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빛 여문 '보리 베는 날'의 풍경

[까페 버스정류장] 황금빛 바다

박계해 | 기사입력 2013/06/25 [15:00]

황금빛 여문 '보리 베는 날'의 풍경

[까페 버스정류장] 황금빛 바다

박계해 | 입력 : 2013/06/25 [15:00]
※ 경북 상주시 함창읍 함창버스터미널 맞은편에 있는 “카페 버스정류장”.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머무는 이 까페의 문을 연 박계해 선생님은 “학교를 떠나 산골로 들어간 한 여자의 귀촌일기” <빈집에 깃들다>의 저자입니다. -편집자 주
 
▲ 보리가 익어가는 까페 마당에 놓인 '고무통' 연못에서 백련이 수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 일다-윤정은
“아이구, 썩 잘 여물었네요.”


정오 무렵, 팔뚝이며 바짓가랑이에 진흙이 묻은 모습으로 들어선 이는 이안마을의 이장님이다. 이장님은 뒷짐을 지고 보리밭을 둘러본다. 카페를 열고 첫 번째 봄을 맞았을 때 밭갈이를 부탁한 것이 인연이 되어 지금까지 텃밭에 관한 조언이며 도움을 받고 있는 고마운 분이다. 
 
“네, 덕분에요. 안으로 좀 들어오세요.”
“아닙니다. 밭에서 오는 길이라 몸에서 쉰내가 나거든요. 안에 냄새가 밸 것 같아 못 들어갑니다.”
“괜찮습니다. 땀 식히게 팥빙수 해 드릴게요.”

 
이장님이 자리에 앉자 과연 지독한 땀 냄새가 실내를 채운다.
“아무래도 창을 열어야겠네요.”
“아이구, 죄송합니다. 하하하.”

 
팥빙수 한 그릇을 뚝딱 해 치운 이장님은 목에 걸치고 있던 수건으로 얼굴을 마구 문질러 닦으며 시원하다는 말을 연발하더니,
 
“추수는 언제 하실라고요?” 하며 걱정스레 묻는다.
“오늘 오후에요. 이웃 어른들이 공동수확하시기로 했어요. 엿질금을 만든다는 분도 있고 종자를 하겠다는 분도 있고 볶아서 보리차를 만들겠다는 분도 있어요.”
이장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런 방법도 있네요. 하긴 눈요깃거리로 심었으니까 보리들이 주인한테 제 도리는 다 한 거네.”
“네, 게다가 내년에 심을 종자를 제 몫으로 챙겨주신대요.”

 
이른 새벽에 트랙터를 가지고 와서 밭을 갈고 보리를 직접 뿌려준 분이라 이런 대화를 하게 된 것이 새삼 다행이다. 나름 품삯을 드린다고는 해도 이런 작은 텃밭을 보고 트랙터를 끌고 와 줄 사람은 주변에 아무도 없다. 만약 수확을 못하고 동동거리는 꼴을 보였다면 그도 은근히 난처했으리라.          
         
카페의 정원이라 할 밭에 먹거리로 심은 것은 두 줄의 고구마와 호박 네 포기, 그늘진 외곽의 손바닥만 한 토란 밭, 그 앞줄에 흩뿌린 상추, 종자별로 한 주씩 심은 고추, 두 주씩 심은 토마토, 오이, 수세미, 여주이고, 들깨며 두릅, 머위 등은 자생한다.

 
백 평이나 되는 밭에서 그것들이 차지하는 땅은 코딱지만 하고, 백련이 수려하게 자라고 있는 여섯 개의 미니호수(커다란 고무통 6개)가 또한 그만한 공간에 자리 잡고 있다. 나머지 땅에는 모두 보리를 심었다.
 
시기를 놓쳐 12월에 이르러서야 보리를 심었는데 하필 다음 날 첫눈이 내렸고 곧 몹시 추워져서 땅이 꽁꽁 얼었더랬다. 보리란 놈은 워낙 생명력이 강해서 조금이라도 싹을 틔운 다음에는 눈이 오거나 땅이 얼거나 잘 자란다는데, 자리를 잡기도 전에 얼어버려서 싹이 안날 수도 있다고 했다.
 
실제로, 인근 보리밭에 보리가 한 뼘씩 자란 초봄에도 우리 밭은 흙만 검었고, 땅속에 묻히지 못한 보리들은 촉도 틔우지 못한 채 새들의 봄맞이 잔치 상에 올랐다. 한꺼번에 많은 새들이 후드득 날아들고 날아가는 모습은 혼자 보기 아까운 장관이었지만 속이 쓰린 풍경이기도 했는데.
 
이른 봄에는 잔디밭처럼, 늦봄에는 한 아름씩 베어다가 카페곳곳을 장식하고, 온 세상이 초록으로 뒤덮이는 여름 초입엔 황금빛 바다로 출렁일 것을 기대했던 것이 모두 그대로 현실이 되었던 것이다.
 
이웃어른들이 낫을 들고 들어선 것은 해가 이미 기울기 시작한 오후 7시였다.
나는 하필 그 순간 밀어닥친 손님들을 맞느라 8시가 다 되어서야 새참으로 팥빙수를 내었다. 어느새 보리밭이 반이나 사라져 있었다.
“한 분이 안보이시네요?”
“아, 거기는 영감 밥 채려주러 갔어.”
“그 영감님이 이제 경운기 가지고 올기라. 보리 벤 거 다 싣고 가서 바짝 말려갖고 마당에 놓고 뚜디리야지.”

 
▲ 까페 버스정류장, 오늘은 정원을 가득 채웠던 보리를 베는 날.     © 김정은

다시 일을 시작하는데 이제는 보리가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워져 있었다.  
나머지 일은 내일 할 모양이라고 내심 추측하는 중인데 어른들은 서두르는 기미도 없이 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다시 보리밭으로 갔다. 서로의 모습도 희미한 가운데 달빛을 등불삼아 두런거리며 보리를 베는 광경이란.

 
어두운 마당으로 들들들들, 경운기 들어오는 소리가 나고, 쌓아둔 보리를 옮겨 실으며 ‘아이구  까그러와라’ ‘이제 낼 아침이면 온데가 씨릴끼라’ ‘그래도 속이 시원 하네’ 하는 말들을 들으며-, 이 커피만 내면 나가보리라 마음먹는데 어느새 밖이 고요해졌다.
 
텅 빈 보리밭에 서 보았다. 향긋한 보리 냄새가 남아 자신이 보리밭이었다고, 굉장했었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그러나 곧 이 냄새도 사라지고 말겠지. 그것이 모든 생명 있는 존재의 운명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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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자 2013/06/28 [22:58] 수정 | 삭제
  • 사라지는 것이라 아름다운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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