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의 육체를 빌어 여성의 경험표현

전시회 <세 여자의 방> 관람기

조유성원 | 기사입력 2003/10/10 [16:44]

익명의 육체를 빌어 여성의 경험표현

전시회 <세 여자의 방> 관람기

조유성원 | 입력 : 2003/10/10 [16:44]
세 명의 여성작가들이 ‘여성의 몸’을 주제로 전시회를 한다고 하기에 집을 나섰다. 도통 미술이란 것은 이해 못하겠다고 동행을 거부하는 옆집 아줌마까지 앞세우고 ‘여자들의 방’을 구경하러 간 것이다.

물어물어 도
착한 곳은 들썩들썩한 시장골목. 여기서 전시회가 있다는 건가 의아스러워 두리번거리자니 저만치 전시회를 알리는 천자락이 나풀거리고 있다. 우린 마주 보며 허허 웃어버렸다. 시장 통에 있는 낡은 건물. 하얀 페인트로 색을 칠하고 나무로 정성스레 계단을 만들어 놓았지만, 그 건물의 이력은 쉽게 짐작된다. 통상 가지고 있는 전시공간의 무게가 보이지 않는다. 미심쩍은 마음으로 계단을 올라가 부딪치는 첫 번째 문. 문 옆으로 비껴 보이는 낡은 살림도구들. 방이라더니, 여긴가? 설마. 고개를 돌려보았다가 우린 또 헤 웃었다. 거긴 정말 살림을 사는 살림집이었다. 그러니까 진짜 방이었던 것. 고개를 뒤로 돌려보니 저 뒤쪽에 전시회 문이 보인다.

쑥스러운 웃음으로 전시회 문을 여니 덩그러니 그림들이 놓여있다. 이상도 하지. 무안하기보단 편안하고 부드럽다. 우린 곧 그 공간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번 ‘세 여자의 방-the women's realm' 전시회는 2003 스톤앤워터 기획공모 선정 다섯번째 전시다. 기획전에 응모된 작품들 중 여성의 몸을 공통된 모티브로 사용하는 작가들이 있어 이번 전시회를 열게 됐다고 한다. 세 여성작가들이 그리는 작품들은 광고나 잡지에 등장하는 대중적인 이미지 속에서 불안하게 떠도는 익명화된 여성들을 표현하고, 불특정 다수의 여성들이 경험하게 되는 소외와 불안, 고통을 그림으로 이미지화 해냈다.

세 여자의 이름은 윤종은, 박수영, 백숙희다. 윤종은은 얼굴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삶 그리고 기억 속에 남아있는 고통의 잔상 들을 주로 표현했다. 블라인드 재료에 그려진 그림은 외면으로 나타나는 여성의 모습이 얼마나 왜곡되고 다양성이 소멸되어졌는지 보여준다. 이름없는 신체를 사용하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 획일화된 이미지에서 표류하고 있는 우리시대의 여성들의 모습을 드러내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다. 정체성이 소멸된 신체는 나 자신의 모습이며 당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일반화되어 버린 타자로서의 여성의 몸은 박수영의 그림에서도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박수영의 그림에 나오는 여성들은 거의가 눈동자가 흩어져있거나 아예 얼굴이 지워져있다. 그리고 남아있는 건 단백질 덩어리인 몸뚱아리뿐이다. 남성들의 성적인 대상으로만 남겨진 이름없는 몸뚱아리는 역겹고 처참해서 마음이 저리다. 지워진 얼굴, 그리고 발가벗겨진 아랫도리. 그 밑에 남성의 페니스를 상징하는 오이가 공격적인 태세로 서 있는 작품은 강렬하다. 영화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열차>에서 여자주인공이 줄을 선 남자들에게 차례로 강간당하는 장면이 오버랩되면서 마치 내가 그 자리에서 선채로, 혹은 여자로 살아가는 내 인생이 강간당하는 듯 소름이 돋았다.


박수영은 사회가 규정한 모성으로 인해 고통받는 여성을 형상화하기도 했다. 지친 얼굴로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도 보이고, 행복한 모습으로 젖을 먹는 아이와는 대조적으로 고통에 절규하는 여성의 얼굴이 겹쳐져 표현되기도 한다. 특히 후자의 작품은 개인적으로 출산과 양육을 경험한 여성으로서 나의 절규와 닮아있어 발을 뗄 수 없었다. 경험은 소통되는 것인가. 나와 동행한 아줌마 역시 그 작품을 바라보다 눈물을 글썽이며 한참을 서 있었다.

백숙희의 작품은 위의 두 작가들에 비해 상당히 감각적이다. 여성의 몸이 모티브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는 같은 출발이지만, 백숙희는 디자인적 감각을 이용해서 보다 다양한 이미지를 생산해내고 있다. 캔버스만을 고집하지 않고 엽서크기의 종이나 천을 재료로 삼으면서 새로운 시도를 한다. 단순한 선들이 만나 이루어내는 실루엣은 뛰어난 작가의 미적 감각을 느끼게 해준다.

여성작가들이 만들어내는 작품들은 전형적인 주제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일 때가 많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그리 간단치 않고 여성의 경험이 풀어지는 장 역시 제한되어 있는 현실이기에, 여성의 몸과 여성의 경험이 모티브가 되어 이루어진 작품들은 언제나 감동으로 전달된다. 또 이들의 작품들은 미술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통상적인 관념을 깨주고 경험의 소통이 곧 미술이며, 예술이라는 사실을 당당하게 전달해준다. 지금껏 내가 알고 있던 ‘미술 이해하기’는 남성적 권위에 바탕을 둔 바라보기가 아니었는지 되짚어보게 해주었다.

여자로 살아가는 경험을 같이 나누기를 바라고, 넓고 높은 천정을 가진 근사한 전시장의 권위에 질려본 적이 있는 사람, 그리고 예술을 쉽게 이해하고 여성적인 시선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이 전시회를 권한다. 전시회는 10월 4일 열리기 시작해 19일까지 계속된다. 장소는 안양 석수동에 위치해 있다. (문의: 031-472-2886)

짭짤한 덤 두 가지. 하나, 지난 기획전에서 소품으로 사용되었던 아동도서를 20%에 할인하고 있다. 권윤덕씨의 작품들과 <사물놀이> <동강이야기> 등 따스함을 전달하는 책들이 있다. 둘, 전시장 바로 위 옥상에 마련된 풀숲 휴식터. 작품을 전시하는 전시장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이번에는 휴식공간으로 비어있다. 전시장을 둘러보다 잠시 커피를 마시며 덥석 가까워진 하늘을 바라보는 것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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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지개 2003/10/20 [21:40] 수정 | 삭제
  • 일요일에 기사 보다가.
    그날 까지이길래.
    서둘러서 다녀왔어요.
    오랜만에 여행 다녀온 느낌이었어요.
    그림 되게 좋던데요..
  • 2003/10/11 [13:12] 수정 | 삭제
  • 시장통에 전시장이 있다는 애기요.

    기사를 보니까 더 가보고 싶네요.
  • 영랑 2003/10/11 [00:55] 수정 | 삭제
  • 잘 구경했습니다.
    소담한 전시회에 가보고 싶네요.
    기사도 편안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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