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리타의 월경越境 만남] 독일에 거주하며 기록 활동을 하고 있는 하리타님이 젠더와 섹슈얼리티, 출신 국가와 인종, 종교와 계층 등 사회의 경계를 넘고 해체하는 여성들과 만나 묻고 답한 인터뷰를 연재합니다.
페미니즘 콘텐츠로서의 포르노그래피를 연구하다
소수자 젠더인 여성과 퀴어가 사회적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섹슈얼리티를 누리는 문제에 천착해온 라우라 메릿 박사는 ‘Sex-positive’(성 긍정 혹은 친 섹스) 페미니스트라고 스스로를 소개한다. 나는 성 긍정주의 페미니즘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거나 스스로를 그렇게 정의 내리지는 않지만 상당히 고맙게 생각한다. 나를 포함한 젊은 페미니스트들이 받아들이는 많은 섹슈얼리티 지식과 실천이 그 운동의 성과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예컨대 내가 스무 살 무렵에 홀로 즐겁게 알몸 사진을 찍었던 것, 성판매자에 대한 편견에 의문을 갖고 ‘성노동’이라는 용어를 고민해 볼 수 있었던 것, 최근에 클리토리스 오르가슴과 자위, 여성 사정을 예찬하는 글을 발표할 수 있었던 것, 지금 이 순간에도 윤리적으로 생산된 페미니즘적 포르노 콘텐츠가 세상에 나오고 있는 것이 우리 여성들에게 더 좋은 일이며 사회의 진보라고 여긴다.
하리타: 성 긍정주의 페미니스트로 스스로를 정체화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 입장은 언제 굳히게 되었나요? 또, 스스로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라우라: 젊은 시절 미국을 여행하면서 일찌감치 자기 섹슈얼리티를 확립하고 덕분에 자유를 누리는 미국 페미니스트들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어요. 그 때 배운 것을 바탕으로 유럽에서도 그런 페미니스트들을 찾고자 했죠. 저보다 앞서 활동한 여성들 중에 이미 포르노그래피 컨텐츠와 담론, 그리고 여성 보건 문제에 있어 근본적인 변화를 만든 이들이 있었어요. 친 포르노 운동(PorYes)과 성교육 작업에 있어서 저는 선구자들을 중요하게 기억합니다. 여성운동에서 성 긍정주의라는 날개는 예전부터 언론의 조명을 덜 받아왔어요.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차별에 맞서는 놀라운 투쟁을 보여줬는데도 말이죠. 개인적인 것이 곧 정치적이잖아요? 제게는 성 긍정주의 관점의 섹슈얼리티 문제가 여성해방의 가장 중요한 열쇠 중 하나예요. 그리고 (섹슈얼리티에 대한) 앎이 우리를 더 섹시하게 합니다!
라우라는 나의 질문에 한 시간 동안이라도 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간결하고 정제된 발언만이 나왔다. 성 긍정주의를 페미니즘의 갈래이며 예전부터 있어온 흐름이라고 정리하는 데에서 이 문제에 대한 라우라의 신중하고 겸손한 입장이 느껴진다. 성 긍정주의는 결국 섹슈얼리티에 대해 탐구하고 더 다양한 지식을 추구할 수 있게 하자는, ‘성을 더 잘 알자’는 것이고, 나는 알아들었다.
포르노그래피와 성매매를 둘러싼 페미니스트들 사이의 논쟁은 ‘여성주의자들의 성(性) 대결’이라는 자극적인 이름으로 역사에 남았고,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결국 수세대에 걸친 페미니스트들의 협동작업, 어떤 여성이든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자유롭게 살아갈 미래로 더 크고 튼튼한 ‘새’를 함께 날려 보내는 과정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검열법 논쟁이 있었던 1970년대에 ‘PorYes’(친 포르노) 운동 진영이 생겨났다. 1980년대에는 대중적으로도 유명한 페미니스트 알리스 슈바르처가 독일에서 포르노 반대법을 제정하기 위한 ‘PorNo’(포르노 반대) 캠페인을 벌였다. 이때 ‘PorYes’ 진영의 반응은 어떠했냐는 질문에 대해, 라우라는 이 둘이 대립 관계가 아니라 ‘자매 관계’라고 강조한다. 반대 측의 분석에 찬성 측도 사실 동의했다. 주류 포르노 콘텐츠의 95%가 성차별적이고 인종차별도 담고 있다는 분석 말이다.
입장이 갈리는 부분은 다만 해결 방안에 대한 것이다. 친-포르노주의자들은 기존에 왜곡된 섹슈얼리티 묘사를 바꿀 대안적, 페미니스트적 콘텐츠로 대응하자고 했다. 그런 콘텐츠로 성교육을 하고 새로운 문화를 만들자는 것. 여기에는 문화콘텐츠 검열에 반대하는 사람들, BDSM(성 기호 중 가학 성향) 향유자들, 성노동자와 퀴어 액티비스트들의 목소리도 함께 있었다.
대안 포르노그래피 시상식을 만들다
라우라는 대안적인 포르노그래피 발굴과 보급, 토론에 많은 노력을 들여왔다. 2009년 베를린에서 2년마다 열리는 대안 포르노그래피 시상식 ‘PorYes Award Europe’ 창립자이기도 하다. 이 축제 홍보 차 진행된 다른 인터뷰에서 라우라의 목소리를 더 들어본다.
-2017년 10월 21일 일간지 Tagesspiegel 인터뷰 “Rein, Raus, Spritz ist Blödsinn” 중에서
질문: 대안적인 포르노그래피의 분류 기준은 무엇인가?
라우라: 우리가 사회에 요구하는 가치들과 유사하다. 우선 다양성이다. 모든 사회구성원들의 욕망이 두루 담겨있어야 한다. 새로운 촬영 미학도 기준이다. 모든 젠더와 몸이 반영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합의’(consensus)라는 가치도 중요하다. 촬영에 관계된 모든 사람들이 무엇을 할 것이고, 어디까지 할 것인지에 동의해야 한다. 마지막 기준은 공정함이다. 노동자들이 일하기 좋은 환경과 적절한 임금, 정서적 제도적 지원이 있어야 한다.
질문: 전통적인 포르노 소비자들, 남성들은 이러한 대안-페미니스트-퀴어 포르노그래피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나?
라우라: 우리 타깃은 퀴어-페미니스트 집단만이 아니다. 서브컬쳐를 뛰어넘는 것을 항상 목표로 하기 때문에 남성들도 물론 고려한다. 사실 남성들의 반응도 좋다. ‘(섹스를) 잘 해야 된다’는 압력에서 남자들도 해방시키고 싶다. 들어갔다, 나왔다, 사정? 그건 그냥 넌센스다! 포르노 소비자 다수가 남성이라는 것의 장점도 있다. (이미 그들은 소비자 층이기 때문에) 새로운 메시지를 갖고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만 고민하면 된다. 남성들도 기존 포르노 외에 다른 볼거리가 있다는 것에 고마워한다.
질문: 주류 포르노 업계에 이런 메시지가 받아들여지고 있나?
라우라: 그렇다. 하지만 대부분 피상적인 수준으로 용어만 차용되곤 한다. 예를 들어 “여성친화적인 포르노”, “친-섹스”와 같이. 퀴어 포르노 배우들이 주류업계의 러브콜을 받고 있다. 하지만 갈등도 많이 일어난다. Jiz Lee라는 배우는 촬영을 위해 다리털을 밀라는 요구를 받고 그만두었다.
-2017년 10월 18일 문화잡지 Spex Magazin 인터뷰 “Vereinte Säfte – PorYes-Award-Initiatorin Dr. Laura Méritt im Interview” 중에서
질문: 포로노 업계에는 아직도 성차별이 스며있다. 남자가 초점이다. ‘그’의 필요가 해결되고 ‘그’의 욕망이 충족되어야 한다. 이런 패러다임 왜 21세기에도 여전한가?
라우라: 업계는 아직도 극도로 보수적이고,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정형화된 이미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성교육의 부재도 원인이다. 자기 성기의 해부학적 구조를 아는 사람을 드물다. 여성의 성기는 종종 부정적이거나 불완전한 것으로 묘사된다. 성별 차이를 강조를 강조하면서 그 차이가 상호보완적인 것이라 한다. 재생산 메커니즘에 치중한 계몽주의 시대 때의 성교육 지식이 아직도 지배적이다. 욕망의 관점에서 섹슈얼리티를 다루지 않는다. 즐겁고 새로운 섹슈얼리티에 대해 사회 주류가 침묵하는 것이 주류 포르노그래피의 그러한 해석과 표현을 낳고 있다고 본다. 계몽은 따라서 페미니스트 포르노의 과제다.
여자 몸에도 전립선이 있다! 보수적 성의학에 도전
아이들 뿐 아니라 어른에게도 새로운 성교육이 절실하다고 믿는 라우라는 성 긍정주의 페미니스트 성의학자들의 발견과 주장을 쉽게 풀어 쓴 대중적 의학서들을 펴냈다. 먼저, 기사 서두에 나의 사정 워크숍 교과서로 언급한 <황홀한 솟구침 - 여성 사정>(The Gush of Ecstasy – Female Ejaculation)은 작은 책자 형태로 발간되었다. 두 가지 새로운 ‘사실’(truth)을 알리는데 주 목적이 있다. 1)그간 해부학적으로 규명이 덜 되었거나 의도적으로 축소된 클리토리스의 모습과 기능 2)여성 생식기에 전립선이 존재하며, 특정 부위가 자극되어 극치감을 느낄 때 이 곳을 통해 사정이 일어난다는 점. 독자들이 직접 사정 워크숍을 열 수 있도록 친절한 가이드라인까지 수록해놓았다.
여성 생식기의 명칭이 여성혐오적인 의미를 담고 있거나 가부장적 담론에 기반한다고 지적하며 새로운 용어를 제안한 것도 매우 반갑다. 책 속의 일러스트부터가 범상치 않다. 정 가운데 자궁이 있고 좌우로 난소, 나팔관, 아래로 질이 이어지는 평면적 그림, ‘아기집’ 위주의 시각이 아니다. 질을 중심으로 위와 아래, 옆, 안과 바깥의 다양한 각도에서 보는 3차원의 여성 생식기 모습이 줄지어 나온다. 질 입구 부분인 음문/보지(Vulva)도 섬세하게 그려져 있는데 특히 인상적인 것은 클리토리스 표현. 으레 점으로 표현되는 클리토리스는 라우라의 책에 따르면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이었다. 사실 바깥에서 보이는 삐죽 나온 조직 ‘클리토리스 진주’(Clitoral Pearl) 뒤에는 자루(shaft), 다리(leg), 구근(bulb)이라 이름 붙여진 거대한 조직과 신경망이 뻗어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여성들의 성감과 성욕, 성기능에 무한한 잠재력이 있을 수밖에.
한편, 2012년에 독일에서 출간된 <여성의 몸 새로 보기>(Frauen Körper Neu Gesehen)는 1987년 1판을 확장, 개정한 것이다. 당시에도 여성의 몸을 광범위하고 긍정적으로 그린 흔치 않은 책으로 주목을 받았다. 남성의 몸을 그린 해부학도가 있고 그 중 여성만이 가진 특징을 따로 떼어 설명하는 기존 방식이 아니라, 여성의 몸 전체를 온전히 묘사하면서 독자들이 자기 몸을 스스로 살펴볼 수 있도록 안내한다. 흔한 여성 질환들과 피임법, 안전한 섹스와 임신중단, 여성 생식기 성형술에 대해서도 여성운동의 역사를 짚어가며 소개한다.
처음 아마존 온라인 서점에 올라갔을 때 표지 이미지에는 검은 줄이 그어져있었다. 표지에 나온 여자는 상반신을 다 드러내고 청바지만 걸쳤는데, 바지 위쪽으로 보지털이 보여서다. 아마존은 ‘기술적인 문제’가 있었다고 해명했지만, 그런 건 처음 본다는 듯 짐직 놀란척하는 어떤 남자들의 표정이 보이는 것 같다.
하리타: 이 책 <여성의 몸 새로 보기>는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되었나요? 책을 쓰게 된 계기가 있는지, 어디서 영감을 받았는지 궁금합니다.
라우라: 당시(1987년)만 해도 여성 생식기, 특히 보지와 질을 섹슈얼리티의 중심에 놓고 논하는 책이 없었어요. 그런 문제 의식에서 여러 페미니스트들의 모여서 처음 만들었어요. 그 뒤 개정판이 나왔고, 올해는 드디어 영어판이 출간된다고 하네요.
하리타: 한국어판도 나오면 좋겠습니다. 책이 정말 좋아요. 무엇보다 일러스트를 처음 봤을 때 가히 혁명적이라고 느꼈어요. 의학계에서의 반응은 어땠나요?
라우라: 그 쪽의 반응은 좀 갈리죠. 일부는 여성 신체에 전립선이 있다는 걸 듣도 보도 못 했다면서 우리 작업을 학문적인 성과로 인정하지 않아요. 새로운 관점이 등장한 것을 반기는 이들도 있고요. 아직도 논쟁 중이지만 첫 출간 때에 비하면 사정이 훨씬 나아졌어요. 그 사이 성 긍정주의 페미니즘도 점점 커져왔기 때문에 누구도 마냥 무시할 수 없을 거예요.
하리타: 전립선 말고 논쟁적이 되는 부분이 또 있나요?
라우라: 용어를 둘러싼 주도권 다툼이 있어요. 예를 들어 일각에서는 ‘vulva’(보지)를 학술 용어로 보지 않아요.(학계에서 주로 쓰는 거는 ‘external female genitalia’) 그런 지적에 일일이 대응하지는 않고 때로는 그냥 그러죠. 역시 학계구나. 꺼져.(웃음)
하리타: 라우라 본인에게는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이 확고한 진실인가요? 아니면 여러 가능한 진실 중에 하나라고 보나요? 과학도 사회적 구성물인데요.
라우라: 나에게는 이게 유일한 진실이에요. 여성 전립선과 사정 메커니즘이 실재한다는 것. 우리 페미니즘 진영에서 15년 넘게 싸워온 것이기도 하고요. 다들 젖어있고 뿜어대는데, 그걸 사정이라고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그냥 오줌이야! 저 여자 오줌 싼 거야.” 그거야말로 말이 안 되죠.
이름표가 필요하면 써라, 그리고 떼버려라
나는 재작년에 라우라 메릿을 처음 알게되었을 때부터 뭐랄까, 롤모델로 생각했다. 박사학위를 따고 교단에 서는 등 원 없이 공부했고, 동시에 잔뜩 발기한 클리토리스처럼 섹시하고 자궁 속까지 웃기는 문화기획들을 실현시킨 그 삶이 아주 자유로워 보여서다. 예순 살을 바라보지만 깔깔, 호랑방탕하게 웃고 유쾌한 표정을 잃지 않은 걸 보며 저렇게 늙어야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새침한 마음도 이내 고개를 든다. 라우라는 독일에서 태어났잖아. 백인 여자잖아. 애초에 영향력 있는 집단 출신이란 얘기다. 만족스럽게 늙어가는 중년의 여유 덕분에 옆에서 푸근한 느낌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이 집을 나서면 곧바로 상기될 것을 알았다. 불안정하고 혼란스럽고 조바심 나는 나의 젊음. 인생 선배에게 조언을 구하는 심정으로 몇 가지 질문을 더 했다.
하리타: 성 긍정주의 페미니즘은 북미권과 유럽에서 주로 성행합니다. 가부장제와 종교 규율이 우세한 다른 지역에서는 좀 사치스러운 주제라고도 할 수 있어요. 베를린에는 다양한 지역과 문화권 출신의 여성들이 살고 있는데, 여기 살롱에서도 만날 수 있나요? 가령, 우리 지역 페미니즘 모임은 여러 군데를 나가봐도 절대 다수가 20~30대 백인 독일 여자들인데요.
라우라: 다양한 사람들이 와요. 하지만 나는 인종과 나이를 기준으로 머릿수를 헤아리지 않아요. 묻지도 않죠. 그런 타이틀로 행사를 열지도 않아요. 젠더 정체성에서도 마찬가지로, 트랜스젠더만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지도 않아요. 스스로 자신을 그렇게 소개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때 의식해서 알게 됩니다. 얼마 전에 무슬림 이주여성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참가자가 있었어요.
하리타: 구조와 구분을 해체하는 입장인가요. 일리가 있어요. 저는 여기서 외국인 유색인종 여성으로 살면서 일상적인 폭력을 겪기도 하기 때문에 그런 제 정체성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게 저를 옥죈다고 느껴질 때도 있죠. 차별과 배제에 반대하는 나의 언어 역시 구분 짓기, 분류하기인 것에 한계를 느낄 때도 있고요.
라우라: 안 그러려고 해보세요. 물론 쉽지 않을 거예요. 거의 자동적으로 작동하는 구분 짓기 사고방식을 스스로 인식할 때마다 무장해체 시켜보세요. 그냥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가게 둔다는 느낌으로요. 젊은 시절 저도 “난 레즈비언”이라고 선언하듯 자기소개하길 좋아했어요. 20년쯤 지나고 부터는 그 말을 뱉으면 “그래서 뭐?”(so what?)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 다음부터는 “나는 또한 다른 모든 것이야.”(I am everything)라는 쪽으로 마음가짐을 가져요. 이름표는 분명 유용해요. 스스로의 정체성을 세우고 받아들이고 동류 집단에 소속되는데요. 하지만 받아들여지고 나면 다음으로 넘어가는 거예요.
하리타: 오, 해방감을 주는 얘기네요. 이름과 정의와 규정이 중요치 않고 그냥 나로 존재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 하지만 현실에서 특권 문제가 자꾸 걸려요. 어떤 mtf(male-to-female) 트랜스젠더 작가는 퀴어 커뮤니티에서도 소수자 배제가 일어나고 특권이 작동하는 것을 비판했지만, 저한텐 그 상황이 아이러니하게 보였어요. 그 발언을 한 사람이 스스로도 여러 겹의 특권(생물학적 남성, 영국 시민권자, 백인)을 지닌 사람이었거든요. 정체성 위계에 대한 비판도 그 위계 꼭대기에서 나올 때만 파급력이 있는 것 같다고 느껴질 때가 많아요. 소수자들, 보이지 않는 여성들을 어떻게 보이게 할 수 있을까요?
라우라: 물론 맞는 지적이에요. 그런데 정체성은 가변적이고 유동적이기도 하지 않나요? 예를 들어 레즈비언 그룹의 지지가 필요한 상황이면 자신의 레즈비언 정체성을 강조해서 드러내지만, 장소를 바꿔 자신이 ‘젊은 여성’이라는 것을 전면에 내세울 수도 있죠.
나도 궁금한 점이 있어요. 한국에서 페미니스트로 활동하는 건 어떤가요? 하리타가 급진적인 축이라는 걸 대강 알아요. 작년에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참석차 한국에 갔었어요. 많은 한국영화가 우리가 익히 아는 주제들- 성폭력, 몸과 섹슈얼리티, 성적 대상화, 여권, 밤거리 안전–을 다루고 있었는데, 대개 문제 분석하는 단계에 있고 해결책까지 가지 않는 것 같았어요.
하리타: 저는 입장이 좀 애매하죠. 물리적으로 독일에 있으면서 한국에 글을 발표하고 있어서 직접 만나서 교류할 안정된 소속이 없어요. 외로울 때가 많죠. 이렇게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 저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라우라: 지금 잘 하고 있다고 있다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주어진 한계에 머물러있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에 반해 앞장서서 앞으로 나아가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는 모습을 아주 바람직하다고 봐요. 한국의 여성영화제에서 인상 깊었던 점은 200여명이나 되는 10-20대 여성들이 자원활동가로 활발하게 참여하는 모습이었어요. 베를린 같으면 그렇게 많이 사람을 동원 못해요. 그 젊은 친구들 외모나 꾸밈새가 서로 엇비슷하고 몰려다니는 것도 눈에 띄더라고요. 청소년들에겐 또래집단에 속하는 게 중요하죠. 독일 청소년들은 스스로 개별적이라고 믿고 있지만, 사실 그렇지도 않아요.
나이 듦이 좋다, 우리의 성취를 돌아볼 수 있어서
하리타: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어떤가요? 아직 그 시간을 살아보지 않아서 모르겠어요. ‘젊어서 좋겠다’는 말을 듣는 나이입니다.
라우라: 모든 나이 때가 저마다 좋은 시간이었어요. 나는 스스로 잘 나이 들어 왔다고 생각해요. 젊을 때는 여행에 혈안이 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알아요. 굳이 먼 호주나 뉴욕까지 갈 필요 없다는 것을. 지금 여기에도 내가 할 일이 많아요. 모든 이슈, 모든 분야에 힘을 쏟을 필요가 없다는 것도, 내 자리와 역할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면 된다는 것도 나이 들며 알게 됐어요. 베를린에 있다는 게 물론 큰 특권이죠. 여기가 글로벌한 사회이고 역동적인 변화가 계속 일어나니까요.
나이 듦은 좋은 일이예요. 내가 이룬 것, 여러 여성들이 함께 이룬 것을 돌아보며 뿌듯하게 곱씹을 거리가 많아져요. 어릴 때에는, 혹은 지금도 가끔 할 일이 너무 많다고 느껴요. 그럴 때 숨을 고르고 나 자신에게 말해요. “시간은 충분해. 지금까지 해온 것을 봐. 사회를 바꾸기 위해 활동하는 여성들이 이렇게 많아.” 각자의 길에서 자기가 발견한 걸 나누는 거예요. 비슷해 보이는 것도 결코 같지 않으니까 경쟁심이나 조바심 느낄 필요 없어요. 다양성이 우리의 자원이고, 더 많은 페미니스트가 있다는 건 언제나 좋은 겁니다.
하리타: 이제 마지막 질문이 남았네요. 향후 5년간의 삶의 비전은 무엇인가요?
라우라: 학교 교과서에 실리는 해부학 그림이 바뀌는 것을 기대합니다. 그 날을 위해 열심히 활동해왔고, 몇 년 내로 그 일이 일어날 것을 확신해요. 다른 길이 없거든요. 페어 포르노, 페어 섹스토이와 같은 움직임도 나올 거예요. 미투(#MeToo) 캠페인의 확산도 정말 좋아요. 위계에 의한 성폭력은 섹슈얼리티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기성세대의 인식변화와 자기성찰이 동반될 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지요. 여성들은 점점 더 강력한 주체로 사회에 나가요. 인터넷 덕분에 캠페인을 하면 쉽게 수백만 명에게 닿을 수 있어요. 지금이에요. 지금이 좋은 때예요.
에필로그: 불 꺼진 방에서 들리는 신음소리
금요일 저녁 6시 30분. 섹스클루티비테튼(Sexcluvititäten)에서 ‘PorYes Salon’이 열리고 있다. 얌전한 와이셔츠에 니트 조끼를 받쳐 입은 중년의 사내부터 수수한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의 남학생들, 옆머리만 바짝 민 힙스터 숏커트의 젊은 여자까지 다양한 사람들 사십여 명이 TV스크린 앞에 옹기종기 모였다. 오늘의 상영작은 베를린을 기반으로 한 ‘인디펜던트 사이키델릭 포르노’ 그룹 ‘MEOW MEOW’의 단편영화 4편이다. 한 편이 끝날 때마다 라우라가 평론 및 진행을 맡아 함께 자리한 여.남 감독 2인과의 대화를 이끈다. 신음소리 가득한 포르노를 단체로 보는 것부터가 이색적인데, 이렇게 학구적인 분위기라니. 대안적인 포르노를 통해 성교육을 하자는 라우라의 말이 대번에 와 닿는다.
감독1: 이 작품은 네 명의 출연 배우들과 얘기하면서 시나리오를 같이 완성했어요. 아스파라거스라는 채소는 잘못 요리하면 독성을 띌 수 있다는 사실에 착안해서 중심 소재로 삼게 됐는데요, 극중에서 페니스를 상징하기도 해요.
관객1: 으레 보는 포르노랑은 많이 달랐어요. 여자 캐릭터가 굉장히 적극적이었고 줄거리가 섹스 씬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섹스가 일상생활의 하나로 표현이 된 것 같아요.
관객2: 섹스가 끝나고 나서 ‘너무 좋았다’는 식으로 오버하는 장면이 없어서 좋았어요. 섹스할 때도 과장된 행동이 없었고요.
라우라: 사람들이 포르노를 보는 목적은 뭘까요? 재미? 자위의 도구? 우리가 보통 상업 포르노를 ‘메인스트림 포르노’라고 부르는데 사실 그 콘텐츠는 모두를 만족시키지 않잖아요. 주류가 아닌데, 그 명칭 자체가 아이러니한 거죠.
주연 배우: 저는 사실 깨끗하고 깔끔하게 하는 섹스가 취향이거든요. 그래서 서로 뭘 던지고 논다는 영화 속 페티쉬는 사실 별로였어요. 대신 꽉 묶이는 것에 대한 페티쉬는 있어서 그걸 찍을 때는 재밌었어요.
관객1: 서로 모르던 두 여자가 금세 친밀해져서 서로 장난치며 논다는 설정이 맘에 들었어요.
감독1: 스웨덴 카메라 감독과 작업했어요. 아무리 작은 씬이라도 그걸로 사회 모습을 표현할 수 있다는 모토를 가진 친구예요. 개인적으로 카메라 워크가 지금 봐도 참 맘에 들어요. 보통 카메라 2대로 찍는 게 최대인데, 여기서는 다양한 각도에서 장면을 담자고 3개까지 썼고요. 관 느낌을 낼 수 있는 큰 투명 용기를 찾아 헤매고 다시마를 재료로 한 젤리 100리터를 구해서 소품으로 썼어요. 100% 비건 젤리였죠.
관객2: 부드러움에 관한 포르노라고 느꼈어요. 느리고 몽환적이면서 음악이 좋았어요. 영화가 너무 빨리 끝나 아쉬웠어요.
라우라: 저는 포르노의 기능이 사람들의 성적 판타지를 화면으로 구현해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걸 보면서 사람들은 또 다른 판타지를 갖게 되고요. 불평등한 젠더만 획일적으로 재생산하는 게 그래서 위험한 거고요. 여러분들도 영화로 보고 싶은 판타지가 있으면 제작진한테 알려주세요.
[필자 소개] 하리타(정세연)- 독일살이 4년차. 온갖 차이와 차별에 대한 감각이 여전히 곤두서있다. 일다에 <29살, 섹슈얼리티 중간정산> 칼럼을 연재했고, 이를 바탕으로 <오늘부터 내 몸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어-더 자유로운 페미니즘을 위하여>(2017, 동녁)를 썼다.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환경사회학 석사과정을 마쳤고, 앞으로 젠더, 이주, 섹슈얼리티, 지속가능성을 주제로 계속 글쓰고 행동해나가려 한다. 하리타는 산스크리트어로 ‘초록’이다. facebook.com/haritamoonri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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