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청도 주민들과 함께 한 72시간의 기록을 3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필자 박이은희 님은 <밀양을 살다> 공동 저자이며 여성학을 공부하는 연구자입니다. [편집자 주]
강원도에 쌓인 눈을 구경하며
2014년 12월 16일. 밀양과 청도에서 할매와 할배, 언니들이 꼬박 72시간 동안 전국 열한 곳 저항의 현장을 찾아가는 “밀양․청도 72시간 송년회” 둘째 날. 스테인리스 대접에 담긴 육개장 국밥과 김치가 아침 식사 메뉴다. 순례자들은 한 그릇 뚝딱 비우고 서둘러 길을 재촉했다.
“내가 언제 강원도 와서 이래 눈 구경을 하겠노.”
밤새 내린 눈은 온 천지에 소복했고 나무는 저마다의 모양으로 눈꽃을 피워냈다. 쌓인 눈 때문에 버스는 경사진 도로 아래에 자리한 숙소 앞에 대기할 수 없었다. 다시 눈 쌓인 길 이백여 미터를 걸어야 했으나 모처럼의 풍경에 할매들은 감탄을 자아낸다. 남쪽에 자리한 밀양과 청도에서는 눈이 내리자마자 녹아 내려서 이렇게 쌓인 눈을 보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다.
지난 밤 젊은 활동가들은 버스를 그 비탈진 도로 위로 올리느라 한 시간 가까이 눈을 치워야 했다. 혹시나 아침에 도로의 눈이 제대로 제설되지 않으면 가장 바쁜 2일차 일정이 차질을 빚게 될 것이므로, 날씨와 도로 상황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눈은 그쳤고 날은 외려 푸근해서 지방도는 어느새 모두 녹아 있었다.
홍천 IC에서 두 팀으로 나누어 한 팀은 충북의 현안 사업장 노동자들 그리고 영동의 유성기업 노동조합을 방문하고, 다른 한 팀은 과천 코오롱 정리해고 분쇄 투쟁위원회 농성장과 평택 쌍용자동차 노동조합을 방문하는 일정을 잡았다. 그리고 안산의 세월호 분향소에서 오후 네 시에 다 같이 합류하기로 했다.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에서의 송년회와 C&M 비정규직 노동조합 농성장에 방문하는 것이 오늘의 마지막 일정이다.
사람 섬기는 옷은 못 만드느냐!
코오롱 정리해고를 규탄하는 농성장이 자리한 곳은 과천 코오롱 본사 앞마당이었다. 지하철 4호선 정부과천청사역 4번 출입구 앞, 맞은편으로는 정부청사와 그 뒤로 관악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 곳이다. 본사 정문 앞 길의 새주소 이름은 ‘코오롱로’다.
정리해고에 맞서 싸운 시간 10년, 그러나 아직 열두 명의 해고자들이 남아 복직 싸움을 하고 있었다. 위원장 최일배 씨는 이제 이 지긋지긋한 싸움을 끝내겠다고 단식에 들어갔다. 우리가 도착한 날 단식 42일차에 그는 천막에 없었다. 천막 바깥에는 ‘병원 이송’이라고 쓰인 종이 한 장이 붙어 있었다.(코오롱 정리해고 분쇄 투쟁위원회는 2014년 12월 29일, 원직 복직을 얻어내지는 못했지만 사측과의 합의를 이뤄 10년 투쟁을 정리하였다.)
그를 대신해 코오롱 공동대책위원회 정상철 씨는 홀로 농성장에서 청도와 밀양의 순례자들을 맞았다.
밀양 부북면의 주민 서종범 씨는 농성장 앞에서 대뜸 “더러븐 놈들아! 나와라~” 하고 높이 솟은 건물을 향해 소리 질렀다. 농성장 안으로 들어간 할매들은 “우리 움막하고 똑같다. 우리 움막 생각난다”고 하였다.
열두 명의 할매, 할배들은 코오롱 정리해고 분쇄 투쟁위원회 10년의 이야기를 경청하다가 또 울먹이고 만다. 잠시 농성장에서 나와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데, 농성장에서 언제 고요했냐는 듯 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손수 응원 글을 적는, 각 현장을 응원하기 위해 마련한 작은 현수막에 밀양 부북면 위양 사는 서종범 씨가 이렇게 적어 놓았다.
“사람 섬기는 옷은 못 만드느냐!”
주민들은 응원 현수막을 펼쳐 들고 구호를 외쳤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 자신들을 맞아 준 정상철 씨를, 42일채 단식을 하고 병원에 실려간 최일배 씨를 안듯 꼭 안아주었다. 많은 연대를 경험했을 터인데, 밀양과 청도 주민들을 뵙고 난 소감이 어떠한지 물었다.
“달라요. 연대하러 노동자들이 많이 오는데 좀 다릅니다. 저도 시골에 어머니가 계신데 지금,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납니다.”
쌍용차 정리해고, ‘굴뚝인’ 이창근과 김정욱
정리해고 6년차. 2014년 11월 13일, 대법원은 쌍용자동차의 대량 해고 사태가 무효라는 고등법원의 판결을 파기 환송했다.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는 쌍용차 해고노동자들 앞에서 할매들은 대법원 청사가 떠나가라 소리 지르고 대성통곡했었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12월 13일,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이창근 씨와 김정욱 씨는 70미터 높이의 굴뚝에 올랐다. 바로 그 날 쌍용차 해고노동자 두 명의 퇴임식이 있었고, 또 간암을 앓았던 또 다른 해고노동자 한 명의 사망 소식이 전해 졌다. 스물여섯 번 째 희생자였다.
과천에서 다시 남쪽, 평택으로 차를 돌려 쌍용자동차 평택 공장의 정문 앞에 도착한 시간은 12시 50분. 점심 식사를 마치고 잠시 쌍용자동차 노동조합 사무실에 들러 김정운 수석으로부터 상황 설명을 듣고 있을 때, 이창근 씨로부터 화상 전화가 걸려 왔다. “어머니들이 너무 보고 싶어서 먼저 전화했습니다.”
이창근 씨는 밀양 다섯 개 움막에 대한 행정 대집행이 있던 지난 6월 11일, 다섯 개의 움막 중 마지막으로 철거된 단장면 태룡리 용회동 마을 뒷산, 101번 움막에 함께 있었다.
잠긴 문으로 가로 막힌, 굴뚝이 보이는 곳에 도착했을 때 주민들의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문 앞에 나란히 열 지어 서 있는 전경들이었나 보다. 할매들의 호통 때문에 전경들은 결국 주민들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이동해야 했다.
오후 두 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지만 아직 한 끼의 밥도 굴뚝 위로 올리지 못했다고 했다. 회사는 ‘인도적 지원’을 하겠다고 했고 딱 밥과 물만 올리게 했다. 비닐 한 장 올라가지 못했다. 눈 쌓인 홍천이 포근했던 것과 다르게 평택은 많이 추웠다. 해고자들과 가족들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은 바람 길인 것인지 바람 또한 매섭다.
다시 순례자들은 굴뚝을 올려다보며 손을 흔들고 합장하고 반절을 올린다. 굴뚝에서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는 연기는 수증기가 아니라 LNG가스라고 했다. 할매들은 가스 마시지 말라며 이제 그만하고 내려오라고 난리다.
주민과 활동가들, 해고자들이 함께 모여 구호를 외쳤다. “정리해고 막아내고 송전탑도 막아내자. 막아내자! 막아내자!” 구호 끝에 사라 할매가 마침표 추임새를 넣는다. “야이! 씨발놈들아!” 눈물과 웃음이 교차했다.
‘아이들이 하늘에서 지켜보고 도와줄 거야’
동화전 마을 김수암(72) 할매를 인터뷰하기 위해 방문한 지난 가을, 넓은 집에 혼자 사는 할매 방 텔레비전 위에는 노란 리본을 단 세월호 목걸이가 놓여 있었다. 용회동 마을 주민 구미현 씨의 집에는 노란 리본이 한 가득 담긴 예쁜 그릇이 거실 스탠드 조명 아래 놓여 있다.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라는 말도 쉬이 꺼내지 않았다. 그저 그렁그렁 눈에 눈물을 고이고 있을 뿐이었다.
밀양과 청도의 순례자들은 벌써 여러 차례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을 방문했던 터였다. 그러나 안산 분향소는 처음이다. 천천히 그 많은 영정과 수 없는 사연들을 둘러보고 나와 대책위 사무실에서 유가족들과 만났다. 우리가 분향을 하는 동안 세월호 유가족들은 밀양과 청도 주민들의 송전탑 건설 반대 싸움을 담은 영상을 지켜보았다.
“몇 학년 몇 반 누구 엄마(아빠)입니다.” 유가족들이 본인을 소개하고 인사하는 방식이다. 그들은 어르신들께서 싸우는 모습을 보고 많은 힘을 얻었다고 했다. 자신들은 아직 젊다고.
평밭 마을 한옥순 씨는 아이들이 하늘에서 지켜보고 도와줄 것이라고, 끝까지 힘내서 싸우자고 했다. 2학년 4반 동혁 엄마는 그 어떤 약속보다 소중한 약속이라며 꼭 힘내서 싸우겠다고 화답했다.
눈물과 웃음이 교차하던 다른 곳과 달리 안산 분향소 현장은 숙연했다. 몸과 마음으로 깊이 슬퍼했고 오랫동안 안았다. 할매들은 가족들의 눈물을 맨손으로 연신 닦아 주었다. 눈이 크고 예쁜 김수암 할매의 눈에 눈물이 가득했다. “우세요?” 물으니 “자꾸 눈물이 난다”고 할 뿐 다른 말을 잇지 않는다.
우리가 그곳에 들어설 때부터 떠나올 때까지 유난히 계속 울고 있는 ‘엄마’에게 자꾸 시선이 가 닿았다. 차량까지 순례자들을 배웅하기 위해 온 그녀에게 어렵사리 소개를 부탁했다. “2학년 6반 김소정 엄마예요.”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 송년회를 위해 안산을 떠났다. 한 시간 남짓 버스 안에서 도시락으로 저녁 식사를 해야 했다. 목이 많이 메었던 것인지, 어느 곳에서나 뚝딱 밥 한 그릇을 비워내던 어르신들은 그날따라 밥과 반찬을 많이 남겼다.
세계는 한마디로 ‘통’이다
세월호 농성장이 자리한 광화문 광장에는 미처 일일이 방문하지 못한 강남대로노점탄압 반대 공대위,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 폐지 공동행동, 용산 대책위, 기륭전자분회, C&M 노동자들 그리고 송년회에 함께 하고자 찾아온 이들이 밀양, 청도의 순례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입담 좋은 천주교 인권위원회 김덕진 사무국장과 상동 여수마을 김영자 총무가 함께 송년회의 사회를 맡았다. 투쟁 덕담이라야 옳다. 그들은 서로 격려하고 웃고 노래하면서 함께 춤추고 놀았다.
마지막으로 바로 옆 C&M 케이블 노동자들의 농성장을 찾았다. 11월 12일 C&M의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 임정균 씨와 강성덕 씨가 20미터 높이의 전광판 광고탑에 올랐다. 35일째다. 노동조합을 만든 이후 해고된 109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원직 복직이 그들의 요구였다. 전광판 위의 두 사람은 계속되는 화려한 광고 빛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핸드폰 손전등을 켠 뒤에야 그 곳에 사람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광화문과 C&M 농성장에서 함께 송년회를 치른 많은 사람들, 우리가 한 번쯤 들려서 뜨끈한 국물을 홀짝이며 먹었을 오뎅과 떡볶이를 파는 강남의 어느 포장마차 주인이었을지 모른다. 그 들 중 누구는 나와 내 이웃의 집에 케이블 방송을 연결하기 위해 방문했을지도 모를 일이고, 강제 철거가 있기 전 용산역 어느 골목에서 맛있는 국밥 한 그릇을 사 먹은 식당의 주인일수도 있다. 우리는 어떻게 이들과 만나게 된 것일까.
순례 첫날, 옆 자리에 앉은 평밭 마을 사라 할매는 무언가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아픈 현장’을 방문할 때마다 주었던 “증표” 맨 마지막엔 “서로 연결되어 있는 우리들, 지금처럼 앞으로도 잡은 손 놓지 않겠습니다” 라는 문장이 쓰여 있다.
“세계는 한마디로 통이야. 큰~ 통 속에 우리가 함께 있는 거야.” (사라)
“이쪽이 힘들면 저쪽이 끌어주고, 저쪽이 힘들면 이쪽이 끌어주면서, 우리 이길 때까지 저항하고 싸웁시다!” (구미현 씨.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 발언 중에서)
그녀들은 도대체 어떻게 그런 연결성을 이리도 쉬운 말로 설명할 만큼 간단히 간파해 버린 것일까.
일정도 바쁘고 마음 아픈 일도 많았던 둘째 날, 숙소는 넓고 따듯했다. 초저녁 잠을 잠시 자고 이른 새벽부터 깨어 일하는 것이 일상인 할매들은 그날 밤늦도록 과자 몇 조각을 안주 삼아 캔 맥주 몇 개와 소주 한 병을 겨우 한잔씩 나누어 마셨다. 영감님이 속을 썩여 화병이 있다고 추운 곳에서도 자꾸 겉옷을 풀어 헤치던 동화전 마을 이남이 할매는 ‘시어마씨 죽고 나니 방 넓어 좋다~’로 시작되는 옛 소리를 어깨춤을 추어가며 불러 제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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