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을 통해 직접 건네는 기억
이와테현 리쿠젠타카타시.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한 쓰나미로 인해 연안부는 쓸려 내려가 버렸다. 현재 ‘복구’라는 명목 하에 흙과 모래로 대규모 둑을 쌓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숨의 흔적>의 도입부. 황량한 굴삭기의 움직임과는 대조적으로 초록빛이 빛나는 모종이 진열된 씨앗·모종점 ‘사토 씨앗가게’가 오도카니 서 있다. 쓸려 내려간 집 겸 가게 터에 직접 세운 조립식 주택 매장에서 가게주인 사토 데이치 씨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진다. “The seed of hope in the heart(마음에 희망의 씨앗을)…”
사토 데이치 씨는 쓰나미로 인해 일어난 일들을 독학으로 공부한 영어로 기록하고 자비로 출판했다. 일본어로 적기에는 너무나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숨의 흔적>은 지진 전의 생활을 이야기하는 사토 씨의 지진 후의 모습을 담고 있다. 둑 건설 공사로 인해 다시 한 번 잃어버리게 된 마을의 기억을, 보는 사람의 가슴에 새겨 넣는다. 감독인 고모리 하루카 씨는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났을 당시 스물두 살의 대학생이었다.
쓰나미가 휩쓸고 간 땅과 사람들과 직접 관계맺기
고모리 하루카 씨는 시즈오카시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적에는 차를 재배하는 조부모가 사는 산골 마을과 냇가를 찾아 산이나 시내에서 놀곤 했다.
“내 고향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있는 냇가라고 생각해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무언가를 만드는 일을 하고자 영화 제작에 뜻을 두고 도쿄예술대학 첨단예술표현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여전히 예술도 영화도 잘 모른 채, 대학 공부와 병행하여 사설 영화학교인 영화미학교에도 다녔다. 도쿄 생활에 적응하기도 벅찬 가운데, 자신의 표현 방법을 모색하면서 차츰 다큐멘터리 영화 쪽으로 향해 가고 있던 중이었다.
2011년 3월 11일, 대학 졸업식과 대학원 입학식 사이의 봄방학이었다. 도쿄 역시 계속해서 땅이 크게 흔들렸지만, 혼란은 일시적이었다. 고모리 씨의 마음은 동북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흔들렸다.
“점점 일상으로 돌아가는 도쿄의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었고, 뭔가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어요.”
한 달 후, 대학 친구인 세오 나츠미 씨의 제안으로 피해 지역에 가서 자원봉사 활동을 시작했다. 전달할 음식 재료나 전지 같은 것들을 차에 싣고 각지의 자원봉사자 센터를 방문해, 피난소의 물자 분류 작업을 도우면서 북쪽 아오모리까지 돌았다. 카메라를 갖고는 있었지만, 피해 지역이나 피해자에게 카메라를 들이대기는 망설여져 가방 안에 넣어둔 채였다.
하지만, 어느 피난소 여성이 “나는 이곳으로 시집을 와서 피해를 당했다. 친정이 있는 동네를 보러가고 싶지만 교통편도 없고,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대신 가서 찍어다주지 않겠냐”며 고모리 씨에게 부탁을 해왔다. 그때 처음으로, 촬영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피해 지역의 상황을 기록해서 도쿄에 공유하곤 했다. 그러다가 그 땅과 사람들과 직접 관계를 맺고 작품을 만들어 보기로 마음을 굳혔다. 일 년 후, 이와테로 이주했다. 그리고 3년에 걸쳐 <숨의 흔적>을 찍었다. 영화는 야마카가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2015에서 상영된 후, 재편집을 거쳐 2016년에 완성됐다.
기록과 표현을 ‘대화’로 연결하다
고모리 하루카 씨는 친구인 세오 나츠미 씨와 함께, 지진 피해 지역에서 사람들의 ‘전쟁의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먼 불│산의 종전>이라는 영상 작품도 만들었다. 한 할아버지가 전쟁에서 죽은 형을 기억하고 있는 건 자기뿐인데, 자기마저 죽으면 형은 또다시 죽는 셈이니, 그렇게 되지 않도록 이야기를 남겨두고 싶다고 말한 것이 계기였다.
“그 분의 기억에는 힘든 일뿐 아니라, 전쟁 시절의 놀이나 즐거운 추억도 있어요. 지금이랑 굉장히 비슷한 풍경으로 존재해요. 그걸 왜곡하지 않고 기록해두고 싶었어요.”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출정하는 오빠를 배웅하고는 유골을 받았을 때의 모습, 오빠의 출정을 슬퍼하는 어머니에게 화를 냈던 소녀의 기억 등 현실 속 참혹한 전쟁의 정경이 구술되었다. 이 이야기들은 세오 씨의 그림과 글, 고모리 씨의 영상으로 일본 각지에서 전시되고 있다.
현재 고모리 하루카 씨는 센다이에서 젊은 영화감독들과 미술사연구자들과 함께 사단법인 NOOK(영어로 ‘구석’ ‘조용한 곳’이라는 의미)를 설립해 활동하고 있다. 지역주민들과 힘을 합쳐 민화 기록과 워크숍 등 기록과 표현을 ‘대화’로 연결하는 작업을 하는 중이다.
파묻혀버린 마을, 기억을 어떻게 가져갈 것인가
<숨의 흔적> 마지막 장면. 둑 공사가 가게 앞까지 다가오자 주인공인 사토 데이치 씨는 가게도, 직접 판 우물도, 자기 손으로 하나하나 해체한다. 하지만 사토 씨의 넓은 등판은 끝이 아니라 시작을 알리는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지진 전 마을의 흔적도 모두 파묻혀버리는 셈입니다. 너무나 큰 고통이지만, 그들은 변하지 않고 살아갈 방법을 생각해내고, 마을의 기억을 어떻게 가져갈지를 고민합니다. 이게 몇 번이나 쓰나미가 덮친 마을에서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땅과 마주하는 방식입니다. 이곳에서 만난 분들이 살아가는 모습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삶의 혹독함을 견뎌낸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고모리 하루카 감독이 동북 지역 사람들과의 교류로 체감한 ‘자연의 일부로서의 인간’. 그 통곡을 견뎌낸 힘이 스크린에서 전해진다. (숨의 흔적 공식 사이트 http://ikinoato.com)
※ <일다>와 제휴 관계를 맺고 있는 일본의 페미니즘 언론 <페민>에서 제공한 기사입니다. 고주영님이 번역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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