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 산뜻한 주홍빛 저고리를 입은 리신혜 씨는 오사카지방법원 증언대에 섰다. 이따금 떨리는 목소리로 읽어 내린 진술서에는, 제소에 이르기까지의 경위와 생각이 적혀 있었다. 방청석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이 목소리를 누구보다 들어야 할 상대는 오지 않았다.
2014년 8월, 신혜 씨는 ‘자이니치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모임’(이하 재특회)과 당시 회장인 사쿠라이 마코토 씨, 포털 사이트 <보수속보>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요구하며 소송을 제기했다.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은 온라인에서 확산 일변도인 자이니치(재일조선인)와 한국인에 대한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 혐오 표현)를 중단시키고, 재발을 방지하고 싶다는 생각에서다. 또 하나는, 온라인에서 그치지 않고 거리로 뛰쳐나와 혐한 시위를 하며 차별을 조장하는 단체에 책임을 묻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 가지 행위 모두로부터 리신혜 씨 자신이 지난 몇 년간의 타깃이었다.
“조선인을 죽여라!” 인종주의 시위에 눈물 흘리며
헤이트 스피치는 재특회가 길거리에 나와 격렬하게 인종 차별 활동을 시작한 2009년 이전부터 존재했다고, 신혜 씨는 회고한다.
“자이니치들이 모여 즐겁게 교류하고 있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함부로 들어와 조선학교를 중상모략, 비방하거나, 모여있는 사람들을 괴롭히곤 했다. 그들 때문에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이니치’라고 밝히지 못하게 된 사람들이나 커뮤니티에서 사라져버린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때는, 그러니까 재특회가 활동을 시작했을 때는 “저런 억지 논리가 사회에서 받아들여질 리 없다”, “무시하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제대로 몰아내지 못했던 것을 굉장히 후회합니다” 라고, 신혜씨는 말한다.
재특회는 “좋은 조선인이든 나쁜 조선인이든 죽이자!”며 확성기를 통해 고함을 지르고 거리를 열 지어 걷는다. 그들의 집회에 경찰의 ‘경비’는 늘 있지만, 웬일인지 ‘차별을 멈추라!’고 항의하는 ‘대항 세력’쪽만 압력을 받는다. 오히려 재특회가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차별 언동을 하는 듯한 광경을 보며, 신혜 씨는 수도 없이 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혜 씨는 재특회의 집회가 열린다는 정보를 입수하면, 그곳에 가서 전단을 배포하는 등 선전 활동을 하며 이들의 차별 행위에 항의했다. 온라인 상에 실명으로 발신하는 트위터에서 제아무리 심한 말을 들어도, 일단은 받아주고 “역사를 똑바로 공부하기 바란다”고 타일렀다. 그런가 하면 “(조선 땅으로) 돌아가라!” 하는 비방에 대해 “바보야, 여기가 내 집이야!” 라고 받아 치기도 했다.
‘지금 맞서지 않는다면 후회하게 될 겁니다’
프리랜서 작가로, 일본 사회의 인종 차별과 성차별, 역사 인식의 문제에 대해 글을 써온 리신혜 씨는 1972년 오사카부 동부의 서민가에서 태어나 자랐다. 울고 있으면 바로 “무슨 일이니?” 하며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건네주는 친밀한 이웃 속에서 자라, 어엿한 ‘오지랖 아줌마’로 성장했다며 웃는다. 섬세하고 눈물이 많지만 “부정의와 차별에는 침묵할 수 없다.”
특히, 일본 사회에서 격렬한 반대를 불러 일으키기 쉬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한발 짝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정부의 책임을 묻는 탓에, 직장에서 신혜 씨에 대한 반발이 쇄도해 결국 일을 잃었다.
재특회나 익명으로 악의적인 말을 던지는 사람들 사이에 신혜 씨 이름과 모습이 널리 알려지면서, 공격은 더더욱 격렬해졌다. ‘무다리’니 ‘썩은 호박’이니 신체에 대한 인신공격부터 입에 담지 못할 성적인 모욕까지, 실명이 거론되며 욕설을 들었다. 그럴 때면 공포와 분노로 술을 마시지 않고는 잠들지 못했다. 며칠 간은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 일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신혜 씨가 계속해서 재특회를 상대하는 것은, 과거에 한 번 이들의 언행을 가볍게 보고 지나친 것에 대한 후회를 두 번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도 ‘상대하지 마’, ‘둘 다 똑같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지금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몇 년 후에 또 다시 부끄러워질 것 같아요. 제게는 선거권도, 돈도, 아무 힘도 없지만, 목소리를 낼 수는 있어요.”
재특회의 폭력적인 언행에 대해 몇 번이고 경찰에 호소해봤지만, 돌아온 것은 “(당신처럼) 귀엽게 생긴 분이 왜...”, “(대항 집회에) 안 가면 되잖아요” 하는 말뿐이었다. 아무 말 못한 채 눈물을 흘리며, 의기양양하게 행진하는 혐오 집회를 지켜보던 수많은 자이니치 친구들을 생각하면 ‘내가 침묵할 수는 없다’고, 고민고민 끝에 결심한 제소였다.
용감하게 혐오와 차별에 맞서는 리신혜 씨의 활동에 힘을 실어주는 사람들도 있다. 작년 말, 신혜 씨는 아시아 인권평화상인 제10회 ‘마쓰이 야요리상’의 야요리 저널리스트상을 수상했다. 마쓰이 야요리상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헌신한 여성운동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마쓰이 야요리의 유지에 따라 제정된 상이다.
인터뷰 날은 공교롭게도, 여성예술가 기타하라 미노리 씨와 로쿠데나시코 씨가 외설물 유포 등의 혐의로 경찰에 체포된 날이었다. 신혜 씨는 “자기 목소리를 내는 여성을 침묵하게 만드는 힘에 지고 싶지 않다. 여성들의 연대를 넓히고 싶다”고 말한다.
기모노 천으로 만든 한복을 입고 법정에 서다
진술서를 읽은 2차 공판에서, 신혜 씨는 기모노 천으로 지은 저고리를 입었다. “기모노 천으로 저고리를 만들고 싶다”는 신혜 씨의 마음을 안 변호사들이 보내준 선물이었다. 리신혜 씨는 태어나고 자란 일본과 뿌리인 한국 모두 사랑한다. 자유기고가라는 자신의 일도, 트위터를 비롯한 개인적인 발언도, 사람과 사람 그리고 나라와 나라를 잇기 위해 계속해나갈 것이다.
진술서는 “나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일본이라는 나라를 믿습니다” 라는 말로 맺어졌다. 신혜 씨가 제기한 소송은 재특회뿐 아니라 일본 사회, 그리고 일본 사회의 구성원 한 명 한 명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신혜 씨의 메시지에 일본 사회는 어떻게 답할 것인가.
※ <일다>와 제휴 관계를 맺고 있는 일본의 여성주의 언론 <페민>에서 제공한 기사입니다. 고주영님이 번역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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