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미야기현 오시카반도는 리아스식 해안에 둘러싸여 풍부한 자연 풍광을 자랑한다. 도호쿠전력(東北電力)은 그곳에 오나가와 원전을 건설하고, 1984년부터 가동하기 시작했다. 오나가와 원전은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에 의해 외부 전원 5계통 중 4계통을 소실했고 화재도 발생했다. 그러나 가까스로 후쿠시마 원전 같은 파멸적인 위기는 면했다.
아베 미키코 씨는 오가나와 원전이 건설되기 전부터 핵발전소 반대운동을 해왔고, 대지진 이후 원전 재가동에 반대하는 활동을 해오고 있다. 올해 3월에 센다이시(仙台市)에서 열린 제3차 유엔 세계 방재회의 회의장에서 아베 미키코 씨를 만났다.
파괴적 미래를 낳는 공해기업과 원전에 반대하며
미키코 씨는 3.11 대지진 당시, 오나가와초와 이웃한 이시마키에 있었다. 지진이 났을 때 차를 달려서 어떻게든 마을로 돌아오긴 했지만, 떠내려간 건물과 완전히 변해버린 마을의 모습에 놀랄 새도 없이 가족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고 한다. 다행히 산으로 대피해있던 가족들은 생명을 건졌다.
이후 고령인 부모님을 모시고 마을 바깥으로 피난을 했지만, 오나가와에서 뭔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을 거라 생각해 4월에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그리고 가설주택에 입주했다.
1971년에 미키코 씨가 도쿄에서 대학에 입학했을 당시, 그 전 해에 오가나와에 원자로 설치가 허가되어 이를 반대하는 마을 주민들의 시위가 격렬했다. 미키코 씨는 도쿄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도쿄대학에서 환경학자 우이 준 씨의 <공해원론> 수업을 청강했다.
그리고 그 해 겨울, 미나마타병 피해자가 가해기업 치소(Chisso. 현재는 JNC로 사명 변경)와 ‘자율협상’을 시작한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갔다. 미나마타병은 수은 중독으로 발생하는 신경학적 증후군으로, 오염된 어폐류를 섭취해서 발병한 일본의 대표적인 공해병이다. 미키코 씨는 그 길로 1년 반 동안, 도쿄의 치소 본사 앞에서 가해기업의 책임을 요구하며 천막 시위에 가담했다.
미키코 씨의 아버지 고(故) 아베 무네요시 씨는 오나가와 원전 반대운동의 중추적 존재였다. 도호쿠전력이 건설 준비를 추진할 때, 오나가와초와 오가츠초 등의 어협이 이에 반대하며 ‘오나가와 원전 반대 3초 기성동맹회’(이하 오나가와 원전 반대동맹)을 결성했다. 그리고 항의 집회를 여는 등 등 1970년대에는 원전 반대 측과 추진 측이 격렬하게 대립했다.
1981년, 센다이지방법원에 오나가와 원전 중지 소송을 낼 때 아버지와 미키코 씨 외에 남편과 딸도 원고로 참여했다. (2000년에 대법원은 원고의 주장을 기각했다.)
개인사에서는 아버지에게 반발심을 가졌지만, 끊임없이 원전에 반대하며 행동하는 모습을 보아왔기 때문에, 미키코 씨는 대학시절 도쿄에 있으면서도 항상 오나가와가 걱정되었다. 졸업 후 유학 이야기에 마음이 동하기도 했지만, 결국 오나가와 원전 반대운동을 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탈핵운동의 앞날을 위해 마을의회 선거 출마
3.11은 큰 전기가 되었다. 오나가와 원전 반대동맹의 동료 다수가 쓰나미로 목숨을 잃었다. 2011년 가을 마을의회(일본의 지방자치단체 중에서 시, 구의 하위 단위가 초(町)다. 이 초(町)의 의회) 선거 10일 전, 미키코 씨는 “이대로 가면 원전 반대운동을 이어갈 사람이 사라진다”고 염려하는 동료들의 바람을 담아 입후보를 결심했다.
오나가와의 민심은 혈연, 지연 등의 연고가 있는 사람에게 투표하는 성향이 강하다. 선거운동을 하면서 “당신에게 투표할 순 없지만, 당선되었으면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다. 미키코 씨가 무소속으로 출마한 선거에서, 당선자 12명 중 9위로 당선됐다. 당선된 마을의회 의원 중 세 명이 원전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대지진을 겪으며 미키코 씨는 오나가와 사람들의 의식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고 느낀다. 원전이 건설될 때 지급되는 교부금도 있기 때문에, 예전엔 원전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소수였다. 그러나 후쿠시마 사태 이후는 달라졌다. 지금은 찬반이 반반이다.
그렇다고 해도 보수적인 마을 분위기는 좀처럼 반대 의사를 입 밖으로 낼 수는 없게 만든다. 미키코 씨가 거리에서 혼자서 원전에 반대하는 전단지를 돌리고 있을 무렵, 마을 바깥에서 응원하러 와준 사람들이 있다. 이들과 함께 2013년 여름에 설립한 것이 ‘오나가와에서 미래를 생각하는 모임’이다.
미키코 씨가 대표로 있는 ‘오나가와에서 미래를 생각하는 모임’은 오나가와 사람들에게 원전에 반대하는 생각을 전하고 싶다며, 1년에 걸쳐 원자력 공학자인 고이데 히로아키 씨의 강연과 싱어송라이터 가토 도키코 씨의 콘서트를 계획했다. 행사에는 1천5백명이 참가해 대성황을 이뤘다.
원전 찬성파는 입지 교부금이나 고정자산세에 대한 기대감을 부추기고 있다. 그러나 미키코 씨는 이렇게 단언한다. “언젠가 폐로가 될 원전이라면 멈춰 있는 지금이야말로 폐로 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라고. 또한 “홋카이도의 유바리나 도키와 탄광 등 에너지 자원 문제로 지역이 피폐해져, 에너지 전환을 통해 재기하려 애쓰고 있는 전례를 보고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마을의 복구란 ‘이웃과의 교류’이다
오나가와에서 지진에 의해 사망, 혹은 행방불명이 된 사람은 827명. 1만명을 넘었던 인구는 이주 등으로 인해 현재 70% 정도로 줄었다.
마을의 평지는 의료센터가 서 있는 언덕으로 남북이 갈려있다. 북쪽에는 국철 이시마키선 오나가와역이 재건되었고, 주변에 상업시설 등 마을 재건 계획도 추진되고 있다. 하지만 남쪽은 아직 손도 대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미야기현 전역에서 추진되는 방조제 건설을 오나가와초에서는 수용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바다가 안 보이게 된다’, ‘바다와 함께 사는 삶에 반(反)한다’라고 하는, 어촌에서만 나올 수 있는 의견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올해 4월, 원전에서 30킬로미터권인 오사키시에 ‘원전에 반대하는 모임’이 생겼다. 아베 미키코 씨는 “오나가와와 마을 바깥 사이에 패인 홈을 메워주는 움직임에 마음 든든하다”고 말한다.
미키코 씨는 지진이 일어났을 때 피난소였던 초등학교에서 키웠던 토끼를 현재 자신의 가설주택으로 데려와 키우며 마음의 위안을 얻고 있다. 유화를 그리는 것이 취미였지만 지진으로 화구가 떠내려간 탓에 지금은 수채화를 그리고 있다.
“학창시절에 별로 공부를 안 했으니 성인이 되어 중국어라도 배우자 싶었어요. 고작 3개월이었지만, 지진 때 쓸모가 있더라고요. 오나가와에서 일하던 중국인들이 주변 사람들과 마찰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했죠.”
미키코 씨는 ‘복구’란 무엇이냐 묻는 질문에 즉각 “이웃과의 교류가 되살아나는 것”이라고 답한다.
현재 지내고 있는 가설주택에서조차 아직 만나본 적 없는 사람이 있을 정도인데, 앞으로 공영주택으로 이주하거나 ‘자립재건’(주택건설 가능지에 개인적으로 집을 짓는 것)의 방식으로 다시 뿔뿔이 흩어지게 될 것이다. 게다가 복구 계획으로 인해 마을의 모습은 크게 변할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서로를 돕고 지탱할 수 있는 힘이 ‘이웃과의 교류’라는 것이다.
미키코 씨는 마을 안에 자립 재건하는 길을 택했다. “새로 짓는 집에는 모두가 모일 수 있는 장소도 만들고 싶다”고 한다.
※ <일다>와 제휴 관계를 맺고 있는 일본의 여성주의 언론 <페민>에서 제공한 기사입니다. 고주영님이 번역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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