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프가니스탄 ‘여성’ 국회의원 후보였다

<우리 자신의 언어로-독일 난민 여성들의 말하기>

하리타 | 기사입력 2018/09/21 [09:47]

나는 아프가니스탄 ‘여성’ 국회의원 후보였다

<우리 자신의 언어로-독일 난민 여성들의 말하기>

하리타 | 입력 : 2018/09/21 [09:47]

독일에서 살고 있는 난민여성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베를린의 정치그룹 국제여성공간(IWSPACE, International Women Space)이 제작한 <우리 자신의 언어로–독일 난민 여성들의 이야기>에 수록된 내용으로, 이주여성과 난민여성으로 구성된 팀이 다른 난민여성들을 인터뷰하여 1인칭 에세이로 재구성한 것이며 하리타님이 번역, 해제를 달아 소개합니다. “I was once a candidate for a seat in the Afghan parliament”라는 제목의 글 속 화자는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여성으로, 이름은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보도합니다. [편집자 주]

 

당신이 모든 걸 잃고 이국땅에 온 처지라면…

 

고국에서와 같은 집을 여기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도 나는 조용히 쉴 수 있는 집을 원했다. 마땅한 내 공간이 없으면 집에서조차 편안할 수 없으니까. 사회복지사무소에 여러 번 찾아갔다. 그런데 그 때마다 노인들이나 심리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들에게 우선권이 주어지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은 내가 환자가 아니라고 단정 지었다. 아직 젊고 구체적인 증상이 없다면서.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럴까? 심리질환이라는 것이 어떻게 생기나? 물론 강도 높은 스트레스가 원인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처한 상황이 어떻든 간에) 의사가 써준 진단서 한 장이면 다 된다. 그러면 아파트를 더 빨리 배정받을 수 있다.

 

사실 나는 반문하고 싶다. 난민 숙소에 사는 이라면 누구나 심리적인 문제를 갖게 되지 않겠냐고. 난민들은 자국에서 어려움을 겪었고, 현재는 가족, 집, 직장에서 모두 멀리 떨어져 와 있다. 결국 이곳 난민 캠프의 열악한 환경에 이르고 만 것이다. 이런 힘든 상황이 심리적인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밤중에 나는 베개가 흠뻑 젖도록 울곤 한다. 독일에 온 이래, 뭐랄까… 스트레스가 너무 많아서 나는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두통에 시달린다. 밤에 너무 울다가 호흡이 곤란한 지경이 되면, 나는 창문을 열고 숨을 고른다.

 

여기 온 첫해에 나는 형광등도 TV소리도 견딜 수가 없었다. 주변 사람들을 만나거나 공원, 밖에 나가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은 익숙해진 것 같지만 그 때는 그 무엇도 견디기 어려웠다. 이러한 생활로 인해 정신적인 문제가 생길 법 하지 않은가? 난민 신청자들이 다들 겪는 문제들이다.

 

▶ 난민 숙소에 온 첫해, 나는 스트레스로 인해 형광등 불빛도 TV 소리도 견딜 수 없었다. ⓒ일다(일러스트: 두나)

 

아프가니스탄에서 나는 여성운동가이자 정치활동가였다. 괜찮은 직장에 월급도 잘 받는, 괜찮은 인생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하는 일 때문에 곤경에 처했고, 이 모든 것을 뒤로한 채 맨 몸으로 독일로 도망쳐 와야 했다. 가진 것을 모두 잃었다. 처음부터 모든 걸 다시 시작해야 했다 – 갓 태어난 아기처럼. 언어를 새로 배워야 했고, 직장과 아파트를 새로 구해야했다. 여러분이 내 처지라고 곰곰이 한번 생각해보시길, 나는 정말이지 모든 걸 잃었다. 지금은 이 캠프에서 살아야 한다. 가족과 고국, 내 것이었던 모든 것에서 멀리 떨어져있다.

 

누군가가 이렇게 고민하고 걱정하고 울며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그건 심리적인 문제가 맞다. 어떤 병명으로 진단만 받는다면 2주쯤 병원 신세를 지며 약 처방도 받을 것이다. 사람들이 나 같은 이를 진정으로 돕고자 한다면 왜 문제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려 들지 않는 것일까? 나처럼 홀로 외로운 이들이 많다. 내 남편은 아프가니스탄에 남아있고 나는 여기서 여러 가지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16개월째 망명신청 면담을 기다리는 중이다. 나는 조국을 떠나도록 등 떠밀렸다. 내겐 다른 선택이 없었다. 누군가에게 괜찮은 벌이와 생활이 있다면 그 사람이 자진해서 그걸 다 포기하고 난민 숙소에서 이렇게 고생을 자처할 리가 없다.

 

아프간의 여성폭력, ‘살인에 대한 피해보상’으로 딸을 줘

 

가족들이 아프간에 아직 살고 있기 때문에 거기서 내 문제가 뭐였는지 다 밝힐 수가 없다.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 것이다. 아프간 탁하르(Takhar)에서 나는 여성 문제에 관여하는 한 센터에서 일했다. 말하자면 여성인권 활동가였다. 거기서 문제가 생겼다. 몇 년 간 활동하다가 아프가니스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적도 있다. 그 외에도 우리 아버지가 탁하르 지역에서 존경받는 좀 알려진 인물이어서 이것들을 기반으로 나는 여러 기관과 두루 일하며 여성 인권을 위해 싸웠다.

 

아프가니스탄의 여성폭력 문제에 대해 말하자면, 그 원인으로 크게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다. 먼저 빈곤이 문제다. 다음으로 안전과 교육의 부재다. 다른 요인들도 많이 있지만, 우선 이 세 가지가 여성에 대한 폭력이 성행하는 환경을 만드는데 가장 주된 요인들이다.

 

예를 들어, 빈곤이라는 심각한 사회 문제와 관련지어 강간, 강제결혼, 신체적 폭력에 대해 얘기할 수 있다. 한편, 또 다른 흔한 여성폭력으로 어떤 집안의 남자형제나 아버지가 살인을 저질렀을 경우, 그 집의 딸을 희생자의 가족에게 내어주는 관습(Khoon baha; 쿤 바하)이 있다. 남성들의 폭력에 대한 ‘보상’으로 일종의 물건처럼 여성을 제공하는 것이다. 많은 여성들이 노출되어 있는 언어폭력이나 위협도 흔하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연이어 벌어진 전쟁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는 인구가 줄고, 문화적 활동에 종사하는 숫자도 감소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여성이 직업을 가지면 뒤에서 악의적으로 수군댄다. 주변에서 ‘나쁜 여자’로 회자된다. 이는 사회 문제다. 나뿐만 아니라 직업 활동을 했던 여성이라면 누구나 이런 일들을 겪었다. 따라서 아프가니스탄에서 여자가 직업을 가지려면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직장에선 남성이 다수이기 때문에 거기서 오는 여러 어려움에도 대처해야 한다. 예를 들어, 남자들이 여자직원이 있는 것도 아랑곳 않고 떠들어대는 끔찍한 대화를 다 들어야 하고, 언어폭력을 당하기도 한다. 남자형제나 아버지가 여자가 가정을 벗어나 일을 하러 나가는 것 자체를 반대하기도 한다. 그 말인즉슨, 여성들은 우선 자기 가족의 남자들부터 설득하는 싸움을 거쳐야 사회에 나와 싸우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 2016년 출간된 <우리는 아프간 여성들: 희망의 목소리들>(We Are Afghan Women: Vocies of Hope) 표지. 탈레반 정권 당시 소녀들을 위한 학교를 비밀리에 운영한 야쿠비(Yacoobi), 최연소 여성 국회의원 파리드(Farid), 전국산파연합을 시작한 자파리(Jafari)부터 카펫 수공업자, 성폭력 피해 상담사, 사업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여성들의 용기 있는 목소리가 나온다.

 

사회는 미혼여성에게 아버지의 집에 살면서 그의 통제 하에 있으라 하고, 공부를 하든 무엇을 하든 아버지의 허락을 먼저 구하게 한다. 운 좋게도 나는 그러지 않아도 됐다. 우리 가족은 언제나 나를 지지해줬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 전반엔 아직 문제가 많다. 결혼 전에 아버지나 남자형제의 통제 하에 있던 여성은 결혼 후 남편에게 주도권이 넘어간다. 아무리 못 배우고 직업도 없는 남자라 해도, 대부분의 아프간 남자는 여자를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전 대통령 하미드 카르자이(Hamid Karzai)의 영부인, 박사 학위까지 가진 그 여성조차도 남편에게 허락을 받고서야 직장생활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도 정치활동을 계속해나가길 원한다

 

나는 정치 컨설턴트로 일했다. 학부에서 페르시아 문학을 전공했고 이후에 3년간 법을 공부했는데, 끝마치지는 못했다. 아프간의 미디어는 정계에 여성이 많이 진출해있다는 인상을 주려고 하는데, 현실은 쉽지 않다.

 

아프가니스탄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정치 영역에서 활동하려는 여성들에게는 많은 용기와 힘이 필요하다. 자신들이 대표하고 있는 시민들을 위해서 스스로를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 아프간에서는 특히 그렇다. 정치인들은 항상 살해당할 위험을 안고 산다. 다들 자기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들 한다. 수도 카불에 있는 국회 360여석 가운데 62석을 여성들이 차지하고 있다. 여성장관은 3명이다. 숱한 위협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용감하게 일하고 있다.

 

이 나라 역사에서 여성들은 그동안 많은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탈레반 정권 동안에는 남녀 불문,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었다. 카르자이 정권으로 넘어와서야 여성들이 일자리를 되찾고 정치적 역할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치안이 안전한 도시에서는 여성들의 활동이 더 활발하지만, 그들조차 정적과 가족들에게 늘상 협박을 당한다. 정치활동을 하는 여성들은 대부분 가족 때문에 골치를 썩는다. 대부분의 여성 정치인들이 싱글이거나 이혼 경력이 있다. 기혼인 경우엔 온갖 문제에 시달린다.

 

▶ 아프가니스탄의 대표적인 ‘페미니스트 정치인’ 슈크리아 바락자이(Shukria Barakzai) 모습. 원래부터 성평등 문제에 열정을 갖고 있었지만, 탈레반 공격으로 유산을 하고 남편의 일부다처 행태에 맞서면서 본격적으로 여성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활동하게 됐다. 성평등 정책을 핵심 공약으로 내 건 2005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재력가인 남편의 조직적 방해에도 불구하고, 역시 후보로 나온 남편보다 3배 이상 득표해 당선됐다. 스피커폰과 마이크 하나만 달랑 들고 거리 연설로 유세를 펼쳤다. 수없이 많은 암살 시도와 협박을 겪었고, 2014년 11월엔 그녀가 타고 있던 자동차를 누군가 의도적으로 들이받아 목숨을 잃을 뻔했다. 9명이 사망한 차량 충돌-폭발 사고 당시, 바락자이는 스스로 차를 탈출해 자기 몸이 불타는 와중에도 구조 작업을 도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병원에 입원한 지 48시간도 안 돼 자신의 생존을 알리고 투쟁 의지를 밝히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출처: mic.com)

 

앞서 말했듯이, 나는 탁하르에서 여성인권 활동가로 일하면서 여러 이슈를 다뤘다. 가정 폭력 문제를 해결하는데 힘썼고, 아프간 남성들의 의식을 개선하는 것도 내 일이었다. 정치 전문가로 일하기 위해 수도 카불로 옮겨, 이 분야 대통령 대리로 재직하기도 했다. 주로 여성 문제에 대한 보고서를 담당했는데, 그 과정에서 여성부나 인권단체들과 함께 일했다. 대통령이 읽는 보고서를 쓰는 것이 내 역할이었고, 대통령이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면 그의 이름으로 해결책을 찾아서 추진할 책임이 있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역의 다른 도시들과도 협조해 그곳의 여성 문제를 알아내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보고서들을 쓰기도 했다.

 

앞에서 미처 언급을 못했는데, 내가 독일로 망명 와야 했던 이유는 아프간 정부와 관계된 문제는 아니고 다른 정치적인 문제 때문이다. 나를 난민이 되게 한 수많은 문제들에 대해 하루 종일이라도 얘기할 수 있다. 내 바람은 내가 가진 서류들이 이곳에서 인정되어 석사과정 공부를 계속했으면 하는 것이다. 거기서 3년간 법 공부를 했고 1년만 더 하면 됐었는데, 이곳 대학에서 그걸 인정해줄지 모르겠다. 아프간에서 받은 페르시아 문학 학사 학위가 유효할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든 지금 하고 싶은 공부는 정치학이다. 나는 정치에 관심이 많고 앞으로도 정치 활동을 계속하길 원한다.

 

[번역자 노트]

 

1. 애도와 원망, 자기연민이 지나간 뒤에는…

 

이번에 내게 말을 건넨 여성은 누굴까, 마음속에 그려본다. 글을 통해 얻은 정보를 이리저리 맞춰보고, 모습과 말투도 상상해본다. 그녀는 야심만만한 정치 전문가다. 교육수준이 높고, 자기 직업과 경력에 대한 자부심과 애착이 강하며 소위 ‘좋은 집안’ 출신이기도 한, 엘리트다. 욕망에 대해 감추지 않고 말한다. 자기 분야에서 보다 많이 성취하려는 욕망, 힘들 줄 알면서도 정치권력을 가지려는 욕망, 더 많은 앎과 앎을 써먹을 수 있는 일자리에 대한 욕망, 조용하고 쾌적한 집에 대한 욕망. 이 모든 욕망을 나는 긍정하며, 또한 깊이 공감한다. 지금 남루한 누더기를 걸쳤대도 원하는 바를 또렷이 말하는 여성에게서는 빛이 난다.

 

이주(migration)는 사람들을 대체로 의기소침하고 주눅 들게 만든다. 어느 한 물리적 시공간에서 그 간 쌓아온 성취와 인맥, 지식, 경험치가 다른 곳에선 쓸모없어지기 일쑤이다. 큰 맘 먹고, 큰 돈과 시간을 들여 떠나는 이주도 그러한데, 강제된 이주(forced migration)는 오죽할까. 그녀의 이 모든 애도, 불만, 자기연민은 별 수 없이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차라리 충분히 슬퍼하고 원망하길. 그러다가 이내 툴툴 털고 일어나 자기 길을 다시 찾을 수 있길. 그녀 안의 재능과 기술, 지혜가 난민이 되었다고 어디로 사라졌겠나. 정의로운 그 마음과 의욕을 필요로 하는 곳이 도처에 많다.

 

2. 아프간의 여성학대 관습법 ‘쿤 바하’

 

국제법률재단(The International Legal Foundation)이 2004년에 발표한 ‘아프가니스탄의 관습법’ 보고서에서 화자가 언급한 ‘쿤 바하’(Khoon Baha) 관련 내용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이 관습법은 대대로 아프가니스탄 지역에 살아온 파쉬툰(Pashtun)족의 이름을 따, ‘파쉬툰법’이라고도 한다. 형법 개념이 응보적 정의(retributive justice)가 아니라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 가해자와 피해자 간 중재와 협의로 정의를 구현하는 접근 방식)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서구법과 다르다. 범죄를 행한 자를 감옥에 보내는 대신, 보통 피해자에게 정해진 보상(Poar, blood money 혹은 Khoon이라 한다)을 하고 용서를 구하게 한다. 보상의 내용은 부족마다 상이하고 범죄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그 중 ‘쿤 바하’(Khoon Baha)는 ‘살인에 대한 보상’ 일반을 뜻하는 단어이다. 예를 들어, 기혼 여성을 납치 또는 살해했을 경우 가해자는 피해자 가족에게 4명의 여성과 성스러운 코란 4권, 그리고 살찐 양 한 마리의 ‘쿤 바하’를 주라고 되어있다. 기혼 여성에 대한 범죄와 관련된 조항이 세세하게 이어지는 이유는 결혼한 여성들이 그들 남편의 ‘나모스’(Namos), 즉 자부심이자 재산, 책임이 된다는 서술과 관련 있어 보인다. 남편이 아내를 폭행, 상해, 치사하면 아내의 아버지가 보상을 요구할 수 있고, 보상 내용에 동의하지 않은 아버지는 딸의 살인자를 스스로 살해할 수 있다. 가해자는 언제나 남성으로 상정되어 있다.

 

화자가 여성인권 활동가로 일했던 탁하르 지역은 아프가니스탄 34개 행정구역 중 하나로, 북부에 있으며 인구는 93만여 명이다. 또, 탁하르 지역 안에는 17개 구역, 1천여 개 마을이 있는데, 대부분의 마을이 다인종 커뮤니티이자 시골이라고 기술된 2002년도 통계자료를 읽었다. 이것밖에 구할 수 없었다. 나는 아직도 가부장적 관습법이 공공연히 사회를 통치한다는 화자의 고발을 믿는다. 믿는데… 믿을 수밖에 없는데, 그러고 나니 목덜미가 섬뜩하고 뱃속이 멀미하듯 울렁인다.

 

[필자 소개] 하리타(정세연)- 독일살이 4년차. 온갖 차이와 차별에 대한 감각이 곤두서있다. 일다에 <29살, 섹슈얼리티 중간정산> 칼럼을 연재했고, 이를 바탕으로 <오늘부터 내 몸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어-더 자유로운 페미니즘을 위하여>(2017, 동녁)를 썼다.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환경사회학 석사 과정을 마쳤고, 젠더, 이주, 섹슈얼리티, 지속가능성을 주제로 계속 글쓰고 행동하려 한다. 하리타는 산스크리트어로 ‘초록’이다. facebook.com/haritamoonri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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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ㅇㅇ 2018/09/27 [16:22] 수정 | 삭제
  • 독일에서도 정치활동을 하고 싶다는 포부가 멋집니다. 그렇게 된다면 독일에도 아프간에도 얼마나 큰 자원인가요, 꼭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
  • 씨잇 2018/09/24 [20:31] 수정 | 삭제
  • 이 연재 저한테는 신선한 충격입니다. 늘 잘 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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