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은 오랜 기간 입양을 통해 아동을 해외로 내보낸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해외입양 이슈는 여성인권과 아동권, 빈곤과 차별, 인종과 이주의 문제가 중첩되어 있습니다. <일다>는 각기 다른 사회에서 성장해 모국을 찾아온 해외입양인 여성들의 목소리를 통해, 이들의 경험과 한국 사회에 주는 메시지를 듣고자 합니다. 이 연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보도합니다. [편집자 주]
[필자 소개] 하나는 1984년 전주에서 태어나 1988년 호주로 입양되었다. 2010년 해외입양인연대(GOA’L)의 <고향으로의 첫 여행>(First Trip Home) 프로그램을 통해 처음 한국을 방문했다. 이때 친가족과도 재회했다. 호주로 돌아간 하나는 호주 한국입양인 네트워크(Korean Adoptees in Australia Network)를 세우고, 입양인 지원단체 VANISH를 위해 일했다.
그리고 수년 간 그녀는 ‘뿌리의 집’과 ‘진실과 화해를 도모하기 위한 해외 입양인들의 모임’ TRACK, ‘한국입양인참여연대’ SPEAK를 비롯한 국내 NGO들과 함께 입양인 권익 찾기와 친가족 보존을 위한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그리고 매년 ‘싱글맘의 날’ 컨퍼런스, 최근 김해에서 열린 동료 입양인 얀 소르코크의 추도식 같은 행사에서 노래 공연을 했다. 하나는 2017~2018년 1년 동안 한국에서 생활했다.
30년 전 그 날, 내 이야기의 출발
내 첫 이주는 네 살 때였다. 그때 할아버지(외할머니 동생의 남편)는 나를 서울의 입양기관에 두고 갔다. “할아버지!” 나는 미친 듯이 매달렸다. “나 두고 가지마. 착한 아이가 될게.”
6개월 뒤, 나는 적도 너머 호주 태즈메이니아의 작은 도시에 있었다.
극적으로 보이려거나 동정심을 자극하려고 저 이야기를 한 건 아니다. 단지 그것이 원래부터 내 이야기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더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나중에 한국의 친가족들이 들려준 몇 가지 단편적이고 간접적인 기억들뿐이다. 그것들이 진짜인지 아닌지 사실 나는 모른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다른 가족들에게 그날을 결코 잊지 못할 거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버려질 거라는 두려움은 내 몸 깊이 살아있어서 30년이 흐른 지금에도 그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으로 이주를 감행하기까지 8년이나 걸린 이유
2017년까지 나는 이미 한국을 일곱 번쯤 방문했다. 정신없이 지나간 일곱 번의 여행 뒤에 호주 생활로 다시 돌아와 적응할 때면 어김없이 “한국방문 후 우울증”(post-Korea depression)-많은 입양인들이 익히 알고 있는-이 뒤따랐다. 그 중 몇 번은 한국에 몇 달이나 머무르다 왔지만, 겉만 핥다 온 느낌이었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지만, 상자는 더욱 깊어지기만 했다. 한국에 대한 호기심이 마음 깊숙한 곳을 남몰래 괴롭혔다. 결국 나는 한국으로 이주하기로 결심했다. 표면적으로는 1년 간 한국어를 공부하러 가는 것일 뿐이었지만, 내심으로는 일이 잘 풀리면 아예 눌러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마침내 이주를 실행하기까지 8년이나 걸린 셈이다. 나는 이주에 대해 생각하면서 8년 동안 왜 하지 못했는지 핑계를 만들고 있었다. 왜일까? 한편으로는 내가 호주에서 행복해야 한다는 기대를 내면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입양돼서 더 훌륭한 삶을 부여받았어, 안 그래? 정상 등급에서 아주 조금 어긋난 다정한 가족, 좋은 교육, 광활한 호주 해변에서의 수많은 유쾌한 놀이들, 해외여행을 다닐 기회들 등등.
그런데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 안의 무언가가 상실돼서 끊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또한 한국으로의 이주가 호주에서 입양인으로서 내 인생이 실패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게 될 것 같아서, 나는 조금 부끄러웠다. 동화되고 적응하고 “행복”해지려는 필사적인 노력에도 어느 수준에서는 내가 실패했다는 사실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또 하나의 나는 내가 한국에서 사는 경험을 싫어하기를, “내 세계에서 그것을 뽑아내 버리기”를 바라고 있었다. 한국, 친가족, 입양 문제를 영원히 외면할 수 있기 위해. 완전한 마무리와 같은 어떤 것… 그 유혹적인 상상의 유니콘을 찾아내기 위해. 그것은 또한 주변의 사람들이 내게서 기대했던 것이기도 했다. 가서 끝내고, 돌아와 호주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나가기를.
‘나를 거부한 사회’와 마주치는 일상
처음에는 힘들었다. 당연히도 나는 세 살 배기의 언어 능력을 가진 현지인의 얼굴을 한 외국인이었다. 한국에서 나는 일상 대화를 할 때, 내가 말하기 시작하면 한국 사람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떠올랐다가 원래대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을 반복해야 했다. 그것은 호주에서 다른 인종의 해외입양인으로 살던 삶의 기묘한 반전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현지인인데도 완전하게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매일 네 시간 동안 나는 한 대학의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수업을 따라가려고 노력했다. 한국어 음절들은 너무 큰 사탕처럼 내 입속에서 서투르게 굴러다녔다. 다른 학생들은 대부분 중국, 베트남, 몽골에서 온 청소년들이거나 한국인과 결혼한 서양 사람이었다. 그 수업의 방식은 시험을 위한 암기학습과 반복과 주입이었다. 나는 그것이 전형적인 한국 방식이라고 들었다. 그것은 대개 전혀 즐길 수 없는 것이었고, 내 생애에서 가장 비효율적인 교육 경험이었다.
“당신은 한국의 교육 시스템을 알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건 한국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하게 도와줄 거예요.” 다른 입양인이 조언을 해주었다. 고마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난 한국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하고 싶지 않아—그저 이 빌어먹을 말을 배우고 싶을 뿐이야.
가끔씩, 지하철에서 군중 속을 헤치고 가거나 밀치는 사람들을 뚫고 갈 때 기묘한 분노가 내 안에 요동치는 것을 느끼곤 했다. 처음에는 그 분노가 어디서 오는 건지 궁금했다. ‘오, 맞아.’ 네 조국은 본래 너를 거부하고 수천 달러에 팔아 넘겼어. 그리고 이제 너는 매일 그 사회와 마주하고 있는 거야. 하지만 나는 그런 감정을 잘 알고 있는 입양인 친구들과 대화하며 위안을 얻었다. ‘보통의 한국 사람들은 네 입양과 상관없잖아.’ 우리는 스스로에게 상기시켰다. ‘넌 모든 한국 사람들에게 화를 내서는 안 돼.’
누가 물어보면 나는 거리낌 없이 한국 사람들에게 내가 해외로 입양됐다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편리함 때문이기도 했고(확실히 나의 한국인 같은 외모와 부족한 언어능력을 설명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었으니까), 또 한국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까 하는 호기심 때문이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침울한 표정으로 침묵에 빠지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친부모에 대해 묻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마침 화장품 가게 판매원이었던 경우-분명 공짜 샘플을 더 많이 챙겨 주었다고 장담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내가 한 말을 완전히 무시했는데, 이 마지막 경우가 제일 당황스럽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중년의 가게 주인, 퉁명스럽게: 한국 사람 같은데. 어디서 왔어요?
나는 내가 대체 뭘 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잦은 전화 때문에 귀찮았을 불쌍한 절친에게 몇 번씩이나 내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고 묻기도 했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나는 외국에 온 거나 다름없었고, 외로웠다. 밤에는 넷플릭스로 영어 드라마들을 보며 귀를 달래고 편의점에서 사온 초콜릿을 입힌 별 모양 과자를 먹으면서 한국에 맛있는 초콜릿이 없다는 것을 슬퍼했다.(따지지 마시길. 좋아지고 있긴 하지만 많이 부족한 건 확실한 사실이다.)
나는 조기 귀국해버릴까도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가끔 내 (양)엄마가 훌륭한 조언을 해주시는 경우가 있다. 엄마는 휴가를 갔다고 생각하라고 말씀하셨다. 곧 돌아올 테니 할 수 있는 일을 즐기라고. 그 말은 큰 도움이 되었고, 내 여정에 작은 전환점이 되었다.
기러기들의 회귀와 소속 찾기
한국에 사는 입양인들은 다 알다시피 좋은 한국의 날과 나쁜 한국의 날이 있다. 좋은 날에는 내가 용감하고! 독립적이라고 느꼈다! 적어도 한번은 한국어로 성공적인 대화를 나누었고, 이곳 사람처럼 버스 시스템을 이용했으며, 약국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것을 사는 데 성공했다. 오, 그리고 새로 산 옷이 맞춘 듯이 딱 잘 맞았다! 나쁜 한국의 날에는 길을 잃어버렸고, 아무도 내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했으며, 택시는 나를 그냥 지나쳐 갔다. 또 다시 내가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점차 부지불식간에 상황은 나아지고 있었다. 어느 시점이 되자 나는 물건을 사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데 필요한 절대 최소치의 한국어 실력에 도달했다.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있으면 서울의 대중들 속에서 현지인으로 통할 수 있었다. 이미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들의 바다에, 단지 또 하나의 한국인의 얼굴로 녹아드는 익명성의 경험은 놀라운 것이었다.
마침내 국외거주자들을 위해 임의로 주선되는 모임에 나갈 필요가 줄어들었다. 진짜 친구들을 사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부분 나와 같은 입양인이었다. 한 커플은 내가 수년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만난 사람들이었다. 몇몇은 한국에 거의 처음 와서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었지만, 몇몇은 한국에 10년 이상 산 사람들이라서 나 같은 초짜들에게 지식의 원천이 되어 주었다. 한두 사람 정도는 사회적으로 서툰 탓에 큰 입양인 모임에서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사랑스러운 사람들이었다. 크리스마스 때 가족모임에서 만나는 괴짜 삼촌처럼 말이다. 모든 사람이 공동체의 일원이었다.
우리는 모두 다른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각자의 입양 경험도 크게 달랐다. 하지만 우리는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기도 했다. 우리는 모두 단순히 한국을 방문만 하는(또는 전혀 방문한 적이 없는) 입양인들에 비해 한국에 대해 강한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한국의 친가족과 관계를 이어가고 있었으며, 일부는 입양인들의 권익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우리 모두는 한국의 입양 제도와 우리를 ‘유사 백인’으로 만든 서양식 양육의 실상을 보았고, 그 결점과 허위성들에 맞서 싸우려 한다는 점에서 비슷했다. 그것이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해주었는가?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무지가 축복이라는 말도 있다) 적어도 우리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나는 호주로 돌아왔을 때보다 서울에서 입양인들을 훨씬 더 가깝게 느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일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다. 입양, 인종, 정체성, 가족, 정신건강, 활동… 정말 많이 깊고 유익한 토론을 나누었고, 정말 많이 배를 잡고 같이 웃었다. 내가 속한 입양인 달리기 모임과 함께 한강변이나 청계천 가를 달리고 나서 우리는 큰 테이블들이 있는 BBQ나 쉑쉑버거에 들리곤 했다.
어느 날 밤늦게 BBQ에 함께 앉아 있다가 나는 깨달았다. 내가 깊은 일체감을 느끼고 있으며, 마음이 가벼워졌다는 사실을. 그 또한 분명 내게 새로운 감정이었다. 나보다 훨씬 훌륭한 작가이며 <버즈피드>(BuzzFeed)에 훨씬 더 훌륭한 글을 쓰고 있는 E. 알렉스 정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속해 있는 곳에 있다는 느낌이 어떤 건지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그것은 안도의 한숨과도 같다. 그것은 전기처럼 짜릿하다.”
공동체, 권익 찾기 활동, 소속감. 나는 이런 일들을 한 번도 진정으로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굶주린 사람처럼 그것을 빨아 들였다. 갈증을 다 채울 수 없었다. 또 그 과정에서 자기의식이라는 가면을 벗어버릴 만큼 편안함을 느꼈다. 나는 예전에는 그렇게 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나 자신이 되었다. 동시에 호주에서 보낸 인생의 다른 시기에는 상대적으로 소속감을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슬픔에 잠겼다. 그렇다면… 그 삶은 무엇이었을까? 반쪽짜리 인생? 연기? 단지 생존?
다시, 호주의 삶으로 돌아와 고향을 그리워하며
진짜 이야기가 막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호주로 돌아왔다. 돈이 떨어졌기 때문에 집에 와서 잠시 일을 해야 했고, 가족을 다시 만나야 한다고, 적어도 내 스스로에게는 그렇게 말했다. 한국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떠나야 한다고 느꼈다. 묘하게도 나는 네 살 때 억지로 이주할 때랑 비슷한 감정을 경험했다.
호주로 돌아온 이후와 적응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나는 한국과 그곳의 입양인 공동체 -나의 공동체-가 그리웠다. 호주에 있는 기존 이주민 모임에는 열심히 나가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호주 사회에 동화가 잘 된 전형적인 해외입양인이 아니었다. 나는 결코 잘 동화된 아시아계 호주인 2세가 될 수 없었다. 나의 특수한 문화적 정체성은 서투른 탈(脫)동화 과정을 겪고 있는 중이다. 만약 그런 게 있다면 말이다. 나는 언제나 호주를 사랑할 테지만, 호주 사회에서 내 자리를 찾으려고 발버둥치고 있다. 나는 내가 항상 그래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한국에 있는 동안 미묘한 인종차별들에서 벗어난 멋진 한 해를 보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제 이곳 호주에서 다시 일상적으로 그것들과 부딪쳐야 한다. 직장 동료들이 내 이름을 다른 유색인 젊은 여성과 헷갈리거나, 모르는 사람이 내가 영어를 유창하게 말하지 못할 거라고 지레짐작하고 말을 천천히 하거나 손짓발짓을 시작하는 것 정도는 약과다. 진짜 힘든 건 여기에는 이해해 줄 친구들- “그런 경험들이 나한테 계속 일어나게 놔둘 필요가 없다”고 다정하게 얘기해줄 친구들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백인들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아마도 나 역시 당신들에게 인종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포기할 필요가 있다.(미안하지만 정말로 미안하진 않다.)
돌아보니 내가 한국에서 더 행복한 이유를 완벽하게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상투적으로 들리겠지만, 내 안의 뭔가가 활짝 피어났다. 언어 장벽과 나쁜 공기에도 불구하고(매콤한 소스 국물에 흠뻑 빠뜨리지 않은 맛있는 파스타에 대한 커다란 갈망도 더할까?) 나는 한국에서 더 가뿐하고 더 온전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아무런 정당화도 하지 않은 채 그냥 돌아가서 그 소속감을 따를 수 있다면 어떨까?
한 현명한 친구는 나에게 충고했다. 납득은 잘 안 되겠지만 한국에서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갈피를 잡기 힘든 시간이 어느 정도 있을 수도 있다고. 나는 그녀의 충고를 위안으로 삼았다. 그 시간이 8년이나 걸린 것 같다. 하지만 이제 나는 명확히 알게 되었다.
착해지지 않아도 좋아.
-메리 올리버 <기러기>
(번역: 권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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