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6년 <일다>는 새로운 페미니즘 담론을 구성하기 위하여, “한국에서 젊은 여자로 산다는 것”을 주제로 청년여성들의 기록을 연재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습니다. [편집자 주]
좋은 마음으로 하기엔, 늘 나만 하게 되는…
회사를 옮긴지 2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제주도로 워크숍을 갔다. 내가 종사하는 곳은 문화업계인데, 프로젝트에 돌입하면 몇 달 간은 한 팀처럼 움직여야 하는 특성상 협력업체, 아티스트와 워크숍을 가는 일이 종종 있다.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2박 3일 정도 숙식하며 콘텐츠 아이디어, 마케팅 방향 등을 논의하고 유대도 강화하는 식이다.
이번 워크숍에는 20대 후반의 여성이자 4년차 대리인 나와 30대 중반 남성인 과장, 협력업체의 여직원 둘, 남녀 아티스트 두 명이 함께했다.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다. 공간 분리도 확실했고, 서로를 불편하게 하는 말과 행동은 하지 않았다. 즐거운 2박 3일을 보내고 서울로 돌아갈 수도 있었는데, 마지막 날 저녁에 날 불쾌하게 만드는 사건이 벌어졌다.
우리가 묵은 곳은 독채를 사용할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였다. 워크숍 기간 동안 아침은 본관에서 먹고, 점심과 저녁은 간단히 밖에서 먹고 들어오곤 했다. 그런데 그 날은 마지막 날이니까 숙소에 이것저것 사와서 좀 거창하게 먹기로 했다. 게스트하우스 사장님과 근처에 산다는 사장님의 지인 두 명이 들렀다. 우리는 회를 떠오고 해산물을 샀다. 새우를 굽고 매운탕을 끓였다. 소주와 맥주, 물과 음료수를 마셨다.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있었고, 과자와 과일도 내왔다. 술자리가 길어져서 라면도 끓였다.
이 글의 주제가 ‘제주 먹방’인지 의심 받기 전에 한 가지 정보를 더해 본다. 그날 술자리에선 일회용품을 사용하지 않고 대부분 게스트하우스에 있는 식기를 활용했다. 그 덕에 술자리가 파한 후 우리에게는 좀 더 돈독해진 관계, 허심탄회한 대화, 그리고 세 가지의 요리에 탕과 밥을 먹고 세 종류의 음료를 마신 후 디저트와 라면까지 먹어 치운 9인분의 설거지가 남게 되었다.
그 많던 설거지는 누가 다 했을까?
다음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설거지 생각이 났다. 부엌으로 갔다. 협력업체 사원급 여직원 한 명이 설거지를 막 시작한 참이었다. 나는 테이블 위에 어제 먹은 그대로 남겨진 그릇과 쓰레기들을 정리했다. 곧이어 여성 아티스트가 부엌에 들어왔다. 그녀도 곧바로 싱크대로 향해 설거지를 도왔다. 우리 팀 남자 과장이 부엌에 들어왔다. 잠깐 둘러보더니 곧 나갔다. 협력업체의 대리급 여직원이 들어왔다. 행주를 집어 들고 테이블을 닦고 쓰레기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부엌에 발걸음 했다가 그대로 나간 남자 과장과 부엌에 발걸음도 하지 않은 남자 아티스트가 뭘 하는지 확인해보기로 했다. 그들은 거실 소파에 앉아 자기 노트북을 들고 개인의 업무, 혹은 인터넷 검색을 하고 있었다. 난 그 모습을 잠깐 바라 보다가 부엌으로 돌아와 나머지 세 명의 여성과 함께 설거지를 끝까지 마쳤다.
같이 설거지를 한 여성들에게 남성 두 명만 쉬고 있는 이 상황에 대해 말을 꺼낼까 하다가 말았다. 지금 여기서 신경 쓰는 게 오직 나 혼자인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문제 제기를 하기엔 너무나 ‘사소한 일’인지 아닌지 되풀이하여 고민했고, 결국 아무 이야기도 하지 못했다.
그때의 감정 상태를 다음의 예를 들어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다같이 야근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먼저 퇴근한다. (물론 퇴근은 소중하다.) 자기 할 일이 없다면야 문제될 게 없지만, 그의 퇴근으로 인해 남아서 일하는 사람들의 업무가 가중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런데 당신을 제외한 나머지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 때 당신은 앞장서서 문제 제기를 할 것인가, 아니면 참고 넘어갈 것인가?
위 질문에 답하기 전에 한 가지 확인할 것이 있다. 설거지를 야근으로 비유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야근은 업무다. 워크숍에서의 설거지 역시 야근과 같은 업무의 영역인가? 나는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그날의 설거지는 업무가 아니라 ‘호의’의 영역으로 취급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공식적인 업무였다면 누구도 빠짐없이 참여했을 테니 말이다.
‘책임’이 아닌 ‘호의’라는 이름의 노동
회사 업무에서는 책임의 소재가 비교적 명확히 가려진다. 직원의 역량은 ‘책임진 것을 잘못 없이 완수해낼 수 있는가’를 기본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맡은 일을 잘못 없이 처리하면 유능하고, 그렇지 못하면 무능하다는 평판을 얻게 된다. 그런데 ‘돌봄 노동’과 연관된 ‘업무’에 대해서는 유독 ‘책임’ 대신 ‘호의’란 말이 등장한다.
나는 ‘돌봄 노동’에 익숙한 여성사원들을 여럿 보았다. 그녀들의 노동 덕에 많은 이들이 혜택을 보지만, 그 대가로 돌아오는 것은 ‘유능하다’는 평가가 아니다. 노동력을 들여 팀에 기여해 봤자(예를 들어 방문객이 사온 케이크를 잘라서 각자에게 나눠 준다거나) 유능한 사원이라는 호칭 대신 ‘엄마 같다’는 말이나 듣게 마련이다.
그에 비해 남자사원들은 ‘호의’란 이름의 노동을 받기만 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그 호의가 여성들의 추가 노동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을까?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스스로를 돌봄 노동에서 자연스럽게 제외시킨다는 걸 볼 때마다 특히 그런 의구심이 든다. 가장 흔한 방법은 자신이 돌봄 노동에 익숙하지 않음을 어필하는 것이다. 회사 업무를 통틀어 “전 이런 거 못하는데요”라며 자신의 무능을 이처럼 당당하게 고백하는 분야는 돌봄 노동 외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이같은 현상이 가능한 이유는 남자가 돌봄 노동을 못한다고 해서 불리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남성사원과 똑같은 태도로 돌봄 노동을 거부한 여성사원은? 평가 당한다. ‘센스 없다’는 말, 들어본 적 있는가? 케이크를 자르는 일은 업무와 전혀 연관이 없지만, 그로 인해 누군가는 센스 없는 사원으로 평가 절하되고 누군가는 평범한 사원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다.
나의 경우는 ‘엄마 같다’는 말을 들을 바엔 ’센스 없다’, ‘시집은 어떻게 갈래’란 소리를 듣는 걸 택하는 쪽이다. 미리 말해두지만, 회사 내에서 나는 요령이 좋은 사람이다. 상사와 동료들에게 할 말은 한다는 평과 분위기 잘 맞춘다는 평을 동시에 듣는다. 파트너 업체들은 내가 무르다고도, 모가 났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회사원으로서의 관계맺음에 꽤 유능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런 나라도 ‘호의’를 베풀지 않고도 ‘센스 없다’, ‘건방지다’는 평을 받지 않을 가능성은 0%에 가깝다. 여자인 내가 설거지를 돕지 않은 것과 남자인 과장이 돕지 않은 것이 같은 선상에서 평가되리라 생각하긴 어렵다.
한편으로, 회사라는 권위적인 조직에서 벌어진 일이니 성차의 문제가 아니라 직급의 문제가 아닐지 의문을 가질 수 있겠다. 비록 당시 워크숍 구성원 중 권력 구조의 최상위 계층에 속했던 남녀 아티스트 두 명 중 오직 여성 아티스트 한 명만이 설거지를 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내가 승진을 하면 설거지를 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을지 타진해보겠다.
결혼, 육아…설거지 안 해도 되려면 넘어야 할 산들
내가 일하는 문화업계는 다른 업계에 비해 성차별이 좀 덜할 것으로 비춰지는 것 같다. 젊고 소통이 활발하고 진보적인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들이 몸 담고 있을 테니, 좀 ‘말이 통하지’ 않겠느냐는 주위의 시선을 보면 그렇다. 실제로도 타 업계에 비해 비교적 덜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설령 정말 그렇다 하더라도 그건 ‘젊고’ ‘소통이 활발하고’ 등의 이유 때문이 아니라 단지 ‘여초집단’이라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재미있는 건, 이 여초업계에서조차 직급에 따른 성별 분화가 뚜렷하다는 거다. 회사 대표, 주요 결정권을 가진 팀장, 프로젝트의 디렉터 등은 대부분 남자다. 이유는 간단하다. 남자선배들은 굳건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지만, 여자선배들은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예상하겠지만, 여자선배들이 사라지는 주요 이유는 결혼과 육아다. 이곳은 저임금에 고강도 노동이 당연시되는 업계다. 일주일 내내 쉴 틈 없이 일을 해도 또 야근을 해야 한다. 남들이 일할 때도 일하고 놀 때도 일하기 때문에 주말에는 행사 진행에 매달려야 한다. 30대를 넘어 40대가 된 여자선배 중에서도 결혼하지 않은 여성들의 비율이 높은 건, 독립적이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도모하는 이가 많은 이유도 있지만, 많은 이들이 결혼, 육아와 함께 업계를 떠나 비혼(非婚) 상태의 여성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경우 역시 많기 때문이다.
결혼한 여성은 팀 내에서 위험한 존재다. 언제 임신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출산휴가를 떠난 경력 7년 차 대리의 빈자리를 대학생 인턴에게 맡기는 바람에 팀 내 원성이 심했단 얘기를 들은 적 있다. 그 원성은 주로 회사를 향한 것이었지만, 사장에게 항의할 의지도 용기도 없는 팀원들이 만약 새로 직원을 충원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면, 누구를 선호하게 될까? 모르긴 몰라도 ‘언제 둘째를 낳을지 모르는 기혼 여성’이 1순위는 아닐 것이다.
‘가정생활’ 때문에 커리어를 쉰 선배들이 다시 업계로 복귀하는 방식은 주로 두 가지다. 프리랜서로 활동하거나, 자기 사업체(주로 대행사)를 차리는 경우다. 어쨌든 몸 담았던 회사가 아닌 다른 자리로 옮기는 셈이다. 그에 비해 결혼, 임신, 육아로 인해 회사를 그만두는 남자선배는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다. 결혼을 놓고 경력 단절을 고민할 필요가 없는 남자선배들은 결혼도 하고 일도 하며 오래도록 업계에 남아 승진도 하고 자기 사업도 차린다. 그리고 그들은 여전히 비혼 상태로 나이를 먹는 여자선배들을 ‘놀린다’.
자기관리-못하면 승진 누락, 잘하면 루머의 중심?
결혼과 임신, 육아로 인한 경력의 공백 없이 승진한 여성은 전방위적 놀림과 소문의 대상이 되곤 한다.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나이를 먹어가는 여성들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기가 세다’거나 ‘실패자’다. 전자 때문에 후자가 되었다는 편견도 상당하다. (남자들은 게이로 ‘의심’받을 확률이라도 있지만 여성들에겐 레즈비언이라는 ‘혐의’마저 씌워지지 않는다.) 기세고 결혼, 연애와 같은 사생활을 포기한 여자들이 일을 못할 리 없으니 적어도 회사 내에서는 인정받아야 하건만, 그러기는커녕 여차하면 악성 루머에 시달리고 루저 취급을 감내해야 한다.
내 첫 번째 직장에서의 일이다. 같은 층을 쓰는 부서의 팀장은 40대 비혼 여성이었다. 그녀는 회사 내 또래 남성에 비해 팀장 직함을 2년이나 늦게 달았다. 항상 야근을 하고 보스의 말에 토씨 하나 다는 법 없는 충성스런 회사원인데다 꾸준히 성적을 내고 있었음에도, 이상하게 승진에서 밀렸다. 언젠가 한 번은 우리 팀의 남자후배가 회사 내에서 그녀에 대해 수군거리는 내용을 들었다며 내게 알려주었다. 사람들, 특히 남자선배들이 말하길, 그녀가 승진에서 자꾸 누락되는 이유는 ‘자기 관리를 못해서’ 즉 ‘꾸미지 않아서’라는 거다. ‘결혼을 못해서 일을 저렇게 열심히 한다’고 말한다고도 했다.
나는 후배에게 그런 말에 장단도 맞추지 말라고 일렀지만, 속으론 일견 맞는 말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그 누구보다 우리 회사의 보스가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여자의 제 1 덕목은 외모라고 여긴다는 이야기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면접에서 긴 머리 여성을 뽑을 확률이 높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그런 사장의 눈에 들기 위해 한 여자 대리는 회식 자리에서 웨이브를 췄고, 몇 명의 여성과장은 애교를 떨었다. 누구도 강요하진 않지만, 그렇게 해야만 여자들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했다.
‘무결함’이란 게 과연 가능한 미션일까
역시 같은 회사에 그 여성팀장과 비교되는 다른 여성팀장이 있었다. 예쁘고 날씬하고 늘 완벽하게 치장했다. 깨끗하게 다림질한 옷을 입었고 늘 화장에 신경 썼다. 그러니까 여성에게 요구되는 ‘자기 관리’가 철저한 사람이었는데, 일할 때 굉장히 이기적이었다. 자기에게 이득이 되지 않을 이에겐 눈길도 주지 않는, 일은 잘해도 인간적으론 호감 가지 않는 타입이었다.
그런 그녀에 대한 평판에서 가장 나쁜 부분은 아랫사람을 함부로 대하고 윗사람에게는 지나치게 공손하다는 점이었다. 즉, 상사에게만 ‘애교’가 있었는데, 그걸 가지고 남자 대리, 사원급이 모인 술자리에서 그녀가 사장과 불륜 관계가 아니겠냐는 말까지 나왔다고 한다. 유능하지만 꾸미는 데에 열심이란 이유로, 무엇보다 자기보다 후배인 남자들에게 애교를 보이지 않는단 이유로, 순식간에 ‘몸 로비’ 혐의를 씌워버린 거다. 그녀는 그냥 상사에겐 아부하고 부하에겐 권위적인 평범한 나쁜 상사였을 뿐인데. 그 루머를 내게 전해준 이는 동기 여성이었는데, 곧 회사를 그만뒀다.
위에서 언급한 여자선배들이 자신의 회사 생활을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견디고 있는지 잘은 모른다. 오랜 사회생활 속에서 그런 루머에 대처하는 법 정도는 일찌감치 깨우쳤을 수도 있다. 내게도 성희롱과 성차별이 회사 생활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던 것은 아니다. 중요한 건 성과였고, 동료들과의 관계였기에 그에 따른 스트레스가 가장 심했다.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해서 나는 언제나 발언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이유도 있다. 결정적으로 이게 아니다 싶은 순간이 오면 항의하고 싸울 수 있으니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안했던 것이다. 그러나 돌아보면 정말로, 언제나, 발언할 준비가 되어 있었나 의문이 든다.
실제로 나는 앞으로 겪게 될지 모를 부당함에 항의하기 위해서는 업무 처리를 늘 완벽하게 하고 동료들과 잘 지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 잡혀 있었다. 그래야만 사람들이 날 지지해줄 거고, 나도 떳떳하게 할 말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거다.
‘내 편을 만드는 경험’이 필요해
다시 설거지로 돌아가 보자. 당시에 여성이 네 명이나 있었는데, 정리를 돕지 않는 남성 두 명에 대해 왜 아무도 항의하거나 비난하기는커녕 의문조차 제기하지 못했을까? 아마 그때는 아직 서로가 ‘내 편’인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나 역시 그들을 믿지 못했다. 여성이라 하여 성차별 문제에 관해 무조건적인 동지가 되지는 않는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다.
예전에 한 여자동료는 내가 직속 남자상사의 성희롱 발언을 잘 받아친다는 이유로, 나에게 그를 이성으로서 좋아하는 게 아니냐고 물었다. 그녀의 질문에는 내가 성희롱 발언을 ‘웃으며 넘겼다’는 데에 대한 질타가 섞여 있었다. 자기가 보기에 심한 발언들인데, 그걸 참고 넘긴 건 성적 호감이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 그 사고의 흐름에 헛웃음이 났다. 또한 주변 여성들이 내가 잘 버텨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데에 충격을 받았다. 그 에피소드는 내 뇌리에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 상황의 방관자였다는 혐의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고 싶었던 것이다. 여성과 남성의 친밀도에는 성적 호감이 내포되었을 것이라는 매우 손쉬운 방식으로.
그런 과정을 지나 대리가 되고 과장을 목전에 둔 지금은 말하지 않는 생활에 익숙해져버렸다. 이 글을 쓰며 그간 내가 ‘가볍게 넘긴’ 많은 부당함, ‘사소한’ 성차별과 성희롱을 모른 척하며 하루하루를 보내온 시간들이 내 후배와 동료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진 않았을까 돌아본다. 남성 동료들에겐 “저래도 괜찮다”는 안도감을, 여성 동료들에겐 “나만 예민한가”라는 고립감을 전달했던 것은 아닐까. 식사 후 자연스레 남자사원들만 데리고 끽연을 즐기러 가는 보스를 피해 그늘에 숨어 담배를 피우는 여자상사들이 원망스러웠던 몇 년 전의 내가 느꼈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앞으로 수년 간 더 직장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예전에 비해 직장 내 성폭력과 성차별은 많이 사라졌고, 앞으로 점점 더 줄어들 거라고 기대한다. 그 안에서 동료이자 선배, 그리고 후배가 될 나의 역할을 생각한다. 내가 잘 하지 못하고 할 필요 없는 돌봄 노동에 대해 “할 줄 모른다”는 말을 많이 할 것이다. ‘성적 개방’이란 단어로 포장된 성희롱을 일삼는 상대에겐 “그건 성희롱이다”라고 정확하게 알려줄 것이다. 나쁜 상사, 나쁜 동료, 나쁜 후배가 있을 때 여성이라는 이유로 봐주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그녀를 정확한 사유로 비판할 수 있게 노력할 것이다. 이 결심들은 단순히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데에만 초점을 맞춘 것은 아니다. 내가 먼저 신호를 보내야 동조하는 사람과 아닌 사람을 가려낼 수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직장에서의 내 미래는 크게 밝지 않다. 일에 있어 큰 야망도, 장기적인 목표도 없으며 도달하고픈 지위도 없다. 그러나 회사는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며, 내 생활을 꾸릴 수 있는 임금을 지급하는 공간이고, 타인에게 나를 소개하는 가장 첫 번째 줄이 되는 공간이라는 사실은 당분간 바뀌지 않을 것이다. 회사가 내 전부는 아니지만, 그 공간이 불편하면 내 생활 전반이 불편해질 것이란 얘기다. 직장 내에 ‘내 편’을 필요로 하는 이유다.
그리고 ‘내 편’을 만들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내 입으로 내 입장을 명확히 표명하는 것이다. 굳이 공식적으로, 앞에서, 큰 소리로 항의할 필요는 없다. 뒷담화든 무엇이든 내 여력이 허락하는 방법으로 ‘내 편’을 만드는 시도를 꾸준히 했으면 좋겠다. 스스로의 다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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