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시민의 권리, 장애인도 예외 아니다

브르타뉴에서 보낸 편지(7)

정인진 | 기사입력 2013/07/10 [01:52]

프랑스 시민의 권리, 장애인도 예외 아니다

브르타뉴에서 보낸 편지(7)

정인진 | 입력 : 2013/07/10 [01:52]
‘교육일기’와 ‘하늘을 나는 교실’의 필자 정인진 님이 프랑스의 서북부 브르타뉴 지방에서 머물면서 보고 느낀 것들을 기록한 ‘브르타뉴에서 보낸 편지’가 연재됩니다. [편집자 주]
 
프랑스에서 ‘시민의 권리와 기회균등’의 정신은 장애인도 시민으로서 사회참여를 할 수 있도록 해주고, 더 독립적으로 살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것으로 집약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국가나 사회가 장애인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사회기반 시설을 마련하는 건, 시혜적인 것이 아니라, 장애인이 누릴 당연한 권리로 모두 인식하고 있다.
 
최소한의 인간적 삶을 보장하기 위한 ‘장애수당’
 
프랑스 정부는 장애인들이 장애로 인해 삶이 피폐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최소한의 정책으로 ‘장애수당’(AAH)을 주고 있다. 장애인은 장애정도에 따라 장애수당을 받을 ‘권리’가 있다. 장애수당은 적어도 장애가 50%에 달할 때 신청할 수 있다.
 
프랑스 정부는 매달 최고 1인당 759.98유로(한화 약 111만원)를 장애수당으로 지급하고 있다. 이 금액은 직업적인 활동을 할 수 없는 장애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 금액이며, 수입에 따라 차등 지급된다. 이 수당 외에 장애 정도가 80%이상이거나, 50~79% 사이라도 직업적인 활동을 할 수 없을 때는 ‘추가수당’(CDAPH)이 지급된다. 장애인이 노인이 되었을 때, 일하다가 사고를 당했을 때, 또 시설에서 살지 않고 독립적인 주거공간에서 살 때도 추가수당을 받을 권리가 있다.
 
한편, 프랑스 정부는 장애어린이를 교육시키고 보살피기 위해 필요한 비용도 보상해준다. ‘장애 어린이 교육보조금’(AEEH)이라는 이름의 이 수당은 장애아의 부모에게, 2013년 3월 현재 매달 127.68유로(한화 약 18만원)가 지급된다. 또 상황에 따라서는 ‘보충적인 보조금’(CDAPH)도 제공되고 있다. 그것은 장애어린이의 장애정도와 관련한 비용의 총액에 따라, 부모 중 한 사람이 직업 활동이 줄거나 중단되었을 때, 1~6단계로 나눠서 매달 최하 95.76유로에서 최고 1,060.17유로(한화 약 14만원~156만원)가 추가로 지급된다.
 
▲ 프랑스 모든 시내버스 안에 마련된 휠체어전용 공간. 휠체어가 오르내릴 때는 문앞에 발판이 더 나온다.     © 정인진

문화생활은 ‘자유롭게, 스스로 즐길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 제공되는 수당만으로 장애인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프랑스 정부는 장애인들이 비장애인과 다름없이 시민으로서 사회, 문화적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렌 시만 해도 공연장과 극장 등의 문화, 예술 공간들은 장애인이 불편 없이 이용할 수 있게 시설을 갖추고 있다. 특히, 장애인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혼자 자유롭게 작품 감상과 문화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특별한 시설을 갖추는 데 열정을 보인다. 지체장애인뿐만 아니라, 시각, 청각 장애인과 발달장애인, 모두 각종 예술작품과 문화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도록 애쓰고 있다.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점자나 큰 글씨로 인쇄된 프로그램이 행사마다 제공되는 것은 기본이다. 그 밖에도 많은 공연들이 무대장치, 의상, 조명, 또는 배우의 동작 등의 정보를 음성으로 전달해주고 있다. 음성 해설과 별도로 시각장애인에게 무대장치와 의상들을 직접 만져보도록 해주기도 한다.
 
‘보자르 미술관’에서는 장갑을 끼고 조각품이나 합성수지로 모사된 그림을 직접 만져보며 감상할 수 있게 하는 프로그램도 있는데, 이는 렌 시가 얼마나 세심하게 시각장애인을 생각하는지 잘 느끼게 해주는 행사다.
 
한편 청각장애인을 위해서는 오페라나 연극에서 대사를 수화와 동시에 제공할 때가 많다. 또 발달장애인이나 심리적으로 약한 사람들을 위해, 병원에서 주최하는 예술, 문화 행사들도 존재한다.
 
장애인들이 예술작품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이런 배려는 각 공간의 재량에 맡겨두고 있지만, 점점 더 확산되는 추세이다.
 
대중교통 이용도 편리… ‘장애인 전용 낚시터’도
 
장애인도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애쓰는 만큼, 프랑스는 장애인을 위한 시설도 비교적 잘 갖추어져 있다.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내가 자주 감동하는 건 특히 시내버스다.
 
이곳의 버스들은 ‘모두’ 저상버스다. 저상버스는 계단이 없다. 게다가 버스의 바닥과 인도의 높이가 비슷해 노약자나 장애인은 물론, 유모차조차 쉽게 타고 내릴 수가 있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의 경우, 운전기사에게 내리거나 타겠다는 의사를 밝히면, 휠체어가 잘 오르내릴 수 있도록 차체를 더 낮추고 휠체어가 이동하기 좋게 인도까지 발판을 내린다.
 
그렇게 발판을 내리는 동안은 버스의 자동문은 열리지 않으므로 다른 사람들은 잠시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이럴 때, 빨리 내릴 수 없다고 불평하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버스뿐만 아니라 지하철 역시 승강기가 잘 갖추어져 있어, 장애인들이 이용하기 매우 편리하다.
 
한번은 호숫가를 산책하다가 한 낚시터에서 길고 튼튼한 통나무로 턱을 만들어 휠체어가 굴러 떨어지지 않도록 시설을 갖춰놓고 “장애인 전용 낚시터”라는 팻말이 세워져 있는 걸 본 적이 있다. 이 팻말을 보았을 때는 감동을 넘어, 부러운 마음이 들 지경이었다. 이런 정도의 마음 씀은 진정으로 장애인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는 떠올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 렌 주변의 한 호숫가의 낚시터, ‘장애인전용 낚시터’라는 팻말이 달려 있다.     © 정인진

당당하고 밝은 표정의 장애인이 말해주는 것
 
특히, 얼마 전 한 서점의 계산대 앞에서 본 휠체어를 탄 장애인과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그 장애인은 손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거동이 매우 불편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 사람이 어떻게 물건 값을 치루고 그곳을 나올지 궁금했다.
 
그 장애인이 계산대 앞으로 다가갔을 때, 손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는 걸 알아차린 계산대의 직원은 바로 계산대에서 나와, 휠체어에 매달린 그의 가방을 열어 지갑 속에서 돈을 꺼냈다. 그리고 그 직원은 계산대로 돌아와 계산을 한 후 영수증을 뽑아서 다시 계산대를 나갔다. 그러고는 그 장애인에게 물건 값을 치룬 돈과 영수증을 확인시켜 준 뒤에 지갑, 영수증, 그리고 포장한 물건을 그의 가방에 잘 넣어, 휠체어에 다시 매달아 주고는 인사를 했다. 그런 후, 다시 계산대로 들어와 다음 손님을 받았다.
 
이 장애인을 위한 서비스에 걸린 시간은 족히 다른 사람들의 대여섯 배는 되어 보였다. 그러나 그 직원은 짜증스러운 어떤 표정과 태도도 보이지 않고 끝까지 친절하게 장애인의 계산을 도왔다. 줄을 서 있던 사람들 역시, 그 누구도 힘들어하거나 불평하는 기색 없이 담담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이 모든 이에게 감동했다. 혼자서 계산하기조차 힘들지만 당당하게 책을 사러 온 장애인도, 장애인을 도와 서두르지 않고 서비스를 제공한 서점 직원도, 또 이런 상황에서 불편한 표정 없이 묵묵히 제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까지. 모두가 내게는 익숙하지 않은 상황과 태도라서 나 혼자만 이 상황을 신기하고 부러워하면서 바라보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생활하면서 가장 부럽고, 때로는 부끄러운 마음이 드는 경우는 장애인을 생각하는 마음이 도시의 시설과 정책에까지 묻어나는 걸 발견할 때와 장애인을 대하는 시민들의 성숙한 태도를 목격할 때다.
 
그래서일까? 한국에서보다 프랑스의 거리와 공공장소에서 나는 더 많은 장애인들을 본다. 무엇보다 그렇게 만나는 장애인들의 얼굴에서 주눅 든 표정을 본 적이 없어, 더 많이 놀란다. 그들은 전혀 위축된 표정 없이 당당하다. 프랑스의 장애인들이 이렇게 당당하고 밝은 표정을 가질 수 있는 건 그들을 대하는 사회의 태도와 그를 둘러 싼 비장애인들의 태도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닐까? 내 모습은 바로 내가 바라보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의 표정 위에 가장 잘 드러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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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끄럽고 부러운 2014/01/15 [04:35] 수정 | 삭제
  • 어렸을 때 TV에서 방영되는 외국드라마를 보다가 왜 한국은 학교에서 휠체어를 탄 학생들을 볼수없는지, 한국아저씨들은 자기가족 돌봄노동도 싫어하면서 웬 의뭉스러운 복지재단이 이리도 많은지 참 의아했던 기억이 있었지요.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도 개인 비용으로 좋은 일 하시는 분들도 많이 계시지만) 국가의 지원을 받는 복지재단의 이름으로 그들의 사리사욕만을 채워주는 도구로서 장애인에 대한 끔찍한 학대 또는 방치가 방관되어왔고, 지금도 구색맞추기에 급급할뿐 별반 사람다운 삶에 대한 희망은 꿈꿀수도 없이 탈출하듯이 거리로 나와 차라리 노숙자가 편하다고들하시는 한국의 맨얼굴을 어른이 되면서 알게되었습니다. '나'는 인권개념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국가의 수준과 골이 깊다면 양심적으로 많이 괴롭습니다. 한국인은 돈과 외모로밖에 타인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오명을 벗으려면 아직 갈 길이 참 멀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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