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삶’을 질병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사회

<반다의 질병 관통기> 아픈 이에 대한 편견

반다 | 기사입력 2017/12/19 [21:48]

‘다른 삶’을 질병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사회

<반다의 질병 관통기> 아픈 이에 대한 편견

반다 | 입력 : 2017/12/19 [21:48]

※ 질병을 어떻게 만나고 해석할 지 다각도로 상상하고 이야기함으로써 질병을 관통하는 지혜와 힘을 찾아가는 <반다의 질병 관통기> 연재입니다. -편집자 주

 

비혼이라서, 채식주의자라서 몸이 아픈 거다?

 

“비혼주의자라서 아픈 것일지도 몰라요. 원래 사람은 음양의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 하거든요.”
“면생리대 쓰는 게 꼭 좋은 건 아닐 수도 있어요. 적당히 나쁜 것에 노출되어야 오히려 면역력이 생기거든요.”
“채식주의자라서 아픈 것일 수도 있어요. 고기도 먹고 둥글게 살아야 건강에 좋아요.”
“사회운동을 해서 아픈 거 아닐까요. 그런 사람들은 매사 부정적이잖아요.”

 

생각해보면 저런 말들이 시작이었다. 질병을 치료하는데 힘을 쏟기에도 부족했던 시기, 굳이 질병을 둘러 싼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됐던 이유 말이다. 7년 전 출혈, 갑상선암, 현기증을 비롯한 몇 가지 질병이 종합선물세트처럼 도착했던 그때. 갑상선암처럼 비교적 흔한 질병은 수술로 해결됐지만, 그 외의 것들은 병원에서 원인도 찾지 못하고 치료도 제대로 되지 않아서 혼돈 속에 놓여 있던 시절이었다.

 

대형병원을 떠돌다가 결국 유명하다는 의사, 용하다는 한의사, 다양한 대체요법사들을 찾아 곳곳을 다녔다. 그 과정에서 각양각색의 이들을 만났고, 진료실에서 긴 상담 중에 반쯤은 농담처럼 던지는 ‘저런 말들’에 놀라곤 했다. 그건 술, 담배를 좋아했던 나의 생활습관이 문제라는 말과는 다른 것이었다. 내가 선택한 삶의 가치나 정치적 실천들이 질병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었다. 그런 반복되는 경험 속에서 알게 됐다. 질병이라는 게 얼마나 많은 편견과 차별이 작동하는 정치적 영역인지에 대해서.

 

▶ 몸이 아픈 원인을 지목하는 말들. (이미지 제작: 조짱)

 

물론 저런 말들을 반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평등할수록 건강하다고 하는데, 현재의 불평등한 가족문화는 개인 건강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기 쉽다. 결혼한 여성들이 맞벌이 부부임에도 독박 가사노동과 독박 육아로 과로사 직전까지 몰리는 현실이 건강에 좋을 리 없다. 무엇보다 시집, 친정 등의 복잡한 가족관계 안에서 겪게 되는 일상적 차별과 과도한 역할 강요 등은 정서적 건강도 심각하게 해치고 있다.

 

또 일회용 생리대의 안전성 문제는 알다시피, 지난 20여년 간 여성 건강권 운동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던 주제다. 일회용 생리대 말고도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포함해서 미세먼지, 환경호르몬 등에 우리는 이미 과도하게 노출되어 있으며, 일상의 유해 물질에 의해 질병과 사망에 이르는 경우가 빈번해지고 있다.

 

채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15년 전부터 페스코 베지테리안으로 살고 있는데, 채식이 총체적인 건강에 무조건 해롭다는 보고는 드문 것으로 알고 있다. 오히려 많은 의사들은 점점 육식 섭취를 줄이는 걸 권하고 있다. 심지어 최근엔 신념에 의한 선택보다는 건강 때문에 채식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더 부정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들이 진취적이고 자율적 경향이 높다는 것은 알고 있다. 사회운동을 하는 이들의 건강이 더 나쁘다면, 그건 과도한 노동과 대부분 최저 생계비 수준에도 못 미치는 활동비(임금)의 영향이 클 것이다.

 

‘저런 말들’을 했던 이들은 아마 이런 생각을 갖고 있을 것이다. 비혼주의자들은 자연스러운 사회질서를 거스른다. 면생리대를 사용하는 이는 유난 떠는 사람이다. 채식이라는 실천은 좀 과도하다. 그리고 소위 운동권에 대한 거부감 같은 것들 말이다.

 

사실 저런 태도는 너무나 익숙해서, 조금도 새로울 건 없었다. 다만 내가 놀랐던 것은 일부 의료인 혹은 준의료인 위치에 있는 전문가들조차 음주나 흡연처럼 건강에 해롭다고 의학적으로 입증된 생활습관이 아니라, 자신의 편견과 차별에 근거한 의견을 환자로 만난 이에게 거침없이 할 수 있는 이 사회의 강고한 문화였다. 의료인이 이 정도이니 일반인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차별이나 평등이라는 단어에 비교적 민감하게 반응하며 변화를 꾀하는 이들도 때로 마찬가지였다.

 

내가 베지테리안 페미니스트로 살아가는 이유

 

▶ <육식의 성정치> 원서 표지 이미지. 캐럴 J. 아담스는 이 책을 통해 남성지배와 육식 문화의 상관성을 밝혔다.

지인들에게 여러 차례 들었던 말은, 건강도 안 좋아졌으니 이제 베지테리안으로 그만 살고 고기를 먹어야 한다는 종용이었다. 심지어 그 중엔 내가 왜 베지테리안으로 지내는지 잘 아는 이들도 있었다. 내가 처음 베지테리안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던 건 대학생이던 1990년대, 여성운동을 하면서였다. 아마 베지테리안-페미니스트들은 비슷한 경험을 했을 텐데, 성(性) 불평등이 종(種) 불평등과 연결되어있음을 알게 됐을 때 느꼈던 혼란과 자책감이 그 출발이었다.

 

‘여성이 몸’으로 환원되는 현실과 ‘동물이 고기’로 환원되는 현실의 연결점을 발견했을 때 만났던 감정. 더 많은 새끼를 생산하기 위해 평생에 걸쳐 임신하고, 그 임신한 새끼를 평생 빼앗기는 암소, 암퇘지, 암탉의 현실에 내가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여성을 ‘소유’하는 행위를 ‘먹었다’라고 표현하는 것의 직접성과 성폭력 가정폭력 피해자들이 ‘고기가 된 기분이었다’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다.

 

이어서 ‘포르노그래피가 여성을 암코기 덩어리로 묘사한다’고 지적한 안드레아 드워킨의 말이 머리를 맴돌게 되었다. 그 말을 잊을 때쯤엔 ‘고기는 포르노와 유사하다, 그것이 누군가에게 즐거움이 되기 이전에 그것은 누군가의 삶이었다’는 캐럴 아담스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밤거리 바닥에 널려 있는 룸살롱 전단지에서 속옷 차림으로 웃고 있는 여성을 보면, 햄 포장지에서 웃고 있는 소의 얼굴이 나도 모르게 떠오르기도 했다. 당연히 공장식 축산이라든가 소의 식량은 87억 명의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양에 맞먹는다는 통계. 그리고 점점 고기 가격은 저렴해 지고 있지만 그 ‘비용’은 지구와 제3세계에 전가되는 현실도 빼놓을 수 없었다.

 

그건 마치 내가 추구한 변혁에 ‘여성’이 없었음을 깨달았던 순간처럼 허망했고, 페미니즘을 통해 새로운 눈을 갖게 됐던 때처럼 눈부신 일이었다. 성불평등과 종불평등의 연결성을 알게 된 것은 세상이 다시 한 번 재구성되는 경험이었다. 그렇게 언젠가는 채식을 시작하겠다고 결심했고, 그러고도 몇 년을 서성이다가 2000년대 초반부터, 미뤄둔 숙제를 시작하는 기분으로 페스코 베지테리안으로 지내기 시작했다.

 

나와 같은 이들에게 채식이라는 선택은 흡연이나 음주처럼 기호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나의 건강과 채식 간에 입증 된 사실도 없는데, 그토록 쉽게 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단순히 육식중심 문화와 채식에 대한 몰이해에서 오는 것일까. 고백하건데 나는 열렬한 실천으로 채식을 하기보다는 이제 거의 관성적으로 하고 있는 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말들은 나에게 너무 ‘자극적’이었다.

 

그 자극적인 말을 천천히 곱씹어 보던 중, 채식을 하던 초기인 10여 년 전 지인과 나누던 대화가 떠올랐다. 나는 채식을 편식으로 이해하거나, 채식한다고 세상이 얼마나 달라지겠냐며 비아냥대는 태도에 대한 불쾌함을 토로했었다. 지인은 자신도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다며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지인은 양심적 병역거부자였는데, 병역거부를 병역기피라고 비난하거나 군대 안가는 건 매국이라고 쏘아대는 이들 때문에 속상하다고 했다. 특히나 그는 가까운 이들의 모습에 힘들어 했는데, 그의 삶을 진심으로 염려하는 마음도 있지만 다른 태도도 공존하는 것 같다는 말을 했다. 그들로부터 병역을 마친 사람으로서의 억울함이나 너만 ‘양심적’이냐는 비아냥의 마음, 그리고 병역을 거부하지 않은 이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사람으로 평가될 거라는 불안감이 느껴진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이 매우 완곡하게, 군대 다녀와야 사람대접 받을 수 있는 사회라며 설득하는 것 같다는 설명이었다.

 

나는 그가 했던 말에서 연결점을 발견했다. 이를테면 채식주의자와 함께 밥을 먹을 때마다, 자신의 접시에 담긴 ‘고기’가 ‘동물의 시체’로 보일 거라는 불안감.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는 채식만이 올바른 실천인 건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내심으론 채식이 정치적으로 더 올바른 행위라고 위계를 설정해 놓음으로서 겪게 되는 자기분열 같은 것들 말이다. 내재된 그런 태도들이 채식주의자가 질병을 겪는 상황적 계기를 통해, 이제 그만 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거침없이 말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 채식의 종류 (출처: 한국채식연합)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것

 

그러니까 이건 채식의 문제만이 아니다. 아픈 사람에 대한 여러 평가나 종용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엄청나게 발전한 의학, 나날이 길어지는 평균수명 속에서 살고 있지만 동시에 질병에 대한 불안이 어느 때보다 강력한 사회에 살고 있다. 생명체로서 질병에 대한 생래적 불안 이외에, 질병에 걸린 건 자기 관리에 실패한 사람이라는 무의식적 낙인이 존재하는 문화에 놓여 있다. 특히나 자기관리를 최고의 덕목으로 일반화시킨 신자유주의 체제는 아픈 사람에게 ‘루저’라는 평가가 들러붙기에 최적의 조건이다.

 

즉 아픈 사람이 지닌 삶의 방식, 신념, 태도를 의학적 근거 없이도 거침없이 질병의 원인과 연관 짓고 변화를 종용하는 더 구체적 배경 한 자락엔 이런 게 존재한다는 의미다. 아픈 사람과 건강한 사람이라는 이분법적 선을 긋고, 위계를 형성하고, 낙인을 찍고, 그를 통해 자신의 불안을 회피하려는 태도 말이다.

 

우리는 모두 다양한 가치와 신념을 추구하며 산다.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의미 중 하나는 낯선 것으로부터 오는 어색함이나 불편한 느낌, 그것을 상대 탓으로 섣불리 돌리지 않고, 자신이 낯설고 불편하게 반응하는 이유를 스스로에게 물으며 그 실체를 조물락거려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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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화 2017/12/30 [01:34] 수정 | 삭제
  • 저도 2000년부터 채식을 하고 있습니다. 혼자 먹을 때는 비건으로, 사람들과 어울려야 할 때 선택지가 없을 때는 페스코나 락토 오보도 융통성있게 왔다갔다 합니다.
    사람들과 함께 고기굽는 식당에 가서도 아무 말 없이 상추에 밥 싸서 쌈장이랑 김치랑 먹으면 사람들은 제가 고기 안 먹는 줄을 전혀 몰랐어요.
    어떤 계기로 3년 전부터는 채식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사람들에게 내가 채식을 한다는 것을 말하며 살고 있는데
    채식보다 채식-커밍아웃이 훨씬 더 힘듭니다.
    채식하는 이유를 물어와서 내 의견을 말하면 같이 밥 먹던 사람들(같이 밥 먹을 만큼 나와 친한 이들)이 모두 밥맛 떨어지는 얼굴을 합니다. 그걸 알면서 하는 채식 - 커밍아웃은 정말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하지만 채식하는 사람도 살고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하여 좌중의 분위기 망치는 역할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제가 채식을 하는 이유 중에는, 환경과 식량문제, 동물권 문제도 있지만 페미니즘의 실천이라는 점이 아주 큽니다. 채식인 페미니스트 여러분, 다같이 힘냅시다.
  • 학이 2017/12/20 [19:33] 수정 | 삭제
  • 사회운동가...'부정적'이 아니라 '비판적' 혹은 '비평적' 사고를 하는데, 저런 정도의 인식수준이라니...황망하네요.
  • 그래 2017/12/20 [11:01] 수정 | 삭제
  • 저도 그 비슷한 말들을 들은 기억이 있네요. 어이없는 차별 발언이었죠. 결혼을 안해서 그럴 수 있다느니, 그런 얘기가 너무 쉽게 돌아다닌다고 생각했는데 콕 짚어주셔서 통쾌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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