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귀환한 입양인이 말하는 ‘이주민의 권리’<해외입양인 여성들의 경험을 듣다> 내 인생과 이주, 인권※ 한국은 오랜 기간 입양을 통해 아동을 해외로 내보낸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해외입양 이슈는 여성인권과 아동권, 빈곤과 차별, 인종과 이주의 문제가 중첩되어 있습니다. <일다>는 각기 다른 사회에서 성장해 모국을 찾아온 해외입양인 여성들의 목소리를 통해, 이들의 경험과 한국 사회에 주는 메시지를 듣고자 합니다. 이 연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보도합니다. [편집자 주]
[필자 소개] 해외 입양을 통해 이주민이 된 여느 사람처럼, 크리스 박은 주류 미국 문화에 대해, 그리고 그 사회의 이주민에 대한 편견에 관해 특유의 관점을 갖고 있다. 시민의 권리도, 유창한 언어 능력도 없이 한국으로 다시 이주한 여느 사람처럼, 그녀 역시 한국의 이주민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뉴욕에서 시작한 일의 연장으로, 그녀는 미국에서 했던 것처럼 한국에서 벌어지는 이주민들의 투쟁들에 보조를 맞추며 그들의 인권을 위해 활동하고 조직하고 있다.
2000년대, 뉴욕의 이주민 공동체들과 함께
2005년, 미국 위스콘신 주의 공화당 하원의원이 “불법”(원문 그대로) 이주민들을 지원하는 것을 범죄화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이는 곧 대규모 시위들을 촉발시켰고, 미국 내 이주민 공동체들은 스스로의 존엄과 기본 인권을 선언하는 결정을 하기에 이르렀다. 우리 이주민들도, 법안에 명시된 노골적인 외국인 혐오와 인종주의에 맞서 하나로 단결해 싸웠다.
그해 나는 맨해튼에 있는 로어이스트사이드 다세대주택 박물관에 근무하고 있었다. 내가 하는 일은 방문객들에게 이 근방으로 이주해왔던 유태인, 이탈리아인, 아일랜드인, 독일인 가족들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었다.
이곳은 내가 일하던 2000년대 중반에는 활기찬 차이나타운이 되어 있었는데, 박물관은 인근 지역을 둘러보는 관광 프로그램들도 제공했다. 우리는 흔히 볼 수 있는 광동이나 베트남 가게들과 전혀 다른 복건성 사람들의 거리들을 추천했다. 도보 관광의 또 다른 명소는 중국-라틴 퓨전 술집이었다. 박물관 주변은 푸에르토리코 이주민들의 로이사이다와, 차이나타운과 쇠락해가는 리틀 이탈리아 지구가 접해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박물관 교육원들은 20세기 초반의 뉴욕 시가 세계에서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곳이었다고 설명했다. 가이드들 가운데 상당수도 콜롬비아, 중국, 쿠바, 자메이카에서 온 이주민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한국 출신이었다.
당시 나는 ‘한국계 미국인 청년 네트워크’(yKAN, young Korean American Network)라는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한국에서 유아 때 입양된 여성이 설립한 입양인 지원단체 Also-Known-As를 위해 자원활동을 했다. Also-Known-As의 활동은 중국, 한국, 과테말라, 스리랑카 등의 나라에서 온 아이들을 입양한 가족들을 포함한 반면, yKAN의 성인 회원들은 거의 한국인이었다. 두 단체는 자주 협력했다. yKAN의 회원들은 대개 가족과 함께 이주해왔거나 이주민들의 자녀였지만, 한국에서 입양된 사람들도 현실의 실제 비율만큼 참여하고 있었다.
yKAN은 내가 뉴욕대학의 풍물패에 들어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2003년 우리는 ‘설날’을 기념하기 위해 ‘설장구’를 연주하고 상모를 돌리는 북치기를 섭외했다. 2003년은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해이기도 했다. 이라크 침공 직전의 겨울, 워싱턴DC에서 대규모 반전 시위가 벌어졌다. 나는 내셔널몰로 내려가, 꽁꽁 얼어붙는 추위를 뚫고 풍물패가 행진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풍물패가 내는 시끄러운 쇳소리가 너무 좋았다.
얼마 뒤 나는 그 장구꾼이 연주하는 것을 보고, 연주하는 법을 어디서 배울 수 있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뉴욕대학으로 나를 데려갔고, 나는 그해 2월 풍물패에 가입했다. 장구꾼은 누리(NYURI)라는 그 동아리가 워싱턴 스퀘어 공원에서 매년 여는 야외 공연에 다시 나타났다. 그는 모듬북을 연주했다. 뒤풀이를 하면서 그가 한국에서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유학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듬 해 1월, 우리는 결혼했다.
블루칼라 계층, 다인종 지역에서 성장하다
나는 점차 yKAN과 Also-Known-As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나와 정치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느껴졌다. 한국계 미국인 공동체들은 굉장히 기독교 편향적이고, 매우 보수적이다. 나는 그보다 “급진적인” 평화 활동가들, 지역 운동단체들, 아메리칸 드림을 비판하는 좌편향적 한국인들과 함께 있는 편을 더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몇몇 사람들은 한국에서 자신들의 활동 문화를 그대로 가져왔고, yKAN과 Also-Known-As의 화이트칼라 전문직 종사자들이 숭배하고 구현하는 자본주의를 비판했다.
그 역시 적극적인 Also-Known-As 회원들 대다수와 나를 구분시키는 요인이었다. 그들의 절대 다수는 중상층 가정에 입양되었다. 나를 입양한 사람들은 공장노동자와 마트 점원이었고, 둘 다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학교 아이들의 약 75퍼센트가 연방 학교급식 정책의 혜택을 받는 가난한 도시에서 살았다.
이후 내가 만난 대다수의 한국 입양인과 달리(물론 뉴욕 사람들을 제외하고), 내가 살던 도시는 백인이 다수가 아니었다. 나는 백인 교외 지역에서 성장한 그들의 경험과 전혀 무관했다. 이웃들은 백인이었지만, 영어는 프랑스 말만큼이나 적게 쓰였다. 제일 친한 친구들의 집으로 놀러 갈 때면 폴란드어, 캐나다 프랑스어, 알바니아어, 이탈리아어, 포르투갈어가 들렸다. 우리 집에서 많이 걸려야 십분 정도 거리였는데 그랬다.
도시의 다른 곳에서는 푸에르토리코 스페인어와 레바논어로 미사를 진행하는 성당들이 있었고, 꽤 큰 규모의 자메이카 공동체도 있었다. 이 모든 이주민들은 코네티컷 주의 그 도시에 ‘놋쇠 도시’라는 별명을 선사한 황동공장들에 일하러 온 사람들이었다. 학교 아이들은 여름 방학 동안 부모의 나라에 가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지내다가 9월에 개학을 하면 돌아왔다. 그들의 정체성은 카리브 해와 유럽에 굳게 뿌리를 두고 있었다.
방학 때가 되어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던 학생 몇은 베트남 출신이었다. 나는 학교 식당에서 프랑스빵 피자를 먹으려고 줄서서 기다리다 그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바티칸 2차 공의회 이후에도 오랫동안 가톨릭 도시에서 금요일에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규칙은 여전히 지켜지고 있었다.) 우리 학교에 아시아 학생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 소수의 베트남 아이들과 필리핀 아이들 약간 명, 그리고 내가 알기로는 한국 아이들 네 명 뿐이었다. 내가 가끔 어울리던 친구의 한국인 엄마는 나를 만났을 때 정말로 반가워했다. 하지만 보통은 학교 식당에서 베트남 여자아이들과 짧게 수다를 떨 뿐이었다. 그 중 한 아이는 공장에서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아는 사람이 내게 그 공장에서 영어를 사용하지 않는 노동자 여러 명과 같이 일하는 자리를 하나 얻어 주었다. 그 일을 하며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나는 고등학교에서 4년 동안 포르투갈어를 배웠다) 실력이 빠르게 늘었다. 고등학교에서는 많은 경우 인종 갈등이 백인, 흑인, 라틴계 학생들이 알아서 끼리끼리 노는 것으로 드러났다면, 공장에서는 라인에서 나란히 일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불행하게도 나는 거기서 베트남 사람들을 찾지 못했다. 베트남 노동자들은 그 아슬아슬한 노동문화에 융합되지 않았다.
나는 양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몇 년 동안 워싱턴DC에서 대학을 다녔다. 양어머니는 내가 학업을 끝마칠 때까지 재정 지원을 약속하는 서류를 작성해주지 않았다. 그 시기에 나는 다른 언어 사용자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영어교사 양성과정(TESOL)의 학사/석사 과정에 대해 알게 되었다. 내가 재학 중에 수업을 다섯 개 듣고, 졸업 후에 몇 개만 더 들으면 석사 학위를 딸 수 있다는 것을. 그 사이에 TESOL 자격증을 취득하게 될 것이었다.
2005년에 내가 일했던 다세대주택 박물관은 영어 학습자를 위해, 역사적으로 이주민 거주 지역이었던 그곳에서 이주민의 삶에 대해 토론하는 프로그램을 시범 운영했다. 나는 영어 교육법을 훈련받고, 강한 이주민 정체성을 갖고 있으며, 여러 문자들을 읽을 수 있는데도(나는 1990년대에는 좋은 선택으로 보였던 동유럽 연구를 전공했고, 그래서 워싱턴DC에 있을 때 러시아어 수업을 들었다. 또 유태인 문화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헤브루 문자를 읽는 법도 배워두었다.) 그 프로그램의 진행자로 적합하다고 인정받지 못했다.
이 문제를 같이 일하는 동료에게 토로하자, 그녀는 이민국에서 사제들에게 억양을 순화시키는 법을 가르치는 수업이 브루클린과 퀸즈 교구에서 열린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직 명목상 가톨릭 신자였던 나는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아시아 출신의 사제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교사가 되었다. 나는 다른 동료가 알려준 퀸즈의 포레스트 힐스 커뮤니티 하우스의 일자리에 지원하는 이력서에 이 경력을 써먹었다.
반(反)이민 정책에 맞서 이민자들을 위해 일한 시간
2006년에 나는 뉴욕 퀸즈 잭슨하이츠에서 이민자에게 영어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다. 면접 때 나는 면접관들에게 내 네이티브 영어 구사능력이 이 나라를 휩쓸고 있는 반(反)이민 정서와 싸우는데 쓰고 싶은 특권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내가 채용되었으므로, 그들이 내 말을 마음에 들어 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시간제 교사 일을 시작했는데, 멕시코에서 온 이상한 학생을 하나 만났다. 그는 어느 날 수년간의 시도 끝에 마침내 미국 영주권을 얻었다고 매우 기뻐하며 수업에 들어왔다. 그러더니만 멕시코로 돌아가 버렸다.
나는 이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학생의 절반 정도가 ‘미등록 이주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미국의 대다수 미등록 이주민들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비자 기한을 넘어서 체류하고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여러 나라에서 육로를 통해 미국으로 들어온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다. (기억나는 한 가지 예외는 무단으로 배에서 내린 미얀마 상선 선원이었다.)
잭슨하이츠는 언어적으로나 일반적으로나 세계에서 다양성이 가장 큰 지역으로, 약 180개의 다른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 또 커다란 게이 라틴 공동체가 네팔인, 방글라데시인, 파키스탄인, 시크교도들과 그 일대를 공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잭슨하이츠에서 나는 단지 수 만 명의 이주민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학생들과 자주 “권리 알기”(Know Your Rights) 워크숍을 열면서 나는 미국 국토안보부와 이민세관집행국의 규정과 관행에 대해 배웠다. 우리의 상근 법무사는 다양한 비자 및 비자면제 신청에 관련한 문제들에 대답을 해주었다. 심지어 나처럼 한국 출신 입양인인 내 친구가 평화봉사단에서 일하다가 만난 약혼자를 필리핀에서 미국으로 데려오는 일을 도와주기도 했다.
우리는 교사들과 학생들이 국토안보부와 미국이민세관집행국의 시큐어 커뮤니티 프로그램(SECURE Communities program, 범법 이민자를 색출하고 추방하는 프로그램)에 반대하는 행진과 같은 정치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실천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시큐어 커뮤니티 프로그램은 뉴욕 경찰에 체포된 모든 사람들의 불법 체류 여부를 공개하도록 했다. 많은 내 학생들이 그러한 정책에 반대하는 실천단에 참여했다. 나는 교사 연락담당이 되었다. 우리는 공정한 주택 공급과 공공병원에서의 언어 접근권, 이민자를 위한 영어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필요한 주와 시의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싸웠다.
이 무렵, 드림 법안(DREAM Act, 16세 전에 미국에 입국해서 법 시행 전 최소 5년간 거주하며 대학에 다니거나 군에 입대하거나 직장이 있는 30세 미만의, 범죄 기록이 없는 미등록 이주민에게 영주권 신청 자격을 주는 내용)과 DACA(불법체류 청소년 추방 유예, 드림법안과 동일한 대상자들에 대해 출입국 강제 집행을 연기하는 것)가 정치 뉴스로 떠올랐다. 나는 한국인들이 ‘추방 유예’를 받으려는 신청자 중 10위 안에 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해외입양인들 중에서 미국으로 입양되었다가 추방되거나 한국에서 살도록 강제된 몇 사람들의 이야기도 뉴스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미국으로 입양되었다가 여러 번 체포되었던 어느 한국인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러셀 그린이라는 이름의 그 사람은 여전히 한국말처럼 영어를 구절마다 끊어서 말했다. 십대 초에야 한국을 떠났기 때문에 원어민처럼 영어를 익히지 못한 것이다. 그는 미국에서 추방당하기 직전이었다. 입양인으로서 일반적으로는 기한이 없는 합법적인 영주권자 지위를 갖고 있었지만, 클린턴 시대인 1996년에 제정된 가혹한 ‘불법이민개혁 및 이민자책임법’ 때문에 추방이 가능해졌던 것이다. (이전에는 영주권자로 5년 이상 사는 사람은 추방 사유가 있다 하더라도 5년형 이상 중범죄를 저지른 경우가 아니면 추방 면제를 신청할 수 있었다. 이 법이 시행되면서, 미국에서 오래 산 영주권자라 해도 경찰에 체포된 적이 있으면 추방할 수 있게 됐다. -역주)
나는 전문가로서 청문회에서 증언하는 사람들에게 이민제도의 역사와 퀸즈의 커뮤니티 하우스 및 가톨릭 이민국에서 가르친 수천 명의 학생들에게 들었던 현행 관행들에 대한 배경지식을 제공했다. 입양인 러셀에 대한 판결도 추방 유예로 잘 마무리되었다. 다시 말해 그 결과는 그가 추방 명령을 받았지만, UN 고문방지 협약에 입각할 때 한국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비인도적이라는 변호사의 주장 덕분에 그것을 보류했다는 말이다.
행정학 석사 과정을 마칠 즈음, 내 상사는 나로 하여금 사람들을 미국에 귀화시키는 지역운동 단체들(CBOs)에 자금을 제공하는 계획을 추진하도록 했다. 나는 고객들이 자신들을 위험하게 만들 법적 역사가 없는 한, 귀화 절차를 하나하나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나는 성인 영어교육 프로그램의 부관리자로 승진했고, 이민관리국이 공인한 법적 대리인이 되기 위한 훈련을 받으러 파견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 대신 한국에 가기로 결심했다.
1980년대부터 계속되어 오다가 1996년 ‘불법이민개혁 및 이민자책임법’으로 최고조에 달한 이주민들에 대한 전쟁(이주민에 대한 감시와 감사, 이민법이나 조례를 무기로 이주민을 범죄자로 만들기, 이주민 대상 서비스 예산 삭감 등)은 우리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프로그램의 기금은 3분의 2나 줄어들었다. 내가 부관리자로서 해야 하는 첫 번째 업무들 중 하나는 강사진의 상당수를 해고하는 것이었다. 행정 직업 일부도 해고되었다. 나 역시 예산 부족의 책임을 일부 져야만 했다. 떠나야할 때가 분명했다.
내가 재외 한국인, 즉 ‘동포’로서 F4 비자를 받을 자격이 있으며, 풍부한 영어교육 산업 기관들 덕분에 이주하기 전에 일자리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결국 나는 대전의 한 대학에 채용되었다. 나는 몇 달 뒤 석사를 따고 나서 대전에 가기로 결정했고, 인사 담당자에게 내가 그 자리를 맡기에 충분한 교육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설득했다. 한국에 가면 나는 곧 내가 이곳에서 가르치던 학생들과 같은 처지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터였다. 살게 될 나라에서 주요하게 사용되는 언어 능력을 가지지 못하고, 자신에게 보장된 권리와 법률을 모른 채 살고 있는 실질적으로 문맹인 성인으로 말이다.
한국에서 ‘귀환한 이주민’으로 살아가기
한국 정부는 우리를 이산(離散, diaspora)에서 돌아온 한국인으로서 ‘민족’의 일부로 인정했지만, 이 정체성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논란이 되었다. 먼저, 해외입양인들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기 어려워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 다음, 우리는 대개 한국어 구사 능력이 매우 부족하거나 전혀 없는 상태로, 한국 문화에 대해서도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로 도착했기 때문에, 이 반도에서 다수자로서 살아온 사람들은 우리를 그냥 외국인으로 간주한다. 한국인 이민 1.5세대조차도 우리를 교포 비슷하거나 완전히 백인화 된 사람들로 생각한다.
내 경험이 전형적이지는 않다. 한국계 미국인 공동체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고 다른 이주민들 사이에서 살았기 때문에, 나는 한국에 꽤나 쉽게 적응했다. 인천공항에서 비행기에서 내릴 때 풍물패 누리(NYURI) 시절에 사귄 가까운 친구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빠르게, 별로 힘들이지 않고 뉴욕 시절의 우정을 회복했다. 나는 또 한국에서 살기 위해 돌아간 입양인도 많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대전이라는 지역에 익숙해지는 데는 오래 걸렸다.
15년 만에 처음으로, 나는 다시 주로 백인들 사이에서 사회생활을 하게 되었다. 원어민 영어강사들(NETs)과 영어과 행정직원 대부분은 한국여성과 결혼한 북미 출신 백인남성이었다. 그들의 행동과 태도는 그들의 특권이 ‘허위’라는 것을 드러냈다. 그들의 극히 명백한 백인우월주의는 내가 다시 익숙해져야 하는 것이었다. 뉴욕에서는 이주민들 공동체라는 두터운 안전막 안에서 살았기 때문에, 완전한 소수자로서의 방어모드를 풀어놓고 살 수 있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한국인으로서 소수자가 되는 역설이라니!
나는 직장 동료들이 폭스뉴스에 출연하는 미국 권위자들의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을 들었고, 국외거주(ex-pat, 원문 그대로) 네티즌들의 이런저런 무지한 댓글들을 읽었다. 한국은 사회적으로 보수적이라서 더 좋다든가, 북미보다 세금이 정당하게 낮다든가, 정부가 사람들의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는다든가 하는. 나는 노스다코타 출신의 한 직장동료가 한국은 대통령이 여자이기 때문에 성차별주의자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을 듣고 의자에서 넘어질 뻔했다.
“국외거주민”(expat)이라는 용어는 참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나는 그 말이 부유한 나라 출신 이주민들을 개발도상국에서 온 이주민들과 구분하기 위해 사용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양쪽 주민들 모두 자기 나라에서 얻지 못한 경제적 기회를 찾아 왔다는 점은 같은 데도 말이다. 돌아온 이주민들은 또 어떠한가? 미국에서 나는 분명 이주민이었다. 대한민국에서 나는 이 나라에서 살고 일하기 위해 비자가 필요했다. 하지만 나는 인천(아마도)에서 태어났고, 외국인이 아니었다. 이제는 “내 나라 밖에” 있지 않기 때문에, 확실히 국외거주민도 아니었다. 나는 이 나라 정부나 국민들에게 ‘외국인’ 낙인을 찍히지 않고, 태어난 나라에서 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전에 사는 동안 ‘F4 비자(재외동포에게 발급하는 비자)를 받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대한민국 출입국관리사무소는 미국 시민에게 미국 시민권 증명서(naturalization certificate)를 요구했다. 미국에서는 여권을 발급받고 나면 그 증명서가 전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인구 5만6천명 이하인) 사모아인이 미국 시민(citizens)은 아니지만 미국 여권을 소지하는 미국 국민(nationals)이라는 이유로, 미국 여권을 미국 시민권의 증거로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교수 비자(E-1 비자)로, 본질적으로 내가 있는 대학의 소유물로서 1년간 근무했다. 미국 출입국 자격(US immigration status)을 증명해 줄 미국 시민권 증명서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대신할 증명서를 달라고 신청했지만, 미국 이민국(US Customs and Immigration Service, USCIS)의 관료주의와 마주치게 되었다. 내 지역 의원이 개입하고, 5백달러를 들이고도 대체 증명서를 받는데 2년이나 걸렸다. 나는 양쪽 이민국 사이에 끼여, 양쪽 모두에서 이주민으로 분류되었다.
내가 미국 이민국과 씨름하고 있는 동안, 입양된 나라— 주로 미국—의 시민권이 없는 입양인들이 다시 뉴스에 등장했다. 미국은 아이들을 해외로 입양 보낸 한국 등의 국가들로 입양인을 다시 추방하고 있었다. 이는 1996년의 가혹한 불법이민개혁 및 이민자책임법(IIRIRA)의 일환이었는데, 이 법은 가벼운 비행(非行)을 추방이 가능한 범죄로 만들어 입양인이 걸려들게 만들었다. 때때로 이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브라질의 후앙 허버트는 미국 이민국에 의해 강제 추방된 뒤 살해되었다. 미국 이주민 정책의 문제점들이 빚은 여러 가지 이유들 때문에 억지로 대한민국에서 살게 된 입양인은 법적으로는 한국인으로 대우받았지만, 사회적으로는 외국인으로 취급되었다.
‘한국인’이라는 관념은 확장되어야 한다
한국은 수 세기 동안 외국인에 적대적인 나라로 알려져 있다. 나는 그 이유를 이해한다. 외국 침략자들과 식민주의자들은 역사적으로 한국에 나쁜 소식이었으니까. 대한민국은 순혈민족이라는 이승만의 수상쩍은 주장 위에 건설되었다. 그것은 6.25 전쟁 이후에 해외입양이 시작된 이유로 자주 되풀이되는 이야기이다. —혼혈 한국인들과 그 어머니들은 너무나 심각하게 배척당했기 때문에, 입양기관 근무자들이 해외로 입양 보내 그들을 “구제”해주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라는 관점은 시대에 뒤떨어진 관념이다. “한국인”이라는 관념을 확장하고 “외국인”의 개념 역시 완전히 재정의할 것이 요구된다. 혼혈 한국인들, 이주 한국인들, 두 한국 출신의 한국인들은 모두 한국인이다. 한국인의 피가 흐르지 않는 부모를 가진 한국 태생의 사람들은 또 어떤가? 문화적으로 통합되지만 생물학적으로는 통합되지 않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게다가 “전형적인” 한국인이 아닌 사람들 사이에 위계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백인 부모를 가진 혼혈 한국인은 흑인 부모를 가진 한국인과 왜 그렇게 다르게 대접받는 것인가? 인종적인 혼혈은 아니지만, 한국인과 동남아시아인 사이에 태어난 “다문화” 아이들은 또 어떤가. 왜 사회는 부모가 부유한 선진국 출신일 때는 “국제결혼 가정”(international Family)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부모가 이 사회에서 후진국이라고 간주되는 나라 출신일 때는 “다문화 가정”(Multicultural Family)이라는 말을 사용하는가?
대전에 살 때, 우리 대학에 ‘다문화 가족’을 위해 한국어를 가르치는 강좌가 있었다. 학생들 대다수는 필리핀이나 중국 출신이었다. 베트남인이나 원어민 강사들도 몇 사람 있었다. 중국에서 한국인 남편을 만난 노르웨이 백인여성도 한 사람 있었다.(나는 지금은 헤어진 전 남편과의 결혼을 빌미로 그 수업에 등록했다.) 수업은 훨씬 남성우월적이긴 하지만, 내가 뉴욕에서 가르쳤던 많은 수업들을 떠올리게 했다. 우리는 남편의 부모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단어들과, 청소와 장보기처럼 가정주부에게 특히 유용하다고 생각되는 어휘들을 배웠다. 학생들 대다수는 아주 젊었고 빠르게 한국어를 익혔다.
나는 같은 반의 필리핀 친구들에게 특히 친근감을 느꼈다. 그들이 나보다 훨씬 빨리 배웠고, 내 나이의 반밖에 안 됐지만 말이다. 그들은 내 한국인 학생들 누구보다도 영어를 더 잘했다. 우리는 서로 매우 다른 삶을 살았지만, 꽤 친해지게 되었다. 나는 진정으로 이주민 공동체의 일부라고 느꼈다. 가끔 뉴욕에 있을 때처럼, 우리는 지방 경찰서로부터 “권리 알기” 설명을 들었다. 경찰관은 우리에게 가정폭력을 당할 경우 어떻게 도움을 얻을 지를 설명해주었고, 우리는 한국에서 일상생활에 관한 실질적인 문제들에 조언을 얻었다.
나는 외국인이 아니고, 확실히 국외거주민을 자칭하지 않았지만, 강하게 이주민으로 스스로를 정체화했고, 이주민 서비스들의 수용자가 되었다. 영어를 사용하는 인터넷 커뮤니티들은 세입자, 노동자, 비(非)시민으로서 이 사회에서 우리가 가진 권리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조언을 요청하고 있다. 나는 내가 매일 시끄러운 파티를 연다고 주장하는 집주인과 이웃들로부터 직접 ‘외국인’에 대한 차별을 목격하고 있다. 한국어가 원어민 수준이 아닌 사람들을 “도우려는” 시혜적이고 오도된 시도들은 무례하고 잘난 척하는 짓이다. 심지어 공공 자전거 대여 서비스조차 영어 서비스를 사용하는 남성 또는 여성은 당연히 1)여행자거나 2)방문객이 틀림없다고 가정한다. 코레일과 은행의 영어 웹사이트들 역시 미국에서 본 영어 사이트들과 스페인어 사이트들처럼 똑같은 내용을 서비스하는 게 아니라, 한국어 서비스에 비해 많은 것이 생략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영어 원어민이라는 사실은 행운이자 특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일자리를 구할 때는 한국인처럼 보인다고 원어민으로 대접 받지 못했지만. 아무리 영어가 유창해도 남아시아나 필리핀 출신의 아시아인들은 원어민으로 간주되지 못한다.) 만약에 내 모국어가 벵골어나 베트남어였다면, 내 선택지는 훨씬 적었을 것이다.
‘외국인 혐오, 백인에겐 특혜’ 그 결과는?
충청남도에서 2년을 보낸 후, 나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채로 서울에 올라오는 모험을 감행했다. 내 친구들과 공동체는 서울에 있었다. 대전 사람들은 굉장히 친절하고 관대했지만, 나는 고립감을 느꼈다. 서울에 와서 마침내 해외입양 문제에 관련한 권익 찾기 및 실천 활동을 시작했다. 한국에서 더 큰 사회정의 운동의 일부로서 이주노동자, 비혼모, 퀴어 활동가등 다른 단체들과 연대활동을 펴는 단체의 공동 설립자가 되었다.
한국은 매우 외국인혐오적이고 인종차별적인 사회라고들 한다. 동시에, 여전히 외국인들을 차별하면서도 사회적으로 용인할 수 있는 백인들에 대해서는 과분한 특권을 베풀고 있다. 백인이 아닌 서양인들은 조롱거리로 만들면서, 팝 문화에 대한 그들의 기여는 ‘한류’ 장사로 도용한다. 백인이 아닌 서양인들은 여전히 극히 오만하고 무례한 고정관념들과 싸워야 한다. 흑인 미국인들은 미국에서 흑인을 겨냥한 교통단속(DWB) 때문에 차를 세워야 하거나, “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을 불러일으킨 것과 같은 신체적인 공격을 당하는 것에 비하면 그 정도는 양반이라고 내게 말하지만, 한국인들이 흑인종이나 갈색인종 서양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적인 관념을 믿고 있는 경우는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비일비재하다.
아프리카, 남아시아, 동남아시아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은 작업장을 옮길 권리와 같은 훨씬 기본적인 권리를 얻기 위해 싸워야만 한다. 서양과 비(非)서양 노동자들, 블루컬러와 “전문직 종사자들” 모두 한국인들이 저지르고 있는 임금 갈취와 직장에서의 불법적인 관행들에 직면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의 법적 권리가 미흡한 점, 한국 사회의 인종차별과 외국인 혐오, 그리고 한국어 능력이 부족한 점 등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한다. 나처럼 선망 받는 대학의 일자리를 가진 사람도 “외국인” 교수였기 때문에 승진은 꿈도 꿀 수 없다. 이런 종류의 차별은 대다수의 서구 국가들에서 불법이다. 또한 할당제를 통해 법제도적으로 사회적 차별을 시정하려 시도하고 있는 많은 개발도상국에서 (항상 효과적이지는 않지만) 적극적으로 억제되고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들 ‘재외동포’는 F4 비자를 발급받는다. 그러나 이 비자는 우리가 일할 수 있는 직종을 제한한다. 우리에게는 3D 직종, 즉 위험하고 더럽고 천한 일들이 허용되지 않는다. 비영어권 국가에서 온 일부 입양인은 이런 제한 때문에 한국에서 살아가는 ‘타고난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들이고 있다.
미국인, 캐나다인, 호주인은 영어를 가르쳐서 충분한 돈을 벌 수 있다. 하지만 영어가 유창해도 비원어민 교사들은 언어를 가르칠 자격이 없다는 대한민국의 우스꽝스러운 통념에 더해, 대학 학위에 대한 타당한 (그러나 부적절한) 요구로 말미암아, 스칸디나비아와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이탈리아어 사용 국가들의 입양인은 다른 직업을 찾아야 한다. 대학 학위가 없는 일부 입양인은 부엌, 공장, 농장 및 기타 보잘 것 없는 일자리에서 ‘등록되지 않은 일’을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많은 사람들이 학위를 딸 특권과 기회를 주지 않는 환경으로 입양되는 바람에 인생을 망가뜨렸다. 그 이유는 이러 미숙련 직종들은 해외에서 살면서 특권을 누렸다고 가정되는 “외국인들”보다 한국 시민들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한국인들은 이주해서 돈을 송금하거나, 자신들의 노동을 팔아서 한강의 기적을 창조했다. 나는 적어도 우리가 노동의 스펙트럼을 넘어 ‘완전고용’의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난민 반대하는 한국인의 현주소…그럼에도 변화를 믿으며
지금 대한민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난민들을 받는 것 뿐 아니라, 예멘 난민들의 피난처가 될 가능성에 직면하고 있다. 이러한 사태에 대한 일부 한국인들의 반응은 외국인 혐오와 인종차별로 느껴질 뿐이다. 미국이 이주민 아이들을 가족에게서 떼어내고 있는(그리고 아마도 그들을 다시 입양산업 시스템 속으로 보내고 있는) 지금, 이러한 한국 사회의 모습은 트럼프의 정책이 한국으로까지 확대된 것처럼 보이게 한다.
나는 서울역 근처에서 살면서, 우익 한국인 집단들의 집회를 보고 듣고 있다. 그들은 매주 성조기를 흔들며 박정희와 도널드 트럼프의 사진을 전시한다. 많은 한국인들이 전쟁과 그것이 초래한 빈곤과 독재정권의 박해로 인해 난민으로서 경험을 직접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으로부터 구제되기를 바라는 5백 명의 사람들에 반대하며 수십만 명이 이들을 추방하라는 인터넷 청원에 서명하고 있다. 미국이 지금까지 ‘정치적 망명’을 허용한 한국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누구를 난민으로 규정할 것인가의 문제는 언제나 정치적 문제이다. 난민이나 정치적 망명자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가 도망쳐온 상황이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하거나 비참하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사실 그것은 타국을 가해자나 그 나라에서 자행되는 학대를 통제할 능력이 없다고 낙인찍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이 반대 청원이 정말 그 5백 명의 난민을 지원하고 지지하는 것이 불가능한 사회임을 보여주는 건 아니라고 단언한다.
한국은 노동력 부족과 저출생 문제를 가지고 있다. 한국인들은 상점과 공장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지만, 농업 분야에서는 한국인들이 그 일을 하지 않으려 들기 때문에 노동자를 구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국을 ‘헬조선’이라고 부르는, 학력은 높지만 잘 훈련되지 못한 대학 졸업자들은 도시의 육체노동 직종조차 기피한다. 일부 사람들은 심지어 이주민들이 그런 일자리들에 간다는 사실을 부정한 채, 자신들이 명망 있거나 충분히 전문적인 지위를 얻지 못한 책임을 외국인들에게 전가하고 싶어 한다.
F4 비자를 가지고도 내 동료 입양인들은 육체노동을 하는 직종에 취업을 법적으로 허가받지 못했다. 내 동지들 몇 사람은 나처럼 대학 학위를 얻기 힘든 환경으로 입양되었다. 나는 결국 학사 학위를 얻긴 했지만, 학사 과정을 마치느라고 30대 후반까지 귀국을 미루어야 했다. 학위를 마치기 전에 한국에 왔다면 내 모든 업무 경험은 적절한 것으로 인정받지 못했을 것이며, 나는 자격증과 증명서가 지나치게 넘쳐나는 이 나라에서 겨우 고등학교 졸업장만 하나 달랑 갖고 있게 되었을 것이다.
문서들이란, 내가 어디 있던지 지위를 보증해 줄 수 있는 삶의 사실이다. 이민 서류, 시민권 서류, 자격증은 전 세계에서 우리의 권리를 지시하고 자격을 규정한다. 끊임없는 부패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점점 더 많은 서류 작업으로 부패와 싸우려 한다. 우리가 법적으로 고아가 되었을 때, 해외입양을 위해 법이 요구하는 대로 가족 기록 서류, 즉 고아용 ‘호적’을 발급 받았다. 이것은 입양기관을 우리의 보호자이자 최근친자로 만든다. 우리가 한국에 돌아왔을 때, (우리 대부분은 진짜 고아가 아니기 때문에) 실제 가정을 찾아 낸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입양기관과 그런 관계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이곳에서 죽으면, 우리가 남긴 모든 것을 그들이 책임지게 된다. 결국 죽어서야 한국은 온전히 우리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나는 여생을 한국에서 살기를 희망한다. 이 나라에서 외국인에 대한 차별의 지독함은 미국이 도달한 수준에까지 미치지는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이 이주 입양인을 보호하는 더 훌륭한 법을 제정할 수 있고, 정부는 대중의 인식을 바꿀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나는 한국인으로서, 한국에 사는 이주민으로서, 이 문제에 관해 활동을 지속하기 위해 계속 최선을 다할 것이다. (번역: 권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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