페미니즘
 
당사자들인 여성조합원들의 호응을 얻을 수 없었던 여성위원들은 스스로도 딜레마에 빠져 있었고, 여성위원회 활동은 생명력을 잃어갔다. 언니들은 비정규직 노조 내에도 자리 잡은 정파 질서에 따라 제각기 흩어져버렸다.
 
당시 나에게는 이러한 맥락들이 잘 보이지 않았었다. 그저 흩어져버린 언니들에 대한 애증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여성문제’에 관심 없는 여성노동자들이 답답했고, 이건 의식적으로 도입해야 하는 문제이기에 힘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면 그 때 어떻게 했었어야 했을까? 지금도 잘 모르겠다. 공장에서 떠나온 것에 대한 죄책감과 미안함, 언니들에 대한 배신감과 원망이 뒤죽박죽되어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냉철하고 객관적인 평가는 어렵기만 하다. 그만큼 온 몸을 던져서 활동하고, 그 활동을 사랑했던 시기였던 것 같다.  

그 후에 나는 여성운동단체에서 몇 년간 일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성주의자들 내부의 ‘차이’를 마주할 때마다 힘들었다. 사회주의 운동을 했던 나는 ‘거버넌스’라는 언어로 이야기되는 정부와 시민단체의 파트너십을 못 견디게 싫어했고, 제도를 개선하는 일 중심의 활동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특히 선거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선거운동에 굉장히 회의적이었고 선거 국면마다 날카로워지곤 했다.

 
우리가 얼마나 다른지를 확인할 때마다 괴로웠다. 논쟁의 과정은 논의를 더 풍부하게 해 주었겠지만, 결코 유쾌한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고립을 견뎌야 했고, 내용과 상관없이 감정적으로 달아올라 서로 생채기를 내기도 했다. 나는 사회주의 운동에도 속하지 못하고 여성운동에도 속하지 못하는 걸까, 그 어느 곳에도 온전히 소속될 수 없는 것 같아 외로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성운동을 하며 페미니스트로 살 수 있었던 것은, 페미니즘이 우리 내부의 ‘차이’에 대해서 좀더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고집하는 방식만 최선인 것은 아니며, 누구나 각자의 삶에서 때론 저항하기도, 때론 협상하기도 하며 각자의 전략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이해심은 남성에게는 잘 발휘되지 않는다는 편협함도 페미니즘이 내게 준 선물이다.)
 
‘언니들이 있는 곳’을 찾아 귀농을 준비하며
 
지금 나는 도시를 떠나 귀농할 준비를 하고 있다. 도시의 삶에 허덕이면서 막연하게 자연 곁으로 가고 싶다는 욕망이 있긴 했지만, 그 욕망을 구체적인 삶의 그림으로 그리기까지는  짧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여성단체 뿐 아니라 다양한 곳에서 만난 여성주의자들은 내 진짜 욕망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과정을 응원해주었다. 의무나 당위에 앞서, 나의 욕망을 억압하지 않는 것이 우선이며 나의 행복과 공동체의 행복은 공존할 때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디로 귀농할 것인가에서 첫 번째 조건은 ‘언니들이 있는 곳’이다. 비혼 여성들이든, 레즈비언 커플이든, 여성들의 모임이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언니들이 있어야 숨통을 틔우고 살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어쩌면 생태주의에 매혹될 수도 있고, 농업의 이슈를 가지고 싸울 수도 있을 것이며, 또 다른 이슈와 고민들을 가지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형태의 삶을 살든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은 나의 디폴트(default, 초기화된 설정)가 될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이슈를 가지고 싸우고 활동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내 삶에 깊숙이 들어온 삶의 방식이니까. 그렇기에 나는 앞으로도 페미니스트로서 즐겁게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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