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내가 하는 정치적 행위는 ‘억울함’에서 비롯한다. 하나는 ‘여자’로 나고 자라면서 생긴 억울함이고, 다른 하나는 ‘분단’된 나라에서 나고 자라면서 생긴 억울함이다.”
이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며 느낀 억울함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 언급하지 않겠다.
분단이 준 억울함이 있다고 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부모님이 실향민이냐? 이산가족이냐?” 질문한다. 하지만 나의 부모는 그 선대의 선대 때부터 충청도에서 나고 자란 충청도 토박이다. 자세히 알아보지는 않았지만 사돈의 팔촌을 뒤져도 북에 살고 있는 가족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분단이 남긴 상처 ‘진영 논리와 편 가르기’
내가 분단의 억울함을 깨닫게 된 것은 이십 대 중반쯤, 학생운동을 끝낼 즈음이었다. 당시는 한때 잘 나가던 학생운동이 급격히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할 때였다. 학생운동에 대해 정부 차원의 탄압이 가해진 것보다도 나를 더 힘겹게 했던 것은, 학생운동 내부에 팽배했던 진영 논리였다. 옳고 그름이나, 더 나은 방향에 대한 논쟁보다는 ‘내 편인지 아닌지’가 더 중요했다. 그리고 그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판단 당했다.
당시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질문은 ‘왜 우리에게는 내 편 아니면 적이고, 이외에는 다른 여지가 없는 것일까?’였다. 이 질문은 결국 학생운동 자체에 회의를 갖게 만들었고, 얼마 안 되어 한총련 사건으로 구속되면서 자연스럽게(?) 운동을 정리하게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남과 북의 ‘분단’ 문제에 예민했던 민족해방계열 학생운동에 회의를 느꼈던 그 시점에, 나는 분단의 모순을 온몸으로 앓았다. 매 순간 내 편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고 갈라내는 진영 논리는 이전까지 내가 분단의 모순이라 배우고 생각했던 남북 간 정치군사적 반목, 외세의 침략보다 더욱 위협적인 문제로 다가왔다.
내가, 우리들이, 혹은 그들이, 분단된 나라에서 나고 자라지 않았다면, 그래서 어제의 이웃이 오늘의 적이 되는 경험이 유전인자에 깊이 새겨지지 않았다면, 이렇게 비합리적인 진영 논리가 통할 수 있을까? 그것은 ‘빨갱이’라는 원색적 용어로 대표되는 반북 이데올로기나, 사상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처럼 외부에서 가해지는 억압이 아니라, 내 안에 뼈 속 깊이 내재되어 있는 모순의 발견이었다.
그러나, 온몸으로 ‘분단’을 앓던 그 시기를 지난 후 나는 분단을 잊었다. 민족도 잊었다.
요즘 세상에 ‘촌스럽게’ 누가 민족을 이야기할까
그러던 어느 날, 2009년이던가, 까맣게 잊고 있던 ‘분단’과 ‘민족’을 다시 만나는 사건이 생겼다. 재일동포 여성들의 한국 방문과 역사 기행을 기록하게 된 것이다.
그때 만난 40~50대의 여성들은 이제껏 만난 사람들과는 달라도 한참 달랐다. 나를 비롯한 한국 여성들을 만나 일본어 억양이 강하게 들어간 조선말로 더듬더듬 이야기를 나누며, 그녀들은 눈물을 흘렸다. 우리가 함께 돌아다닌 강화도나 평화전망대 같은 풍경은 내겐 별 감흥이 없었지만, 그녀들의 눈시울은 어느새 붉어져 있었다.
처음엔 이상했다. 부모, 조부모의 나라를 만나니 애틋함이야 생기겠지만 그래도 뭐 그리 울며 유난을 떠나 싶었다. 그러나 며칠 그녀들과 함께 지내면서, 왜 이들의 눈물이 헤플 수밖에 없었는지 가슴으로 알게 되었다.
당시 한국을 방문한 재일동포 여성들은 대부분 ‘한국’ 국적을 가진 재일조선인 3, 4세였다. 청소년기의 자녀들을 조선학교에 보낸 어머니도 있었다. 그 중에 딱 한 명만이 ‘조선’ 국적을 가진 여성이었는데, 이들 사이에서는 ‘한국 국적이냐, 조선 국적이냐’ 하는 것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그녀들 사이에는 배타적이고 차별적인 일본 사회에서 조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동질감과 유대감이 더욱 강력하게 느껴졌다.
그때의 인연으로, 이번에는 내가 그 여성들을 만나러 오사카로, 동경으로 찾아갔다. 거기서 더 많은 재일동포들을 만났다. 이들은 하나같이 일본 사회에서 코리안(Korean)으로 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이었다. 이제는 내가, 그 언니들만 보면 눈물이 났다. ‘코리안’으로 살아내 준 그들이 더없이 고마웠다.
생각해 보면 재일동포 여성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심지어 민족해방계열 학생운동 경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에 대해, 분단에 대해, 이렇게 절절하게 느껴본 적이 없었다. 배타적인 일본 사회에서 조선말과 글을 익히며 코리안으로 살아온 그녀들의 생존 자체가 분단의 모순과의 투쟁이었다. 그녀들을 만나면서 상상의 공동체일 뿐이던 민족은 그 실체를 얻었다.
솔직히 요즘 세상에 ‘촌스럽게’ 누가 민족을 이야기하겠나. 그러나 또한 이 여성들의 입에서 나오는 눈물 젖은 ‘민족’ 이야기에 어느 누가 토를 달 수 있을까. 한반도가 분단되기 이전의 조선사람 정체성을 가지고 일본 사회에서 힘겹게 살아온 이들에게 있어서 민족은, 그 국가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든 대한민국이든 간에 생존이고 역사이며 삶 그 자체인 것을….
‘재일조선인과의 만남’이라는 개인적인 경험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나에게 민족이든 분단이든 머리로만 해석하고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구는 ‘관념’의 하나였을 것이다. 이십 대 시절 그렇게 온몸으로 앓았던 분단의 모순에 대한 해답도 찾지 못한 채, 한국 사회 곳곳에 있는 진영 논리에 학을 떼면서도, 또 어디선가는 누군가를 ‘내 편인지 아닌지’ 잣대로 판단하며 편 가르기를 일삼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게 재일조선인과의 만남은 내 편도 네 편도 아닌, 그저 존재 자체로 존중 받아야 할 인간의 존엄이 있다는 것에 대한 깨우침을 주었고, 흑백 논리와 편 가르기가 난무한 한국 사회에 다른 삶의 방식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죽비와도 같이 다가왔다.
이분법적 사고를 깨야 만날 수 있는 ‘재일조선인’
그래서 독자들에게 지구촌동포연대(KIN)에서 펴낸 책 <조선학교 이야기>(부제: 차별을 딛고 꿈꾸는 아이들. 도서출판 선인, 2014)를 권하고 싶다. 한국인들이 조선학교에 대해 갖는 오해와 궁금증을 Q&A 형식으로 명쾌하게 풀어낸, 일종의 가이드북이다. 거기에 이 책을 만드는데 힘을 보탠 다양한 사람들(재일조선인도 있고 일본인도 있고 한국인도 있다.)의 때론 가슴 뭉클하고 때론 차가운 이성이 번득이는 에세이가 담겨있다.
<‘조선’적(한국이나 북조선의 국적을 갖지 않고, 일본에 귀화하지도 않은 사람들이 갖는 행정상의 적籍)이란, 말하자면 이미 사라진 조선을 의미합니다. 무국적 상태이면서도 동시에 남북 양쪽에 소속되어 있는 상태로도 볼 수 있습니다. - 97쪽, 구량옥 “나의 사라진 고향들” 중>
아무 곳에 속하지 않으나 그 때문에 어느 곳에도 속해 있는 재일조선인이라는 존재는, 분단이 우리에게 준 트라우마라고 할 수 있는 이분법적 사고와 진영 논리의 감옥을 벗어날 수 있는 ‘다른’ 길을 보여주는 나침반과도 같다. 그 나침반을 한번쯤 들여다보라고 권하고 싶다.
무엇보다 우리는 동포니 한민족이니 쉽게 말하면서도 정작 ‘조선’학교에 대해, 재일조선인 사회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르고 있지 않은가.
<몽당연필(조선학교를 지원하는 사람들의 모임) 대표로 지내며 많은 질문을 받아왔습니다. “배우가 왜?”, “조선학교를 왜?”, “조총련학교를 우리가 왜?”, “일본 정부는 왜?”, “우리 정부는 왜?” … 이 질문들 속에서 조선학교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다양한 시선을 느낄 수 있습니다. 따뜻함, 안타까움, 의심, 공포, 미움, 고마움, 미안함, 경멸, 증오의 시선까지. 이 극단적으로 다르기까지 한 여러 가지 시선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는 조선학교와 재일동포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 137쪽, 권해효 “몽당연필과 조선학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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