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작가 루이스 캐럴의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앨리스는 회중시계를 들고 다니며 말 하는 토끼를 따라 이상한 나라에 간다. 그곳에서 앨리스는 몸이 커지거나 작아지기도 하고, 기묘한 동물들과 만나기도 하며 낯설고 새로운 환상의 세계를 용감하게 쏘다닌다.
거리 청소년들을 위한 ‘집’이 필요해
서울 관악구에 위치한 자립팸(FAM. 패밀리의 준말) ‘이상한 나라’는 루이스 캐럴의 동화에서 이름을 따왔다. 탈가정 여성청소년들은 이 ‘이상한 나라’에 와서 ‘앨리스’가 된다. 그리고 동화 속 주인공처럼 새로운 문화와 마주치면서, 자립을 위한 도전을 시작한다.
‘이상한 나라’의 구상은 사단법인 <들꽃청소년세상>이 운영하는 ‘움직이는 청소년센터 EXIT’(이하 EXIT)의 활동에서 비롯됐다. 4년 전부터 버스를 가지고 부천에서, 안산에서, 거리 청소년들을 만나온 EXIT 활동가들은 새벽 두 시쯤 거리 상담을 종료할 때마다 갈 곳 없는 청소년들이 걱정이었다.
쉼터에는 들어가기 싫어하고, 집으로 돌려보낼 수도 없는 청소년들. 특히 여성청소년들을 사무실로 데려와 재우기를 반복하면서 ‘집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집을 한 채 후원 받게 되었다. 그리고 2013년 5월 ‘이상한 나라’의 문을 열었다.
17~24세 사이의 여성청소년 네다섯 명이 함께 살아가는 ‘이상한 나라’에는 활동가들이 상주하지 않는다. 활동가들은 일주일 중 3일만 와서 자고, 나머지 4일은 청소년들끼리 생활한다. 지금까지 열다섯 명 정도의 청소년들이 ‘이상한 나라’에 거주했다. 이곳에서 최대 2년까지 머무를 수 있다.
‘이상한 나라’ 입국부터 출국까지
‘이상한 나라’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먼저 EXIT 버스에서 입국 상담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입국 신청서를 쓴다. 얼마 동안 살아보고 싶은지, 살면서 뭘 해보고 싶은지, 출국할 때는 뭘 얻고 나가고 싶은지를 적는다. 이걸 ‘이상한 나라’의 시민들(활동가들)과 다른 앨리스들 앞에서 발표 한다. 입국 심사다.
한 달 정도 산 뒤에는 영주권 심사를 한다. 자체 제작한 여권에 영주권 도장이 찍힌다. 두 달 정도 더 살아본 후, 이곳에서 살겠다고 결정하면 시민권을 받게 된다. 그때부터 생활비 카드를 관리하거나 가족 회의에서 약속을 정하는 등 권리와 책임이 주어진다.
“들어오면 보통 처음 한 달 정도는 편하게 쉬고 자유롭게 지내요. 그러다 혼자 집에 있는 게 심심해지고 다른 앨리스들이 일하는 걸 보면서 자극을 받고 뭔가 해보고 싶어하죠. 3개월 되는 시점에 생활비를 내야 하니까 거의 3개월 안에는 무언가 시작하게 되는 것 같아요.” -이상한 나라 활동가 김혜민 씨(27세).
입국해서 3개월 동안은 교통비와 생활비 등을 지원받는다. 3개월이 지나고 시민이 되는 시점부터는 10만원의 생활비를 내야 한다. 이 돈을 모아 앨리스들이 직접 장도 보고 공과금도 내며 생활하는 것. 공과금이 많이 나가는 겨울이면 식비가 쪼들린다.
‘이상한 나라’에서 출국할 때는 출국 신청서를 쓴다. 이곳에서 살면서 어떤 걸 경험했는지, 출국 이후에는 어떤 계획이 있는지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고, 듣는 이들도 한마디씩 해준다.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고 판단되면 출국을 말리기도 한다.
일하고, 생각하고, 꿈꾸고, 관계 맺는 앨리스
“저는 지금까지 밤에만 활동했습니다. 아무런 계획 없이, 미래 없이, 그냥 하루살이마냥 하루 종일 컴퓨터만 붙잡고 게임만 하거나 스마트폰만 붙잡고 게임만 했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도 졸업 못해서 검정고시를 따고 싶어서 공부를 다시 하려고 했으나 마음대로 공부가 손에 잡히지도 않고 하루 공부하고 펑펑 놀고 했습니다.”
“내가 앨리스집에 살면서 일어난 변화들이 많이 있습니다. 일단 목표가 생겼다는 게 제일 얻게 된 거 같습니다. 그리고 자신감 얻게 되고 내가 이런 모습이 있었나?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이런 생각 흔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생각을 가진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EXIT, 이상한 나라 2014년 운영보고서> “앨리스가 말하는 자립팸 이상한 나라” 중에서.
앨리스들은 ‘이상한 나라’에서 스스로 자립 계획을 세운다. 개개인의 욕구와 상황에 맞게 기술을 배우거나 대안학교에 가기도 하고 취업을 한다. 무언가 꾸준히 해본 경험이 없어서 한 달이 되기 전에 그만두는 경우도 많다. 그래도 뭔가 해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는 것 자체가 이들에겐 큰 의미다.
자립은 단지 일자리를 구하고 돈을 버는 것만 뜻하지 않는다. 관계를 맺고 이어나가는 법,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살아가는 것도 자립의 일부다.
그래서 앨리스들은 ‘이상한 나라’에서 민주적인 공동체 생활을 경험한다. 가족 회의에서 각자 의견을 내서 조율하고 그것을 함께 지킨다. 빌라 반상회에도 주민 자격으로 참여한다.
‘이상한 나라’에서 활동가들의 역할은 무엇이냐고 묻자, 김혜민 씨는 “관계”라고 답한다. “앨리스들과 일상적인 관계를 잘 맺는 것 자체가 나의 역할”이라고.
대부분의 앨리스들은 다른 쉼터나 그룹홈에서는 찾기 힘든 자유를 기대하고 ‘이상한 나라’에 온다. 이들에게 있어서 그동안 만났던 어른들은 ‘나를 간섭하거나 감시하는 대상’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렇지 않은 관계도 있다는 걸 알아간다. 활동가들이 자신을 보살펴 주는 존재이자,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는 존재라는 걸 깨닫는다.
그래서 활동가가 숙직 들어가는 날이면 자기 방에 와서 자라고 성화다. 옆에 누워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밤을 꼴딱 샐 때도 있다고.
앨리스의 선택을 믿고 행동을 기다려주는 곳
국회입법조사처에서 발행한 현장조사 보고서 34호 <청소년 쉼터의 운영 실태와 개선 과제>(2015년 1월)에 따르면, 지난 1년 동안 가출을 경험한 것으로 추정되는 청소년은 약 15만 명이다. 청소년 쉼터에 입소하는 청소년은 한 해 만여 명 수준이다. 탈가정 청소년의 약 10% 만이 쉼터를 이용하고 있다.
가족 내에서 폭력, 억압, 방임 등 많은 어려움을 겪고 거리로 뛰쳐나온 청소년들에게 쉼터는 편하고 자유로운 공간이 아니다. 많은 쉼터가 ‘가출’ 자체를 문제 상황으로 보고 ‘보호자 연계를 통한 가정 복귀’를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청소년의 주체성이나 욕구보다는 ‘보호’와 ‘교육’에 초점을 맞춰 꽉 짜인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엄격한 생활 관리를 하다 보니, 쉼터 이용을 꺼리는 청소년들이 많다.
‘이상한 나라’는 청소년의 주체성을 인정하고 당사자의 욕구와 의지가 중심이 되는 청소년 자립팸을 지향한다.
일단 외박, 외출이나 핸드폰 사용이 자유롭다. 외출할 때 굳이 활동가한테 말할 필요도 없고 새벽 두 시까지만 들어오면 된다. 외박할 때도 같이 사는 사람들의 걱정을 덜기 위해 미리 말해두기만 하면 된다. 한 달에 네 번은 친구도 데려올 수 있다.
김혜민 활동가는 아침에 제 시간에 못 일어나는 앨리스를 한 번도 강압적으로 깨운 적이 없다고 한다.
“아침에 (앨리스를) 깨우는 게 너무 어려운 과제에요. 잘 못 일어나는 앨리스를 보면서 다른 앨리스들이 ‘쉼터였으면 쟤는 강제 퇴소다, 쉼터에서는 어떻게든 깨워서 보낸다’고 말하는데, 여기는 ‘일단 기다려보자, 권위적이거나 강제적으로 하지는 말자’는 분위기에요. 제가 무섭게 하면 눈치 보면서 변한 것처럼 행동하긴 할 텐데, 그것보다는 스스로 느끼고 변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 친구의 속도에 맞추려 하는 거죠.”
앨리스들은 활동가를 부를 때 ‘쌤’이라고 하기도 하고 별칭을 부르기도 한다. 서로 반말을 쓰기도 한다. 활동가들도 앨리스들에게 친구처럼 자기 고민을 털어놓기도 한다.
“애들한테도 힘들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좋은 것 같아요. ‘내 고민도 들어줘. 지금 나 힘들어.’ 앨리스들이 ‘요즘 힘들지?’ 이러면서 사업계획서도 한 장 써주기도 하고, 숙직할 때 요리를 해 주기도 해요.” -이상한 나라 활동가 곽예슬 씨(26세).
‘이상한 나라’에는 정해진 규칙이 없다. 대신 가족 회의에서 ‘약속’을 정한다. 그때그때마다 정하기 때문에 계속 바뀐다. 활동가들이 정해준 게 아니라 스스로 정한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책임감이 생긴다. 앨리스들은 그렇게 조금씩 자신의 일상을 꾸리며 타인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힘을 기른다.
강의하는 앨리스
‘이상한 나라’는 청소년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청소년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본다. 그래서 작년에는 EXIT 신입활동가 교육 때 앨리스들이 직접 강의를 했다.
“첫 번째, 핸드폰을 압수하지 말자는 겁니다. (…) 그렇게 통금이 심한데 집(쉼터)에서는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연락도 하지 말라는 겁니까? 두 번째, 통금 시간을 선생님들과 함께 가족 회의를 열어 정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기들만의 문제점을 토론할 수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청소년들에게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EXIT, 이상한 나라 2014년 운영보고서> “앨리스 교육활동 강의록” 중에서.
전국 마흔 곳 가까운 쉼터를 돌아다니며 경험한 어려움과 차별에 대해 토로하고, 쉼터 중 베스트와 워스트를 꼽고 그 이유를 대기도 하고, 내가 바라는 쉼터는 어떤 모습인지, 또 활동가는 어떤 태도였으면 좋겠는지 이야기하기도 했다.
숭실대 사회복지학과 수업 시간에 자신의 탈가정, 탈학교 경험을 주제로 특강을 하기도 했다. 또 한 ‘성소수자’ 앨리스는 EXIT의 해변 아웃리치(OUTREACH, 직접 현장을 찾아가는 활동 방식)에서 성소수자 인권에 대한 교육을 직접 기획해서 진행했다.
그동안 문제아, 비행청소년으로 낙인 찍혀 존중 받지 못했던 나의 삶이 누군가 귀 기울일만한 것임을 알게 되는 건, 앨리스들에게 깊이 각인될만한 경험이다. 한 앨리스는 출국 심사에서 강의 경험을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꼽았다.
주거가 안정되는 게 자립의 시작이다
탈가정을 비행(非行)으로 보는 사회적 인식과, 청소년들이 인간다운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일자리가 거의 없는 현실. 이 속에서 탈가정 청소년들의 자립은 결코 쉽지 않다.
쉼터나 그룹홈 등의 제도에도 보완이 필요하지만 ‘이상한 나라’와 같은 청소년 주거 모델도 많아져야 하지 않을까.
‘이상한 나라’의 활동가들은 앨리스들을 보면서 “주거가 안정되는 게 진짜 시작”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탈가정 청소년들이 무기력하다고만 생각하는데, 주거가 안정되고 관계가 조금만 안정되어도 의지와 욕구가 많이 생긴다는 걸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청소년들의 주거권이 보장되는 사회를 만드는 활동도 ‘이상한 나라’의 몫이다. 활동가들만이 아닌, 당사자인 앨리스들도 함께 말이다.
“사회를 바꾸는 활동을 앨리스들이랑 같이 해보는 게 꿈이에요. 사회적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를 함께 만들고 싶어요. 그래서 글도 계속 써보자고 하고, 행사 같은 데서 사람들이 어떻게 자기 목소리를 내는지 보게 하죠. 올해 여성의 날 행사에도 같이 다녀왔는데, 앨리스들이 또 가자고, 내년에는 부스 차리자고 해요. 우리는 협력하는 관계에요.” (활동가 김혜민 씨)
“앨리스들한테 말하죠. ‘우리’가 바꿔야 된다고, 세상을!” (활동가 곽예슬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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