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6년 <일다>는 새로운 페미니즘 담론을 구성하기 위하여, “한국에서 젊은 여자로 산다는 것”을 주제로 청년여성들의 기록을 연재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습니다. [편집자 주]
‘저기 선배 옆에 가서 앉아’
때는 대학교 1학년, 어리버리 첫 시험도 끝나고 다가올 학내 축제(라고 쓰고 술 먹고 술 팔기)에 괜히 들떠있던 2007년 4월. 선배들은 럭셔리한 곳으로 엠티 가야지 않겠냐며 신입생들에게 바람을 넣었다. 럭셔리 엠티뿐만 아니라 전무후무한 매출을 기록한 전설의 학번이 되고 싶었던 동기들의 부푼 마음은 지금까지도(2015년 축제까지도) 이어지는 축제 주점 아이템을 떠올리게 했다. 바로 ‘바-니-걸-즈’.
머리에는 토끼 귀, 엉덩이에는 앙증맞은 토끼 꼬리를 달고서 남학우들은 흰 남방에 검정 타이를 맸고 여학우들은 핫핑크 바탕에 하얀 땡땡이 무늬가 있는 앞치마를 단체로 둘렀다. 손재주 있는 동기들이 선배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번쩍이는 종이에 토끼 얼굴(플레이보이 브랜드 로고)을 멋지게 그려 붙인 주점 대문도 만들었다.
주점에선 술과 안주팔기가 주된 일인지라, 역할 분담이 필요했다. 크게 요리, 서빙, 호객으로 나뉜다. 안주의 맛과 가격도 중요하지만 대학 주점 매출을 결정하는 건 결국 호객의 활약. 길거리에서 사람을 붙잡아 와야 한다. 그 누구도 노골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우린 다 알고 있었다. 돈 벌려면 이쁜 애들은 거리에서 호객하고, 안 이쁜 애들은 주방에서 파전 부쳐야 한다는 걸.
어찌저찌하여 역할은 나뉘어졌다. 어쨌든 누가 봐도 ‘이쁜’ 동기 몇몇이 호객을 맡았다. ‘이도 저도 아닌 나’(아무도 나에게 호객 역할을 권하지 않은 것으로 알 수 있다)는 그냥 음식이나 나르고 치워야겠다 싶어 서빙을 맡았던 것 같다. 그런 일들이 기분 나쁘거나 새삼스럽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나도 걔네들이 이쁘다고 생각했으니까. 돈 많이 벌면 좋으니까.
그런데 축제 마지막 날 일어난 ‘일’은 아주 훗날 <교복벗고 여성주의>라는 학습모임을 열게 된 주된 동기가 되었다. 그 날은 필드에 있는 고학번 선배들도 놀러 오고 우리끼리 뒤풀이도 해야 하니 늦은 시간까지 참여를 독려하는 과짱의 요청이 있었다. 주점을 열고 시간이 느지막해지자 예고대로 회사원 느낌이 물씬 풍기는 너덧 분들이 남자 선배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들어왔다. 동기들 중 몇몇은 진지한 표정으로 빠르게 주점 중앙의 넓고 좋은 자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갑자기 누군가가 내 옆구리를 치며 말했다.
“저기 선배 옆에 가서 앉아.”
그렇게 날 포함한 몇몇 여자애들이 고학번 선배들 사이사이에 한 명 씩 배치되어 멀뚱멀뚱 앉아있었다. 누가 봐도 뻘쭘해보이는 그 자리에 에스코트를 담당한 남자 선배가 와서 분위기를 띄웠다. 고학번 선배들을 향한 추켜올림을 곁들인 소개를 시작으로 말이 오가기 시작했다. 수줍게 손을 저으시던 그분들은 몇 번의 짠이 오가자 학생 시절 에피소드들을 이어갔다. 아~ 아~ 끄덕끄덕하며 들었지만 내 입은 갈 곳을 잃었다.
‘이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하지? 그냥 얘기 듣고 옆에서 술 따르라고 앉힌 건가?’ 심지어 ‘앞에 쟤는 저렇게 말도 잘 걸고 분위기도 잘 만드네, 나도 저래야 하나?’ 등의 생각들이 속에서 땀을 흘렸다.
어이없는 대학문화, 페미신의 이름으로 용서않겠다!
누군가가 이 테이블을 사진 찍어서 남겼다면 어땠을까. 토끼 귀와 꼬리를 달고 있는 신입생과 정장차림의 졸업생. 난 오랫동안 적극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그 장면을 두고두고 떠올렸던 것 같다. 무언가 이상하고 어이없는데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랐던 시절. 그때는 주제가 던져지면 네 시간 안에 그림을 찍어내야 하는 기술 외에 가진 언어도, 반박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이 말도 슬퍼진다), 대학 졸업 후 내가 자란 지역의 여성환경단체에서 활동하게 되면서 페미신(=페미니즘)과 만났다. 그것은 마치 길고 어두웠던 터널을 걷다 만난 한줄기 빛이 아니라, 그 터널 걷지 말라며 누군가 뒤에서 던진 돌멩이였다. 돌 던진 이에게 강하게 매료된 나는, 그 후로 페미니즘 도서들을 성경처럼 곁에 두며 문제의 그 장면을 떠올렸다. 축제의 그 장면뿐만 아니라 대학에서 겪었던 각종 행사들까지 줄줄이 소환하여 하나하나 심판하기 시작했다.
입학하자마자 신입생 환영회 장기자랑 용으로 연습했던 섹시댄스, 남자 동기들을 여장시켜 진선미를 뽑는 미스XX(XX는 과 이름의 줄임말), 예비역의 밤이라는 행사와 그 행사의 음식을 담당했던 여자 선배들, 남자 선배들이 농담처럼 던졌던 ‘넌 너무 말라서 만질 게 없어’ 따위의 말들…. 이제 와서 누구한테 화내야 할 지 모를 장면들이 휙휙 스쳐지나갔다.
더 절망스러운 건, 여전히 내가 졸업한 과 정도면 ‘양반’이라고 얘기되는 거지같은 현실이다. 늘 그렇지만 대학 과 내에 이런 행사들이 왜 존재하고, 왜 계속하는지, 누구도 설명하지 않는다.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덮어지고, 이상하다 생각할 틈도 없이 후배들에게 대물림되고 되풀이된다. 선배들과의 관계조차 하나의 스펙이 되어버리는 마당에, 갓 교복을 벗고 대학 또는 사회에 들어간 친구들 앞에 놓인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다. 가만히 있거나, 배제(탈락)되거나.
내가 지역 활동을 하면서 함께 인문학 수업을 들으며 알게 된, 이제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소중한 동생들도(대부분 여학생들이다) 곧 이런 문화 안으로 들어갈 텐데…. 그걸 생각하니 정말정말 싫었다. 가만히 있으라 하니 불안해도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을, 배 안에 갇혀있었던 고등학생들도 떠올랐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막 교복 벗은 동생들에게 페미니즘 전도하기
물론 페미니즘과의 만남은 고통스럽다. 일상이 불편해지고 불만스러워진다. 그러나 알 수 없는 해방감과 쾌감, 무언가 자꾸 말하고 싶어지는 욕구들, 그리고 내 느낌과 감정들을 온몸으로 들어주는 안전한 지지집단을 동시에 경험한다. 나는 이 경험을 동생들에게 주고 싶었다. 그래서 기운이 센 두 명의 친구를 꼬셔 여성주의 학습 모임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이제 막 교복을 벗고 대학에 진학하거나 취업을 하게 되는 동생들을 대상으로.
작년에 청소년 인문학 강좌가 열릴 때 모였던 친구들에게 홍보지를 뿌렸고, SNS로도 알렸다. 알고 지냈던 동생들 중 몇몇은 전부터 페미니즘을 배우고 싶었다며 큰 관심을 보였다. 총 5회로 기획한 <교복벗고 여성주의>는 오리엔테이션과 여성주의 영화를 함께 보는 회차를 넣고, 당시 가장 이슈가 되었던 사건들을 여성주의와 연결 짓기로 했다. 그래서 선택된 주제는 일본군 ‘위안부’, 메갈리안, 탈조선. 각 회차는 이런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먼저 기획자 3인은 이슈에 대한 발제를 PPT나 글로 짧게 준비하고, 마지막에 ‘질문’을 하나씩 던진다. 참가자들은 던져진 세 개의 질문을 재료로 삼아 공책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마구마구 적는다. 그리고 공책을 옆 사람과 교환한 후, 돌아가면서 친구의 글을 낭독한다. 그 후엔 다시 공책을 돌리면서 ‘실시간 댓글’을 작성한다. 공감을 표현하든지 다른 생각이나 느낌을 표현하든지 자유다. 발제-질문 던지기-글쓰기-낭독하기-댓글 달기. 세 시간이 모자란다. 일례로 2회차 <메갈리안은 여자 일베야?>에서 나온 이야기를 소개해보겠다.
“작년 6-7월쯤 메갈리안을 처음 보고 나오는 나의 솔직한 반응은 폭소, 웃음이었다. 분명 그에 대해 불편해 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왠지 나는 너무 웃겼다. 무진장 참을 수가 없을 정도로. 웃고 나서 휘몰아치는 감정은 분명 통쾌함이었다. 왜? 그래 사실 생각해보면 난 아닌 척했지만 무서웠고 걱정했고 피곤했기 때문이다. ‘루저남’이라고 한 마디 잘못했던 여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아직도 욕을 먹는데,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나이 많고, 돈 많고, 권력있는 남자) 박진영은 네 어머니가 누구냐고, 엉덩이 큰 여자가 너무 좋고 엉덩이가 작으면 눈이 안 간다고 노래를 하고 자빠졌기 때문이다. (…) 너는 말하는데 왜 나는 말 못하니. 나도 내 욕망에 대해서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로 표현하고 싶을 때가 있단 말이다.” - 박보현(도담) 발제 중
발제가 끝나고 세 명의 기획자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서, 각자 경험을 통해 생각해보게 하고 논의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즐겁게 싸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폭력을 통해 폭력을 잠재운 경험이 있나요? 어땠는지?’ ‘메갈-워마드-포용적 여성주의-기타 중 나는 어디에 기울어져 있는 것 같나요?’
<교복벗고 여성주의> 모임은 내가 살고 있는 집 거실에서 진행되었는데, 둘러앉은 원이 커질 때도 작아질 때도 있었지만 보통 열 명 정도가 모였다. 매주 발제를 해야 한다는 건 몹시 압박이었지만, 난 그 시간이 오길 은근히 기다렸다. 거실에 모여 발제를 듣고, 사방에서 들려오는 서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글을 쓰고, 누군가의 글을 낭독하고, 누군가가 나의 글을 낭독하고, 공책을 돌리며 댓글을 달고…. 빼곡히 채운 글 안에 담긴 개인의 역사들, 감정들, 다짐들은 동생들을 그(녀)들로 다시 보게 했다.
티는 안 냈지만 난 동생들이 가고 난 후 조용한 방구석에 앉아 내 글에 달린 댓글들을 읽고 또 읽었다. 글에 대한 놀라움이나 공감, 위로가 한껏 담긴 글자들은 참 따스하고 몽글몽글했다. 회차가 지날수록 글자 모양만 봐도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게 되었고, 글자에 담긴 표정과 목소리, 심지어 성격까지 읽히니 한 명 한 명이 모두 특별하고 예쁜 모습으로 마음 안에 담겼다.
이번에는 교복‘입고’ 여성주의다!
모임은 끝났다. 동생들 중 일부는 대학에 입학했다. 다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궁금하던 차에 우연히 그중에 한 동생과 잠깐 일을 같이 하게 되어 일정 기간 만났다. 올해 3월 즈음이었다. 그는 하소연을 하고 싶다며 신입생 OT에서 자신이 겪은 황당한 사건들을 줄줄이 털어놨다.
“진짜 어이없는 게 첫 날에 각 조마다 조장이랑 깃순(돌)이를 정해요. 근데 조장은 술을 많이 받으니 남자가, 깃순(돌)이는 끼를 많이 부려야하니 여자가 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밤에 조별로 둘러앉아 술을 먹는데 안주가 떨어졌거든요? 근데 안주를 받아오라면서 깃순이를 본부로 보내는 거예요. 근데 또 깃순이가 한참동안 안 와요. 알고 보니까 본부에 있는 남자선배들 앞에서 장기자랑을 하고 그만큼 안주를 받아오는 거라서 늦었대요. 남자 후배가 가면 욕먹고.”
“두 번째에는 깃순이를 차마 혼자 보낼 수 없어서 제가 같이 갔어요. 과자를 받아가려고 했는데 이러는 거예요. 이 과자가 3천원 짜리라고. 장기자랑 하나에 한 개 드릴 수 있다고. 무슨 지들은 앉아서 술 마시면서 어디 한번 해보라는 식으로 우리를 보는 거예요. 진짜 황당하고 과자 받으면 얼굴에 집어던지고 싶었어요. 누굴 안주로 아나. 이게 제가 대학에서 받은 첫 대우에요. 진짜 이런 건 꼭 없어져야 되요. 그래서 저 내년 새터 따라가서 여자새내기들 꼭 지켜줄 거예요.”
대학 안 문화는 여전했지만, 나는 동생의 말을 들으며 괜스레 뿌듯했다. 그는 이어 힘주어 말했다.
“진짜 누구나 여성주의 다 배워야 돼요. 여성주의 몰랐을 땐 차별이란 것도 모르거든요. 익숙해서. 근데 깨닫고 나니 많은 차별이 보여요. 그리고 제가 요즘 큰 변화라고 느껴지는 게 남이 정한 기준에 반항해요. 고등학생 때는 그냥 성적이나 선생님들의 말에 휩쓸려 살았거든요. 근데 요즘은 조금 더 나를 위해, 내가 생각하는 옳은 것들을 위해 살려고 해요.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에 더 확신도 생기구요.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에 자신감이 생겼어요. 그럴수록 더 귀와 마음을 열어야 한다는 것도 잊지 않구요.”
동생들에게 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도리어 너무 많은 배움으로 충만했던 올해 1월. 그 배움의 자극들과 뿅뿅한 순간들을 그리워하는 내 마음이 하늘에 닿았는지, 5월 중순에는 4년째 지역에서 열리고 있는 청소년 인문학 강좌의 기획 총괄을 맡게 되었다. 이번에는 교복 입은 친구들과 모여 앉기로 했다. <교복‘입고’ 여성주의>다. 재정이 있으니 강사도 두 명이나 섭외했고, 간식도 빠방하게 준비할거고, 자기방어훈련도 배워보며 놀아볼 거다.
그리고 교복벗고~에 함께했던 이들도 이 기획과 진행에 참여한다. 이렇게 든든할 수가. 두 배 더 힘차게 자매님들께 페미신을 전도해야지. 이렇게 그 동생의 동생들, 또 그 동생의 동생들이 둘러앉아 무릎의 온기를 나누는 자리들이 이어질 것을 상상하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마지막으로 자매님들과 페미신께 기도하며 글을 마무리 짓고 싶다.
‘우리 세포 안에 깃드신 페미신이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북유럽에서 이룬 것 같이 조선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반박할 언어를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차별한 자를 구조 안에서 이해한 것과 같이, 우리의 분노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알파걸의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가부장제에서 구하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자매님들과 페미신께 영원히 있사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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