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나이가 들면서는 우리가 산다는 것, 삶에 대한 전반적인 것들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됐어요. 나는 80세 먹은 노감독이니까 오랜 삶을 살아오면서 누적된 체험들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런 체험이 내 안에서 발효가 되고 이제 그런 기초적인 것을 가지고 삶을 바라보고 있어요. 제가 삶에서 느끼는 것들을 영화에 담아서 세상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은 거지요.”
영화 <화장>을 만든 임권택 감독의 말이다. 어차피 지나가버릴 홍역 같은 짝사랑 때문에 긴 시간 함께 해온 부인의 병수발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건 인간의 도리가 아니다, 라고 감독은 말을 잇는다. 8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병수발의 윤리가 인간의 기초 도리임을 깨닫는다? 언제나 어디서나 여성들이 ‘해왔던’ 병수발(의 윤리적 성격)을 남성들은 ‘깨달아야’ 하고, 이 깨달음을 위해서는 삶의 체험들이 축적되고 발효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화장>의 알리바이 “병수발에 지쳐서”
어떤 연령대건 상관없이 여성들은 병수발을 해왔다. 엄마, 아내, 며느리, 딸의 자리는 항상 잠재적 돌봄의 자리로 구성되어져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환자를 돌보는 매순간이 여성들에게 의미 있는 경험의 계기가 되었을까. 여성들이라고 매번 기꺼이 했을까. 하나마나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이제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한 ‘돌보는 남자들’의 서사가 과잉으로 감상적이기 때문이다.
엄살에 지나지 않는 이런 과잉은 그동안 여성들이 다양한 형태로 해온 돌봄의 역사를 그들이 사회가 국가가 너무나 돌아보지 않기에 가능해진다. 여성들이 누구를 얼마나 오래 어디서 어떻게 왜 돌봤는지, 그때 어떤 몸과 마음의 상태였는지, 거기에 개입하고 있던 힘들은 무엇이었는지 돌아보는 것. 이것이야말로 돌봄이 계급을 포함한, 가장 시급하고 첨예한, 정치적 의제가 된 지금 모두가 서 있는 출발 지점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제대로 돌보지 않을까. 이 깨달음이 없어서 영화와 소설 <화장>이 보여주는 병수발은 매우 이상하다. 당혹스럽고 불쾌하다.
화장(化粧) 그리고 화장(火葬). 이 두 개를 진정 서로 갈등하는, 즉 서로 상대방을 통해서 비로소 정의되고 규정되는 두 세계의 상징으로 형상화시키려면 영화 <화장>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했을까. 아니 최소한 무엇을 ‘하지 말았어야’ 했을까. 50대 중반의 남성, 화장품 회사의 오상무는 2년째 암 투병을 하는 아내의 병수발을 하고 있(다)지만, 그의 병수발은 건조하고 기계적이다. 그저 병상 옆에서 잠을 자고, 꼭 그래야 한다면 기저귀를 갈아 주거나 화장실에 데려가 똥오줌 지린 하체를 닦아줄 뿐이다.
단 한번도 ‘저 고통’을, 그 절대적 타자의 세계를 이해하고자 노력하지 않는다.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는 ‘저 생명체’가 붙들려 있는 생명과 비생명의 상태에 고뇌하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그 고통 안으로, 그 실재계의 내부로 들어가 보려 하지 않는다. ‘아내’의 고통, ‘아내’와 함께 보낸 시간, 함께 보낼 시간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다. ‘아내’를 넘어서, ‘아내’라는 사적 관계를 넘어서 ‘죽어가는 생명체, 그 타자’에 대한 연민이나 공감을 말하는 것이다. 혹은 이미 그이 안에서 명백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죽음이라는 타자에 대한 겸허한 질문을 말하는 것이다.
타자에 대한 연민이나 공감, 질문을 경유하지 않는 나의 자기 이해란 얼마나 허술한 기만이며 공허한 껍데기인가. 소설이든 영화든 <화장>은 삶과 죽음, 육체, 욕망에 대한 성찰과 느낌을 준다고 주장하지만 그 주장 자체가 텅 빈 남성권력에 지나지 않는다. 이 주장은 시대착오적이기에 내부에서는 더욱 초라하고 외부에서는 더욱 번지르르 하다. “병수발에 지쳐서”를 노골적으로 선전하는 장면 중 하나 – 병원 아내의 침상 곁에서 잠을 자고 출근하는 오상무의 셔츠 소매에는 얼룩이 묻어 있다. 얼룩 있는 셔츠를 굳이 관객들에게 강조해서 보여주는 이 장면은 촌스럽고 비윤리적이다. 그래서 어쩌라구? 자신이 입는 옷은 어떻게든 스스로 챙겨야 하는 거 아닌가, 라는 뻔한 말을 하게 만드는 장면.
실신하면 똥을 싸는 여자…카메라가 보여준 것
영화 <화장>에는 두 명의 여배우가 나온다. 오상무가 2년째 병수발을 하고 있는 아내와 그가 사랑하는 추은주, 각각 화장(火葬)과 화장(化粧)의 세계에 속하는 이 두 역을 맡는 배우는 김호정과 김규리다. 김호정은 현실의 장면에서 그리고 김규리는 오상무의 상상 속 장면에서 이렇게 저렇게 ‘벗은 몸’으로 등장한다. 특히 통상 금기로 되어있는 성기 노출을 감행한 김호정의 여배우로서의 결단은 ‘쉽지 않은 용기’로 여러 번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대본에 없던 구성인데, 촬영 도중에 감독이 ‘이래서는 느낌이 살지 않는다’고 판단하면서 성기 노출 쪽으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어떤 자세로 촬영되는가에 따라 벗은 몸은 누드 포즈가 되기도 하고 상처입기 쉬운 헐벗음이 되기도 한다. 영상물 등급위원회가 성기노출에 기계적으로 신경증적 반응을 보이곤 한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기계적인 잣대가 너무나 터무니없어서 분통 터져 한 감독들과 심의의원들과 관객들의 이야기도 많다. 문제는 필연성이다. 꼭 벗어야 하는가. 벗는다면 어떤 벗음이어야 하는가. 누드 포즈인가 아니면 실존적 헐벗음인가. 실존적 헐벗음이어도 꼭 성기를 노출시켜야 하는가. 노출시킨다면 그때 카메라 앵글은 어때야 하는가.
영화 <화장>에서 두 여배우가 ‘그렇게’ 벗은 몸으로 등장한 것과 관련해 소설 <화장>에 나오는 오상무의 다음 진술을 참조할 만하다.
“요강처럼 가운데가 뚫린 의자 위에 앉혔습니다. 의자 위에서 아내는 사지를 늘어뜨렸습니다. 아내의 두 다리는 해부학 교실에 걸린 뼈처럼, 그야말로 뼈뿐이었습니다. 늘어진 피부에 검버섯이 피어 있었습니다. 죽음은 가까이 있었지만, 얼마나 가까워야 가까운 것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저는 의자 밑으로 넣어서 비누를 닦아냈습니다. 닦기를 마치고 나자 아내가 똥물을 흘렸습니다. 양은 많지 않았지만, 악취가 찌를 듯이 달려들었습니다. “여보… 미안해…” 아내는 또 울었습니다. 시신경이 교란된 아내는 옆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아내의 시각은 앞쪽으로만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울면서, 아내는 자꾸만 고개를 돌리면서 두리번거렸습니다. 아마도 수치심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저는 샤워 물줄기로 바닥에 떨어진 똥물을 흘려보내고 다시 아내를 의자에 앉혔습니다. 아내의 항문과 똥물이 흘러내린 허벅지 안쪽을 다시 씻겼습니다. (중략)
저는 복도로 나와서 담배를 피웠지요. 새벽 두시였습니다. (…) 당신께 달려가서,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사랑한다고, 시급히 자백하지 않으면 아내와 저와 그리고 이 병원과 울트라 마린블루의 화장품과 이미지들이 모두 일시에 증발해버리고 말 것 같은 조바심으로 저는 발을 구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저의 조바심을 아신다면, 여자인 당신의 가슴은 저를 안아주실 것만 같았습니다.”
소설의 저 문장들을 시각 언어로 옮길 때 그 ‘시각’은 어떤 시각이어야 하는가, 이것이 촬영할 때의 결정 사항일 것이다. 보여준다, 무엇을 어떻게? ‘항문의 괄약근이 열려서 수시로 똥물이 흘러내리는 환자의 엉덩이와 허벅지를 닦아주는 장면’을 ‘보게’ 하려면 카메라를 어디에 맞춰야 하는가. 그 통제 불능의 와중에도 수치심에 떨면서 울면서 ‘미안해’라고 말하는 ‘그녀’의 실존적 고통과 그런 그녀를 지켜보며 씻기는 ‘그’의 실존적 고통 둘 다를 보여주려면 무엇을, 어디를 어떻게 보여줘야 하나. 혹은 무엇을, 어디를 ‘보여주지 않아야’ 관객들이 더 통렬하게 더 깊은 ‘봄’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누구의 고통에 더 윤리적으로 섬세하게 감응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다.
소설 <화장>도 영화 <화장>도 그러나 이 질문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병수발의 피로감’과 짝사랑의 홍역앓이 사이에서 진동하는 50대 중반 남자의 이야기였고, 끝까지 그 남자의 이야기로 남았다. ‘뼈만 남은 육신으로 검불처럼 늘어져 있는 여자, 두통 발작이 도지면 몸부림치다 실신하고, 실신하면 바로 똥을 싸는 그 여자’는 자신의 고유한 이야기를 남기지 못한 채 남자의 이야기에 삼켜져 버렸다.
삶과 죽음, 화장(化粧)과 화장(火葬) 사이를 고뇌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라고 해도 괜찮다. 그 고뇌가 사람들 ‘사이’에서 공명할 수만 있다면. 그러나 <화장>에서 사라진 것이 바로 이 ‘고뇌’다. 가장 목청껏 주장되었으나 가장 찾을 수 없었던 이 고뇌는 단지 여성/성에 대한 몰이해와 훼손을 넘어 자기주장에 눈 먼 남성주체들의 그 ‘눈 멂’을 다각도로 증명할 뿐이다.
시트로 가린 ‘그 남자의 수치심’
다시 한 번 맥락을 환기하자. ‘화장’의 화자는 오십대 중반의, 명백히 늙어가고 있는 남자다. 의사가 ‘병이라고 할 수도 없는 노화현상’이라고 말하는 전립선염 때문에 아프도록 방광을 꽉 채우고 있는 오줌은 화장과 화장 사이에서 흔들리는 이 남자의 현 상태를 가장 잘 드러내는 실존적 기표다. 이 기표가 섹슈얼리티와 맺는 관계는 방광에 들어찬 오줌을 빼기 위해 비뇨기과를 찾을 때의 구체적인 경험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간호사는 고무장갑 낀 손으로 애무를 해주듯 손을 움직여 내 성기를 키웠다. 고무장갑 낀 간호사의 손 안에서 내 성기는 부풀었다. 성기는 내 몸의 일부가 아닌 것처럼 낯설었지만, 내 몸이 아닌 내 성기가 나는 참담하게도 수치스러웠다. 간호사가 그 구멍 안으로 긴 도뇨관을 밀어 넣었다. 도뇨관은 한없이 몸 안으로 들어갔다. 요도가 쓰라렸고 방광 안에 갇혀 있던 오줌이 아우성을 쳤다.”
또한 그에게 “아, 살아 있는 것은 저렇게 확실하고 가득 찬 것이로구나.”라는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추은주의 육체를 향한 그의 열망은 “내 마음 속에서, 당신의 살들은 손으로 만질 수 없는 풍문과도 같았습니다. 그 분기 말의 저녁에도 오줌이 빠지지 않는 저의 몸은 무거웠고, 몸 전체가 설명되지 않는 결핍이었습니다.”라는 탄식과 만난다. 이쯤 되면 그의 고뇌와 수치심을 제대로, 즉 ‘느낌이 살게’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요도 안으로 도뇨관을 밀어 넣는 장면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여기서도 ‘어떻게’라는 질문이 유효하다. 간호사의 손에 의해 키워진 성기의 요도 안으로 한없이 들어가는 도뇨관. 이것은 화장과 화장의 경계와 섞임이 만들어내는 실존을 제대로 이해시키기 위해 매우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장면이다. 그러나 이 장면의 이미지화는 충분히 격렬하게 고민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비뇨기과 병원 침대 위에 누운 그의 하체 위에는 흰 시트가 덮여있다. 그뿐이다. 매우 흔하고 표피적인 장면. 이래서야 그의 고통과 수치심을 어떻게 관객이 느끼겠는가. 아니면 ‘비뇨기과’라는 표식만으로 이미 남성주체의 수치심은 표현되고도 남음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일까.
영화는 그 여자의 수치심과 그 남자의 수치심을, 그 여자의 고통과 그 남자의 고뇌를 평형감각 없이 재현하고 있다. 오히려 그 여자의 고통과 수치심을 과도하게 유사 리얼리즘 혹은 ‘실증주의’ 렌즈로 보여줌을 선택함으로써 재현의 고민 자체를 여배우의 몫으로 다 떠넘기고 있다. 이래서야 늙어가는 남자의 불안과 고뇌를 제대로 직면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신화에 지나지 않는, 그러나 거창하게 떠벌려지는 남성/성의 위기설에 자신의 이름도 써 올려 묻어가는 칭얼거림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당신께서 저의 조바심을 아신다면, 여자인 당신의 가슴은 저를 안아주실 것만 같았습니다.” 라고 소설 속 남자는 그야말로 조바심을 내며 칭얼거리고, 그것을 영화는 추은주가 남자를 찾아 그의 별장으로 차를 몰고 가게 만듦으로써 받아준다. ‘여자의 가슴’에 대한 남자들의 선망과 파괴욕망, 그리고 실패에 따른 우울과 오인된 정체성. 프로이트의 남성중심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는 달리 젖가슴 중심으로 부분대상 이론을 펼친 멜라니 클라인이 말한 그대로다.
영화 <화장>에서 가장 동의할 수 없고 이해하기 힘든 부분은, 똥물이 흐르고 기절할 정도의 통증으로 고통 받는 여성이 이미 서먹서먹하게 남처럼 지낸지 십 수 년이 된 남편이 지금 다른 여성을 사랑한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하면서 죽기 전에 한번만이라도 더 자신의 여성성을 확인하고자 그 남편과 ‘섹스하기’를 원한다는 설정이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아내의 침상 곁에서 계속 젊은 여자 추은주를 떠올리며 욕망했던 남편은 죽음을 앞둔 아내의 마지막 소망을 위해 비아그라를 먹고 침대로 가서 아내와 섹스를 한다.
욕망이나 쾌락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고통과 절망, 의무만이 전시되는 이 섹스 장면은 왜 필요했을까. 섹스가 욕망이나 쾌락이 배제된 채 애매모호한 실존주의적 은유로 사용되는 것의 부당함을 증명할 뿐인 이 장면은 여성/성에 대한 남성의 ‘앎’이 얼마나 오류인지, 얼마나 남성의 나르시시즘에 뿌리내리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단말마의 고통에 신음하는 아내의 침상 옆에서 계속 젊은 추은주의 몸을 상상한 것만으로도 모자라 그 아내의 ‘질투어린 괴로움’까지 요구했어야 하는가. 이것이 젖가슴 콤플렉스를 해소하지 못해 번번이 망상적-우울증적 단계로 퇴행하는 남성주체들의 미성숙한 정체성임을 왜 남자들만 모르는 것일까.
삶에 철들지 않는 ‘작가’와 ‘거장’의 초상
한국학자 김열규는 죽음을 오롯이 품지 않으면, 즉 삶의 한가운데 죽음을 두지 않으면 삶에 철이 들지 않는다고 <메멘토 모리>에서 말한다. 나는 김훈/임권택의 <화장>을 보면서 ‘삶에 철들지 않은/않는’ 남성 주체들의 에고를 느낀다. 삶과 죽음의 경계 혹은 그 상호 스며듦을 성찰한다고 하면서 정작 이 남성 주체들은 (작가든 감독이든, 혹은 텍스트의 주인공인 오상무든) 죽음을/타자를 품지 않은 자기만의 삶에 몰입한다. 활자 텍스트와 이미지 텍스트로서 <화장>은 각각 다른 지점에서 다른 방식으로 타자 모독적인데, 이미지 텍스트 <화장>에서의 모독은 다방면에서 심각하다.
어떤 주제를 구현하(고자 했)는가와 무관하게 영화 <화장>은 여성뿐만 아니라 몸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환자들이나 노년들의 인격을 무례하게 모독한다. 실제로 두 번이나 발병한 암 때문에 뇌수술을 받고 통증 때문에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용변을 통제 못하는 환자를 ‘리얼’하게 즉 실제로 돌봤거나 포괄적으로 경험해봤다면 여자배우의 아랫도리를 보여주는 것으로 그러한 존재 상태의 ‘리얼한 감’을 얻는다고 주장하기는 힘들 것이다. 통제 안 된 용변으로 더러워진 환자의 몸을 닦아주는 손놀림 몸놀림은 영화에서 저 남편이 보여준 것과는 매우 다르다. 세부사항 하나하나에서 치밀하게 ‘리얼’을 추구하지 않으면서 그저 여자/배우/환자의 성기가 보여야 리얼하다고 느끼는 그 ‘감정의 구조’는 얼마나 허구적이며 헛방인가.
리얼은 무엇보다 치열의 문제다. 그 사안을, 주제를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하고 질문하는가가 리얼의 핵심이다. 치열한 고민과 질문에서 정밀함도 나온다. 이것은 용기와 윤리적 결단, 타자 감수성을 요하는 일이다. 그런데 <화장>에서 암으로 죽어가는 환자, 고통의 한가운데 있는 그녀의 몸은 치열하게 질문되지도 정밀하게 관찰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남성 판타지의 폐쇄 고리 안에서 수도 없이 세워지고 부서지면서 견고해진 거짓 리얼리티에 동원되고 있을 뿐이다. 돌봄의 현장은 화장과 화장 사이를 부유하는 유사 실존주의 태도에 동원되기에는 너무나 리얼하다. 너무나 치열하다.
<화장>은 또한 동물권을 훼손한다. 거의 유일하게 즐거움의 원천이었던 개 ‘보리’를 ‘어쩌겠어, 주인의 운명이 그러면 할 수 없이 따라죽어야지’라며 안락사를 시키라고 유언으로 부탁하는 여자나, ‘개가 아주 건강한데요? 키우시기 힘들다면 분양시킬 곳을 알아봐드릴 수도 있는데요.’라는 수의사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안락사를 시키고 ‘홀가분하게’ 병원 문을 나서는 남자나 이해하기 힘든 건 마찬가지다. ‘보리’는 왜 등장해야 했을까. 여자와 남자가 부부로서 교감 없는 건조한 생활을 한지 오래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여자의 절망을 좀 더 가시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집안에 들인 동물을 생명체로서 책임지고 돌보는 것은 사람을 돌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생명윤리의 과제다. ‘주인’ 여자가 죽었고 그래서 그녀가 키우던 개를 안락사시킨 것이 이 영화 전체에서 뭐 그리 중요한가, 라고 한다면 동일한 논리로 되물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으면 왜 굳이 동물을 등장시켜 그런 방식으로 죽게 만드는가, 아니 죽이는가, 라고. 상황 때문에 동물을 돌보거나 책임지는 게 불가능할 수도 있고 또 오랜 관습에 따라 동물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개 ‘보리’는 문화인류학이 보호해줄 수 있는 울타리 너머에서, 미학적으로 전혀 설득력 없는 이유와 태도로 죽임을 당한다. 이것 역시 ‘삶에 철들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흔한 일인가.
삶에 철들지 않은 채 나이가 들고, 삶에 철들지 않았는데 ‘아는 사람’의 위치에서 삶과 죽음에 대해 발언하는 것은 문제적이다. 삶에 철든다는 것은 죽음이 삶과 함께 하나의 이야기를 짓고 있음을 알기에 가능한 것이다. 삶으로선 절대적 타자인 죽음과 대면하면서 씨줄 날줄로 뒤엉켜 하나의 이야기를 짓는 게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럴수록 타자성에 대한 근본 이해가, 절대적 타자인 죽음에 기원함을 기억하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소설 <화장>을 읽으며, 영화 <화장>을 보며 삶에 철들지 않는 ‘작가’와 ‘거장’의 초상을 확인한다. 그리고 병들거나 늙거나 너무 어려서 또는 인간이 아니어서 스스로 생존하지 못하는 몸들을 돌보는 일이 삶에 철드는 일임을 어떻게 보편적 지식이나 지혜로 만들 수 있을까 질문한다. 돌봄 위기가 보편화되고 있는 이 시대에 돌봄의 가치를 어떻게 하면 시대정신으로 세울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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