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술과 약물을 이용한 성폭력 방지 캠페인 <#그건_강간입니다>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캠페인의 기획단이 그동안 논의한 내용과 변화를 위한 질문과 제안을 담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섹스 싫어하는 남자가 어디 있어요?’
어느 날 음악을 하는 친구가 홍대에서 공연한다고 해서 보러 갔다가, 공연 끝나고 홍대 놀이터에서 친구들이랑 일곱 명이 술을 마시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무성애자다. 성적 이끌림을 느끼지 않으며 개인적으로 성욕조차 경험한 적이 없다. 또한 나는 젠더퀴어(genderqueer, 젠더를 남녀 두 개로 나누는 성별 구분을 벗어난 성 정체성을 가지는 것을 뜻함)지만, 지정 성별이 남성이고 사회적으로도 남자로 인식된다.
그 날도 무성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도중이었다. 초면의 남자가 우리 쪽으로 오더니만 갑자기 “말을 끊어서 죄송한데 섹스를 안 좋아한다고요? 제가 돈을 내 줄 테니 저희 같이 안마방 갈래요? 섹스를 싫어하는 남자가 어디 있어요, 안 해봐서 그렇지…”라고 말하면서 마치 내가 웃기를 기다리는 마냥 나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당황스러웠다. 화가 나거나 기분이 나쁜 것을 초월하는 당황스러움에 반응을 못했다. 같이 있던 친구들 사이에 성소수자가 여러 명 섞여 있었고, 그들은 정체성을 거부당하는 것이 얼마나 큰 상처가 될 수 있는지 아는 사람들이었다. 친구들이 나의 반응을 살피는 것이 느껴졌다. 뇌에 과부하가 걸리는 것 같았다. 결국 반응할 생각조차 안 들어서 그냥 술을 다시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자 친구들이 그 남자에게 화를 내면서 가라고 했다. 그는 한 마디 툭 내뱉고 갔다.
“고자 새끼.”
나는 오랫동안 무성애자라는 정체성으로 인해 이런 식의 경험을 해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섹스를 싫어하는 남자가 어디 있어요?”라는 질문과 “고자 새끼”라는 말을 들은 것은, 단순히 내가 무성애자라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남자로 인식되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수없이 들었던 “고자” 소리, 친구들과 클럽에 가서 놀다가 무성애자라고 이야기했을 때 못 믿겠다며 자신이 시험해보겠다고 같이 모텔을 가자고 했던 여자도 생각나면서, 단순히 무성애자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무성애자 “남자”여서 그렇구나 하는 확신이 생겼다.
성욕 과잉의 남자들
오랫동안 나는 이러한 고민을 피해갈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주위에 “일반적인” 친구가 그다지 없었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성소수자로 정체화를 한 이후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성소수자, 그리고 페미니스트 커뮤니티들 사이에서 친구들을 사귀었다. 그래서 “일반적인” 섹스 이야기, 특히 섹스와 관련된 나를 향한 시선에 대한 이야기를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로, 대학교에서 사회로 진출하면서 내 주위 사람들을 내가 선택한 사람들로만 채울 권한이 점점 없어졌다. 남성적인 성에 대한 대화에 노출되는 일이 많아졌다. 그러면서 한편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면서 느낀 점이 있다. 우리 남자들은 스스로 과도하게 섹슈얼리티를 강요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스스로에게 우리가 성욕 과잉(hypersexual)이라는 것을 내부적으로도, 외부에도 교육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남자는 항상 섹스를 좋아한다. 언제나 섹스를 원한다. 섹스가 불쾌해서도, 불편해서도 안 된다.’ 우리가 만들어내고 스스로에게, 서로에게 적용시키고 있는 남성적 섹슈얼리티 규칙들 중 몇 개다. 이걸 이해하고 나니 그동안 겪은 많은 경험들을 점점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대학 시절 외국인애인을 사귀고 있을 때였다. 데이트를 하다가 어떤 선배를 길에서 만났다. 그런데 선배는 내 애인이 바로 옆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야, 니 여친 몸매 죽인다. 근데 외국여자 애들, 진짜 잘 대주냐?”라고 물어보았다. 내가 안 좋은 표정을 짓자 그 선배가 내게 욕을 했던 경험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술집에서 알바를 하며 보았던 손님들 생각도 났다. 회사 회식으로 온 것처럼 보이던 남자 단체손님 중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사람이 ‘2차로 모두 성매매 업소에 간다’고 했을 때, 불편해 보였지만 아무 말 못하고 눈치 보다가 밖에 나가 애인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하고 사과하던 남자도 있었다.
‘너도 공범이 돼줄 거지?’
내가 이렇게 파괴적이고 해로운 남성적 섹슈얼리티를 자각한 유일한 남자는 아닐 것이다. 아니, 나는 오히려 이러한 섹슈얼리티를 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늦게 깨달은 편일 것이다. 이미 많은 남자들은 이러한 잣대가 스스로에게 얼마나 큰 피해를 입히는지 알고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문제는 이러한 것이 불편하고, 불쾌하고, 아프고, 고통스럽고, 싫다고 말을 못하는 데에 있다.
홍대에서 그 남자가 나의 반응을 기다린 것도, 선배가 그 말을 하고 나서 내가 반응을 하지 않자 화내고 욕한 것도, 자신이 성폭력적인 질문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물음으로써 나한테 “너도 공범이 돼줄 거지?”라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남자들 사이의 약속으로서의 성폭력에 동참하지 않았기 때문에, 욕설과 함께 ‘고자’라며 나를 자신들의 세계에서 퇴출시키려는 말을 한 것이라고 본다.
우리는 어쩌면 스스로를 방안에 가둬놓고 문을 잠그는 셈이다. 그렇기에 다른 남자들이 지나가는 여성들에게 음담패설을 하거나 추파를 던지고 괴롭히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며, 여자에게 술을 먹여서 어떻게 해보고 싶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선배에게 “그건 강간입니다”라는 얘기를 하지 못하고 넘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남자들의 세계에서 그려지는 섹스가 아무리 폭력적이고 파괴적이고 고통스러워도, 불편해하거나 불쾌하지 말라는 요구. 그러한 요구는 “너도 공범이지?”를 넘어 이제는 공범이어야만 남자라는, 남자들 사이의 소속감을 강화하는 암호처럼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남자라는 위치에서 주어지는 사회적 권력을 알고 있고 그 위치에서 박탈된 사람들이 어떻게 배제되는지 보고 자란 우리는, 이러한 요구에 “예”라고 대답하고 계속 스스로를 이렇게 폭력적인 틀에 가둬 놓는다. 우리는 수감자이자 그 수감자를 감옥에 가둬놓고 감시하는 감시자의 역할을 모두 수행하고 있다.
강간에 대해 남자들이 회피하는 이야기
하지만 그 감옥 같은 방에 탈출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굳게 잠겨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었다. 우리는 그 열린 문 밖으로 걸어 나가면 되는 것이고, 그 기회는 예나 지금이나 늘 우리에게 있었다.
내가 언제든지 ‘우리에게 나갈 기회가 있었다’고 말하는 이유가 있다. 탈출구가 없는 방에 갇혀있는 것은 우리가 이러한 폭력적인 섹슈얼리티의 행동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고 참여할 수밖에 없는 구조의 피해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 문은 항상 열려 있었고, 우리는 그 문을 열지 않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 문을 열고 나가야 하는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위해서 이 책임을 받아들이고 문을 열자는 것이다.
그 방에서 나오기 위해서 직면해야 하는 것이 있다. 방문의 자물쇠를 열 열쇠 같은 것이다. <킹콩걸-‘못난’ 여자들을 위한 페미니즘 이야기>를 쓴 페미니스트 작가 비르지니 데팡트는 인터뷰 도중에 이러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강간은 항상 여성의 주제로 다루어진다. 내가 45세인데 30년 넘게 강간에 대하여 여성들이 모이는 것을 봐왔다. 나는 지쳤다. 나는 이제 남자들이 모여서 제발 자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어떻게 남을 강간을 할 수 있지? 강간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지? 이런 고민을 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여자들의 힘만으로 너희들의 생각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한 것 같으니까. 남자들에게는 강간은 언어가 없는 칠흑 같은 어둠, 마치 밤과도 같다. 이곳에 빛을 비추면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남성들은 폭력적으로 형성된 남성적 섹슈얼리티에 대한 책임감을 피하기 위해서, 성폭력에 대한 이야기도 회피한다. 남자가 피해자일 때, 남자가 가해자일 때, 어떠한 상황이든 우리는 성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의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로 만들어 버린다.
남성이 가해자인 상황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이야기는 모든 남자를 일반화시키지 마라, 저건 남자의 문제가 아니라 “일부 미친놈”의 얘기다 등이다. 혹은 피해자를 향해 네가 옷을 그렇게 입어서, 네가 술 취해서, 네가 먼저 유혹해서 등으로 책임을 전가한다. 이것이 남성적 섹슈얼리티에 내재된 폭력성을 회피하고 은폐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이다.
그리고 우리는 남성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이야기도 꺼려한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모두 남성일 때, 그 사실을 기존에 갖고 있던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의 불을 키우기 위한 장작으로 이용하는 모습을 자주 본다. 하지만 남성 간 성폭력에 관련된 연구를 찾아보면 다른 이야기가 보인다. 미국에서 진행된 감옥에서 일어나는 동성 간 강간에 대한 ‘Human Rights Watch’ 조사를 따르면, 가해자들은 대부분 이성애자로 정체화한 사람들이다. 즉, 이성애자여도 동성 사이에 권력적인 위치를 점령한 것을 강간으로 표출하지만, 그 이야기를 꺼내서 하지는 않는다.
많은 안티-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스트들이 강간을 여성 이슈로 만들면서 남성 성폭력 피해자들을 무시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가해자가 여성이고 피해자가 남성일 때조차 남성들은 피해생존자의 목소리를 묵살시키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너는 노력도 안 하고 쉽게 섹스를 했는데 그게 어떻게 강간이야? 감사해야 할 일이지”에서 시작해서 “여자한테 강간당하다니 남자 맞냐?”를 넘어 “남자가 어떻게 강간을 당할 수 있냐”라는 이야기까지 자주 접할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강간에 대한 어떠한 논의를 회피한다.
“남성성 김장하기”, 탈출구의 캠페인
우리는 남성성의 일부가 되어버린 폭력적인 섹슈얼리티에 대해 느껴온 불편함, 불쾌함, 상처, 그리고 아픔을 표현해야 한다. 그것이 탈출의 길의 첫 발자국이라고 생각한다. 남자들끼리 생긴 침묵의 약속을 깨야만 한다. 그것은 남을 위한 어떠한 희생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하여, 우리의 생존을 위하여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 성폭력에 대한 논의를 하는 것이 핵심적이라고 생각한다. 그 폭력성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행위에 대해 고민하고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이 방에서 탈출하기 위해 문을 여는 행위이다.
술과 약물을 이용한 성폭력 방지를 위한 #그건_강간입니다 캠페인을 진행하는 도중에 가끔 ‘왜 무성애자가 섹스와 깊은 연관성이 있는 캠페인에 관심가지고 참여했냐’는 질문을 받는다. 나는 남자들 사이에 강간을 넘어서 남성적인 섹슈얼리티의 불편하고 불쾌하고 아픈 곳까지 모두 들쑤시는 논의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문을 열고 걸어 나가는 길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을 거부하고 새로 걸어가야 하는 길이기에, 그 문을 여는 것이 두려울 수도 있어요. 하지만 혼자서 두려워하고 망설일 필요는 없습니다.
지난 1월 15일에 술과 약물을 이용한 성폭력 방지 캠페인에서 “남성성 김장하기” 간담회를 열었습니다. 이러한 고민들을 헤집고 다닐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개최한 행사죠. 그리고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 후속 모임도 기획하고 있습니다. 3월 4일 금요일 오후 7시 반,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같이 폭력적인 남성성의 방에서 탈출할 길을 모색해볼 수 있습니다.
이제 이 답답한 방의 문을 활짝 열고, 같이 걸어 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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